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살현장 유골 사진촬영을 포기한 까닭

나는 매주 월요일자 신문의 17면(기획면) 한판을 채워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때그때의 이슈를 취재해 기획기사를 출고하거나 '김주완이 만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내고 있다.


지난 금요일(10일) 알고 지내는 '민간인학살 진주유족회'의 한 회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유해발굴 현장에서 유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명석면 용산리에서 진행돼왔던 발굴은 사실상 실패했다. 그런데 문산읍 상문리에서 성공한 것이다. 그는 다음날인 11일 현장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주 월요일자 기획을 그걸로 잡기로 했다.


다음날 마침 진주 가는 후배의 차를 얻어타고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법륜골에 도착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골짜기로 오르는 길에 발굴책임자인 이상길 경남대교수를 만났다. 그는 대구에 볼 일이 있어 가는 길이라고 했다.

발굴현장을 떠나는 이상길 교수의 뒷모습.


이 교수는 "비가 와서 지금 막 발굴현장을 덮어버렸는데…"라고 했다. 선 채로 유해의 상태 등 몇 마디를 물어본 후, 이 교수를 보내고 현장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기자는 나뿐이었다. 진주유족회 회원들이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를 어떻게 안치할 것인지를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함께 논의과정에 참여한 후, 회의를 마치고 일어섰다.


그제서야 남아 있는 발굴팀 책임자(연구원)에게 "덮어둔 방수포를 잠시 들추고 사진 좀 찍으면 안될까요?"라고 부탁해봤다. 예상은 했지만 단호하게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뻔했기 때문이다. 일단 책임자인 이상길 교수의 부재상황이어서 결정권한이 없었고, '특정' 기자에게 먼저 유해를 공개했다간 타 언론사 기자들에게 온갖 원성을 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이상길 교수에게 전화를 하든지, 아니면 싸워서라도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도저히 안되면 발굴팀이 철수하길 기다렸다가 살짝 가서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욕 먹는 건 잠시뿐이다.

하지만 순순히 포기하고 말았다. 타 언론사 기자들보다 단지 시간상으로 좀 더 일찍 보도했다는 게 대단한 특종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다, 그럴 경우 잘 삐치는 기자들의 속성상 발굴팀원들이 괴롭힘을 당할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덮여있는 방수포 중 가운데 볼록한 곳에서 두개골 등 유해 3구가 드러났다고 한다.


특히 이런 역사와 관련된 사안은 센세이셔널한 사진을 좀 더 먼저 보도하는 것보다는, 좀 더 정확한 내용으로, 올바른 의제를 잡아 보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좀 더 많은 매체에서 널리 보도해주는 것도 좋다. 그래서 방수포가 덮혀 있는 현장 사진 몇 장을 찍고 조용히 돌아섰다.


유골 사진은 없었지만, '발굴된 유해 갈 곳이 없다'는 방향을 잡아 20매 짜리 기사를 작성했다. 강병현 유족회장의 짧은 인터뷰도 덧붙였다.

아마 내일자로 이 기사가 나가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찾는 기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유골 사진은 그들에게 양보한다. 예전 김주완의 무모한 기자정신(?)도 이젠 많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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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기록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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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찌니 2009.07.12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래서 제가 이 블로그를 좋아합니다.
    특종도 중요하지만 정확한 진실 보도를 하려는 마음이 진짜 기자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김주완 기자님의 기자 정신은 팔팔하십니다.

  2. Favicon of http://blog.daum.net/hwking TV속 세상 2009.07.12 1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대 죽지 않았습니다.아직도 기자 정신은 충분합니다.
    님 처럼 열심히 하는 기자도 없을 듯합니다.
    힘내에세요.^^

  3.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 실비단안개 2009.07.12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진정한 기자 정신이 아닐까요?

    수고하셨습니다.()

  4. Favicon of http://kisilee.tistory.com 구르다보면 2009.07.12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은 것이 아니고..
    배려까지 겸비하신 겁니다.
    블러그의 영향은 아닐까요..
    공유,,나눔,,

  5. Favicon of http://luimier.tistory.com/ 마루나 2009.07.13 0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하셨습니다.
    수십년 억울하게 묻혀있던 유골들이 단 몇초 일찍 나온들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당시 상황이야
    유족들과 발굴 담당자들의 의견이 있었을테고,
    그걸 받아들이시고 의미있는 행동과 글을 써주신 기자님의 진심이 잘 전달됩니다.
    속보로 승부하는 것보다 진실과 진심을 전하는 이런 글들이 특종이 아닐까요?

