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드러난 암매장 유골, 어찌해야 할까요?

기록하는 사람 2009. 7. 31. 11:40
반응형

지난 59년간 진주시 외곽의 한 산골짜기에 암매장돼 있던 54구의 집단학살 희생자 유골이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유골은 또다시 갈 곳이 없어 떠돌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했지만, 국가가 그 안식처를 마련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3일에도 이 블로그를 통해 알려드렸듯이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가 무더기로 발굴됐습니다.

▷관련 글 : 김주완 '기자정신(?)' 많이 죽었다
▷관련 글 : 학살 암매장 유골, 발굴해도 갈 곳이 없다
▷관련 글 : "겨우 찾은 아버지 유골 모실 곳이 없네요" 

어제(30일) 오후 2시 이들 유해에 대한 현장설명회가 열렸습니다. 설명회에 많은 보도진이 다녀갔지만, 발굴된 유해의 안치 문제를 짚어준 언론은 없더군요.

발굴현장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만난 성증수(87) 할머니입니다. 다리가 아파 땅바닥에 퍼질러 앉은 채 쉬고 계셨습니다.


저는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뒤늦에 발굴된 데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이렇게 어렵사리 발굴된 유해이건만, 다시 가족 품에 안길 수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발굴된 유해와 유족들의 DNA 감식을 통해 가족여부를 확인하는 게 일단 불가능합니다. 국방부가 하고 있는 6·25전사자 유해발굴의 경우, 많은 예산을 들여 유전자 감식을 하고 있지만,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는 예산이 없어 감식 자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54구의 희생자 유해.


또한 전사자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만, 학살 희생자 유해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1년까지 한시적으로 임차한 충북대 임시안치소로 가야 합니다. 문제는 유족들이 어렵게 되찾은 유해를 또다시 타향객지로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데다, 설사 그리로 보낸다 하더라도 2년 뒤에는 또다시 갈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그 전에 먼저 진실화해위원회가 내년에 해체됩니다.


그래서 유족들은 진주시 외곽에 터를 구해 유해를 안치할 추모공원을 조성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주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는 지난 2004년 태풍 루사로 산사태가 나면서 드러난 163구와 이번에 발굴된 54구를 합쳐 217구로 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추가발굴까지 감안하면 더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군데군데 M1 탄피도 함께 발굴되었다.


지난 노무현 정부 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유족들에 대한 사과를 했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적지 않은 관심과 지원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현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정부와 지자체의 태도가 확 바뀌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군이 제 나라 국민들을 재판도 없이 죽여놓고, 60년이 다 된 지금까지 나몰라라 하는 나라를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된 우리 국민이 최소한 수십 만 명입니다. 이런 나라 국민이라면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일제의 각종 만행을 비난할 자격도 없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반복됩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반인권 범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광주학살, 용산학살과 같은 국가범죄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여러분, 누리꾼 여러분이 힘을 보태주십시오.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아래는 제가 오늘(31일)자 저희 신문에 쓴 기사입니다.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두 명씩 묶은 채 한 발씩 정조준 학살"

지난 10일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의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는 최소한 54구였으며, 이들은 2명씩 묶인 상태에서 1발씩 정조준 총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현장에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사용했던 M1 탄피 41점과 권총 탄피 3점, 탄창 1개가 흩어져 있었다. 당시 민간인이 흔히 사용하던 허리띠 또는 버클 11점과 38짝의 구두 및 작업화, 플라스틱 단추, 칫솔 등이 발견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경남대박물관 유해발굴팀(책임연구원 이상길 교수)은 30일 오후 2시 현장설명회를 열고 이같은 현장을 공개했다.

유해는 2명씩 서로 팔이 교차되도록 뒤로 손목이 묶인 채 1열에 4~8명씩, 총 9열 횡대로 앞사람의 발목 근처에 엎어진 상태였다. 탄피의 수로 보아 1명당 1발씩 정조준하여 순서대로 사살한 것으로 보였다. 유해 중 간혹 두개골이 심하게 파손되었거나 이빨이 주변에 흩어진 것으로 보아 머리에 총탄을 맞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도 있었다.


현장감식 결과 대체로 20~30대 남성들로 파악됐으며, 유품과 복장 상태로 보아 1950년 7월 말 인민군이 진주를 함락하기 직전에 학살된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으로 추정된다.

이상길 교수는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버스 1대와 트럭 2대 등 모두 3대의 차량이 문산읍을 통과하여 이곳으로 왔으며, 그 중 한 대는 지금의 국제대학을 막 지난 까치골 입구, 또 한 대는 이곳 가늘골(아랫법륜골), 나머지 한 대는 200m쯤 더 위쪽인 윗법륜골 깊은 골짜기에서 학살이 자행됐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윗법륜골에 대한 발굴작업도 곧 진행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추가로 50~100여 구가 더 발굴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렇게 발굴된 유해를 어떻게 보관·안치하느냐는 것이다. 당장 진주유족회(회장 강병현)와 대책위(상임대표 김태근)는 진실화해위가 충북대에 설치해놓은 임시안치시설로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59년동안 구천을 떠돌던 원혼을 이제야 찾았는데, 또다시 타향 객지로 보낼 순 없다는 것이다.

강병현 회장과 김태근 상임대표는 "경남도와 진주시에 추모공원 건립을 요청해놓은 상태"라며 "만일 그게 안되면 유골을 안고 도지사실에서 농성이라도 벌이겠다는 게 유족들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유족회 강병현 회장은 터져나오는 울음 때문에 인사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날 설명회에 참석한 진실화해위 김동춘 상임위원도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남은 과제는 역시 유족과 지역사회의 몫"이라며 "지역사회 관계자들과 공무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줄 것"을 당부했다.

김 위원은 이어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에 이어 조만간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서도 진실규명 결정이 있을 것이며, 과거사재단 설립과 배·보상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할 예정"이라며 적극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한편 이번 발굴로 진주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는 지난 2004년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돼 경남대에 임시보관 중인 163구와 함께 모두 217구로 늘었으며, 윗법륜골에 대한 추가 발굴로 갈곳 없는 유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관련 글 : 사진과 영상으로 보는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