지역에서 본 언론

20대 여기자가 경험한 거대언론의 속살

기록하는 사람 2009. 9. 2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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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영의 <규칙도, 두려움도 없이>(에디션더블유, 334쪽, 1만4000원)를 읽었다.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사흘에 걸쳐 틈틈이 읽었지만, 300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만큼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라는 뜻이다.

'20대 여자와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20대 여성이 직장에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한 지침서, 즉 일종의 처세술 책이다. 하지만 나는 <헤럴드미디어>와 <중앙일보>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족벌·재벌언론에서 20대 중·후반을 보낸 그의 경험과 그의 눈에 비친 언론사 내부의 풍경을 특히 흥미롭게 읽었다.

헤럴드미디어와 중앙일보의 조직문화

사실 1인 사주가 지배하는 족벌·재벌언론사의 내부 분위기를 짐작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조직의 특성상 실제 경험자의 이야기가 이렇게 활자화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헤럴드미디어>와 <중앙일보>의 감추고 싶은 조직문화를 세상에 드러낸 최초의 기록이라 할만 하다.


한 선배 기자는 중요한 취재원들을 소개시켜 준다며 다짜고짜 후배 여기자를 불러냈다. 그 때 상황에 대한 이여영 기자의 기록은 이랬다.

"꽉 막힌 퇴근길 택시를 재촉해가며 찾아간 곳은 서초동 법조타운 상가 지하의 한 일식집. 식당에서 가장 널찍해 보이는 방 안에 몇몇 중년남성이 보였다. 그들 앞으로 문제의 그 선배가 세상에 다시없을 비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중략) "어, 우리 여영이는 저기 김 교수님 옆에 앉으면 되겠네." 이로써 오늘 내가 맡은 역할이 확실해졌다. 교수라는 사람이 한 술 더 떴다. "모델 기자, 내 애인 안 할래?""(57~59쪽)

오너의 가신들이 기자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거나, 심지어 오너가 여직원들을 개인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너 가신(家臣)들의 문제였다. 이들의 호가호위나 과잉충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겐 입사동기 셋이 있었다. 이들은 소속 부서도 달랐지만, 힘든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이 돼주는 존재들이었다. 간혹 동기들끼리 모여 술이라도 한 잔 한 날이면 그 가운데 한둘은 득달같이 불려가야 했다. 이들을 부르는 사람은 늘 똑같았다. 오너의 수족 노릇을 하는 한 상관이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은 물론 각자의 동향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심지어 가끔씩은 면전에서 충성맹세를 시키기도 했다."(291쪽)

"오너가 우리 동기들만을 술자리에 부른 것이다. 사실 그런 자리야 크게 문제될 것 없다. 참석자들 모두가 회사 사람이기만 하다면 오히려 영광일 수 있다. 일종의 회식, 그것도 운좋은 회식 자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오너의 친구들이 즐비했다. 각기 전문직 종사자인 유부남들이었다. 졸지에 어색한 미팅처럼 모임이 변하고 말았다. (중략) 오너가 회사에 소속된 여직원들을 자신의 소유물쯤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자리였다. 그게 우리 직장의 현주소였다."(292쪽)


이들 언론사 기자와 간부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신문을 제작하고 있는 지에 대한 적나라한 증언도 있다.

까발려진 족벌·재벌신문의 실체

"직속 상관 격에 해당하던 선배 기자 하나가 입사초기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너희들은 그냥 연예기사나 베껴서 인터넷에 올리라고 뽑은 거야. 그렇게 클릭수 올릴 궁리만 하란 말야.""(295쪽)

"그 해 말 내가 속한 디지털뉴스팀 전체가 편집인의 강의를 듣고 질의응답을 할 기회가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생존과 자살의 첫 번째 기로였다. 강의실에 앉아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중략) '중앙일보가 삼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영원한 이류언론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결국 난 성역을 건드리고 말았다. 마음으로만 우물거리고 있던 그 질문을 기어코 입 밖으로 내뱉고 만 것이다.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예상했던대로 편집인은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가 됐다."(303쪽)

"한 유력 대선 후보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회사에 들렀다. 편집국장을 포함해 편집국과 회사 수뇌부가 차량을 기다리며 회사 앞에 도열해 있었다. 주인 입장에서 회사를 찾는 손님을 일찌감치 마중하는 것쯤이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후보가 도착하고 나서가 더 문제였다. 그 앞에서 연신 황망해하는 말투며, 굽실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좀 비굴하다는 인상이 확연할 정도였다."(306쪽)


이 책의 곳곳에 이런 언론사 내부의 조직문화를 짐작하기에 충분한 경험들이 담담히 서술되고 있다. 그가 한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족벌·재벌언론의 속성을 압축해준다.

"대한민국에서 편집국장보다 센 사람은 언론사 사주야. 그 사람보다 더 센 사람은 대통령이야. 이보다 확실한 상하 관계는 없어. 그러나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대통령이 될 게 유력한 후보야.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제대로 보상받기 위해 편집국장이나 언론사 사주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줄을 서야 해. 편집국장이나 언론사 사주들이 대통령과 대응하거나 우위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 단임제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거나 자신들이 인정할 수 없는 대통령인 경우지. 그럴 때 그들은 밤의 대통령을 자처해."(306쪽)

이여영의 홀로서기가 실패해선 안될 이유

이밖에도 회사라는 조직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분석이라든지, 20대 여성들의 심리적 특성과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와의 충돌 등이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그냥 단순한 직장인의 처세술 책이 아니었다. 그런 조직문화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과 취향을 놓치지 않고, 당당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철학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중앙일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고, 프리랜서 기자로 홀로서기를 선택한다. 이로써 그의 홀로서기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을 스스로 떠안게 됐다. 만일 그가 실패한다면 적당히 타협하고 굴종하지 못한 자의 실패가 된다.

7장의 마지막 글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사회를 보는 관점이 압축돼 있다. 그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금 한국사회의 진보·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합리적 진보이며 발전적 보수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진단처럼 '경제적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진보와, 퇴행이 아니라 사회발전을 기대하는 보수가 다수'인 사회가 지금의 한국사회라면, 아니 2535세대의 다수이기라도 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정말 희망적이다.

40대 중반을 넘긴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는, 한편으로는 뜨금하고 불편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 그것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장이나 다른 공간에서 끊임없이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2535세대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이 책 말고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20대나 30대 여성들뿐 아니라 이미 한 조직에서 중견간부에 이른 40·50대 남성들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젊은 사람들을 알아야 제대로 부려먹을 수도 있을 것 아닌가.

규칙도, 두려움도 없이 - 10점
이여영 지음/에디션더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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