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하수(下手)만 택하는 MB정권 서글프다

김훤주 2009. 6. 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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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해 29일 국민장이 치러졌습니다.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 자살 직후, 이명박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와서 조문하겠다고 했을 때 "그래 그 정도 머리는 있어야지", 했습니다.

누구나 짐작하시겠지만, 이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몸소 머리를 조아리고 조문을 하면 이명박 반대 민심이 조금은 수그러들 것이고, 그에 더해 애도하는 자세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는 인정을 조금이라도 얻으면 그만큼 득이 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설령 일이 좀 꼬여서, 현장에 있던 노사모 사람들에게 봉변이라도 겪는다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정적에 대한 해코지 탓을,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노사모도 함께 뒤집어써야 할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게 또 마지막 가는 인간에 대한 합당한 예의 아니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봉하마을 분향소에 오는 게 그리 어려웠을까? @김주완


2.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영결식을 서울에서 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봉하마을 조문은 않고 서울에서 어떻게든 처리하겠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어이구 그 정도 머리가 되기를 기대한 내가 어리석지." 이랬습니다.

마치 길고 어려운 수(手)는 볼 줄 모르고, 단지 눈 앞에 펼쳐지는 짧은 수밖에 볼 줄 모르는 하수(下手)가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눈 앞에 빤히 보이는 수라면 봉변 따위는 없을 줄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와 세계에 몇 분 동안 생방송이 됐다지요.

사죄하라고 소리쳤다고 입이 틀어막힌 민주당 백원우 국회의원. 경남도민일보/사진공동취재단


길이 좀 멀고 험하기는 해도, 이기면 크게 이기고 지더라도 손해는 거의 보지 않는, '꽃놀이패'인 봉하마을 조문은 버리고, 이겨도 별로 득 되지 않고 지면 크게 망신하는 손해패인 '경복궁 조문'을 골랐으니 어떻게 하수 중에 하수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3.
만약 이렇게 이명박 대통령이 통 크게 굴었다면, 평소 이명박을 좁쌀처럼 잘다고 여기는 세간의 인심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른바 BBK는 물론이고, 이명박 대통령 인생 전력 곳곳에서 "이문에 약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의 ‘쩨쩨한’ 전력 가운데 대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식들을 자기 빌딩을 관리하는 업체에 유령 직원으로 등록해 급여를 지급하고 그에 해당되는 수입에 대해서는 세금도 내지 않았다는 얘기인데요 이번에 잘했으면 이런 좀스러운 이미지를 조금은 녹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좀스러운 이미지는 이번에 하수 노릇을 한 번 더 하는 바람에 더욱 커졌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모 연설을 하겠다 했을 때 그 기회를 빼앗은 것입니다. 정말 하수입니다. 눈 앞에 바로 보이는 수조차 읽지 못하는 노릇입니다.

이렇게 엉터리 수를 두다 보니 예상도 못한 역풍을 받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역 앞 광장 분향소에 가서 한 마디 질렀다지요. 이 정부 아래 경제 위기뿐 아니라 평화 위기에 더해 민주주의 위기까지 왔다고 우리가 나서 찾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노 전 대통령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김두관도 말했지만, 공식 영결식에서 발언하게 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렇게 강수를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수를 주고받으면서 공격과 방어가 이뤄지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방어는 않고 공격만 계속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준밖에 안 되나 봅니다.

4.
이런 엉터리 수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잘못된 수읽기에서 나옵니다. 안상수인가 한나라당 사람이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광장을 허용하면 소요가 일어난다고. 무슨 헛소리입니까. 이제 초반 국면에서 포석을 하는 판인데, 뜬금없이 무슨 끝내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광장을 허용하면 소요가 난다고? @경남도민일보


지금은 추모 국면입니다. 여기서 얻어야 할 것은 양쪽 다 민심입니다. 한 대 더 맞고 덜 맞고가 아닙니다. 민심을 얻는다면 한 대 아니라 열 대 백 대 천 대 만 대도 얻어터질 수 있습니다. 뒤집어서, 민심을 잃는다면 만 대를 두드려 팬다 해도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바둑 격언에 나오는, "키워서 버려라"든지 "돌은 잡았는데도 바둑은 지는 어리석음은 피하라"든지 하는 얘기가 별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전투에서는 이기면서도 전쟁에서는 지는 그런 하수밖에 안 되는 손놀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향소 강제 철거 투쟁에서 이명박이 이겼습니다. 서울광장 봉쇄 투쟁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이겼습니다. 조문객 연행 투쟁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마찬가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얻어야 할 민심은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와 변은 양쪽 다 나름대로 굳혔습니다. 이제 민심이 떠다니는 어복(魚腹)을 노려야 합니다.
 
5.
바둑은, 집만 지켜가지고는 절대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 양반은 벌어놓아져 있는 집 잃어버릴까만 걱정하면서 자기 수를 자꾸만 까먹고 있습니다. 세력이 약한 데서는 끊지 마라 했는데, 당장 자기 돌이 눈에 보인다고 아무데나 덜컹덜컹 끊어버립니다. 

이 하수는 더이상 황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앞뒤가 없습니다. 애초 기대를 했던 제가 잘못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다할 줄 모르는 이런 하수가 다스리는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저는 새삼 서글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훤주
※ <미디어스>에 5월 29일 실었던 글을 지금 상황에 맞춰 크게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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