    활기찬 한주 시작하세요!!

  6. dream 2009.07.13 0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가장 열심히 하시고 게십니다
    힘내세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ovessym 크리스탈 2009.07.13 0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의 경우에는 속보라고 짧게 간단하게 나오는 기사보다
    뒤에 나오지만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정보가 있는 기사를 더 선호합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알면서도 기사화시키지 않는
    그런 인간적인 면이 있는 기자님들이 진정한 기자라고 생각합니다.

  8. Favicon of http://nabucco47@gmail.com 글쎄요 2009.07.13 0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슨소린가 했네요
    님만큼 투철하고 기자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도 요즘 보기힘듭니다
    건투 하십시오

  9. 서가 2009.07.13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터넷 세상이 참 좋아요.

    지역에서 열심히 뛰고 계시는 기자분을

    이렇게 친숙하게 접할 수 있고 말이죠.


    김주완님 팬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잘 부탁합니다.

  10. 윰스남편 2009.07.13 1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존경스럽습니다..저도 잠시나마 기자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고민했던 것이 이런 부분이었습니다..남들보다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한가..의미있는 기사로 가공해내는 것이 더 중요한가..

    5년차 미만의 초짜 기자였음으로 결론은..늘 당연히 '먼저' 였습니다..그것이 연차에 맞는 기자가 취해야 할 당연한 행동이었겠지요..

    못다 끝낸 학업을 핑계로 기자를 잠시 접어두었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진짜 '기자정신'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늘 고민하고 배울 수 있었기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더랬습니다..

    선배님의 포스팅을 보며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제 고향이 경남인 관계로 언젠가 선배님께서 계시는 곳을 지나게 되면 초면임에도 술 한 잔 얻어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늘 건승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11. 2009.07.13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2. Favicon of http://sanhajunha.tistory.com/ 뉴클리어 2009.07.13 1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슬픈 현실입니다. 양민학살에 대해....유해 발굴에 대해....관심도 없는 자들을 위해...일개(?) 지방지 기자가 뒤에 일어 날 이런저런 불미스런(?) 일을 염려해야하고..................타 신문사의 정확한 사실 보도까지 신경쓰야 하니.....

    아무튼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기사 공짜로 보는데...부산서 한 잔 사는 것으로 구독료를 대신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사상터미널 근처에 돼지껍데기 잘 하는 집이 있습니다. 전화번호입니다. 입력해두셨다가 연락주십시요. (010-7***-5***) *확인하시면 전화번호는 지우겠습니다.

  13. Favicon of http://coro.tistory.com 코로 2009.07.13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험악한 사진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일본 만화 마스터 키튼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요^^

  14. 나이트세이버 2009.07.13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방 신문사에서 기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 공감가는 글입니다.

    소위 '물 먹기' 싫어서 다른 신문사보다 빨리 보도하려는게 이 바닥 속성인데 저 역시 그런 일 때문에 고민을 좀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와 또 한 명이 다른 기자들보다 먼저 사실 확인을 했지만 당사자가 하루만 기다려달라기에 전 그 기자에게 데스크에 보고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겠다는 대답도 들었고요.

    제가 순진했지요... 다음 날 버젓이 나와있더군요. 아침 댓바람부터 참 욕 많이 먹었습니다. 그걸 믿었냐고.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욕이야 한 번 먹고 나면 그만이지만 취재원과의 신뢰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발굴팀원분들을 배려하시는 모습 저는 보기 좋습니다(이크, 써놓고 보니 건방 떠는 듯 하네요;;).

  15. 노도사 2009.07.14 1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 발굴팀원들의 처지까지 헤아려 주시는 님은 진정한 PRO입니다.
    사랑해요 김기자 Fighting!
    더욱더 많은 관심 부----탁----해----요.

  16. 타이그리스 2009.07.15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른언론인으로써 오래오래 우리옆에 계셔주세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17. 팬톰 2009.07.22 1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기자님의 이성적 판단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몇시간 빠른 사진한장 보다는......
    "그들의 죽음을 사실대로 파헤쳐 주시는것이
    더 의미있을듯 합니다!
    편향됨이 없이 정말 공정하게.....!"
    물론 정당한 "살인" 이라는것은 존재할수 없겠지만
    왜? 그럴수 밖에 없었는지도?
    김기자님의 수고를 기대해 봅니다!
    날씨 덥습니다...건강 조심 하시고
    부천에서 "팬"

  18. 김형섭 2009.11.11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기자분들, 그리고 취재대상들까지 배려하는 마음씀씀이가 진정 대인배이십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