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옛날 선비들은 어떤 아내를 바랐을까

김훤주 2009. 4. 2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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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 연구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선비 문화>가 있습니다. 2009년 봄호를 보면 78쪽에 ‘조선 선비가 바라는 아내의 상’이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남자인 저조차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유한준이라는 선비가 쓴, ‘아내의 방에 붙인 글(孺人室記)’입니다. 유한준(1732~1811)은 조선 후기 이름난 문인인데, 여기 이 글은 1760년 스물아홉 때 적어 벽에 붙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낮에는 음식을 준비하여 한준을 먹이고 밤에는 길쌈을 하여 한준에게 의복을 입힌다. 한준은 음식과 의복이면 그뿐이니, 그밖에 다른 것이 있고 없다 하여 근심하는 일은 알지 못한다. 그 남편으로 하여금 먹고 입는 일로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으니, 이는 부인의 뛰어난 행실이다.


<예기(禮記)>에서 말하지 않았소? 부부가 화목하면 집안이 살찐다고. 당신은 집안을 살찌우는 처(肥家妻)가 되시오. ……당신은 못난 것이 없는 처(無非妻)가 되시오. ……당신은 순종하고 겸손한 처(巽順妻)가 되시오.”

숨이 막히지 않나요? 저는 “그러면 유한준 당신은 뭐 하는데?” 이렇게 묻고 싶어지네요.
이어집니다.

“옛 사람은 부부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라 하였으니, 손님 같은 처(如賓妻)가 되시오. 칼을 들어 짜던 베를 잘라 남편으로 하여금 학문에 힘쓰게 한 고사가 있으니, 칼로 베를 자르는 처(斷機妻)가 되시오. 조그만 수레를 끌고 고향으로 돌아가 항아리를 들고 물을 길으면서 아내의 도리를 닦은 이가 있었으니, 작은 수레의 처(鹿車妻)가 되시오.


드디어, 남편이 공부 않고 한눈파는 것까지 아내 탓이 되는군요. 뒤에 보니 무비처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질박한 아내’이고, 녹거처는 ‘담박하게 사는 아내’랍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남편이) 투박하게 하면 투박하게 하는 대로 견뎌내는 그런 아내 같습니다만.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유인이여, 유인이여. 공경은 덕의 집이요, 화목은 상스러움의 매개이니, 오직 화목하고 오직 공경하여, 수많은 복록이 다 이르기를. 거친 베옷을 비단옷처럼 곱게 여기고, 거친 밥을 엿처럼 달게 여기시오. 이 방에 들어가 백년해로 하세.”

‘양처(良妻)’ 이데올로기라 할만한데, 이런 이데올로기가 지금은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여전합니다.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라는 책 121쪽에도 나옵니다.

“실상 한 여자가 집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이 원숭이에서 비롯됐다는 진화의 숨은 장면 같이 수수께끼인 부분이 있으니 여자와 집 사이에 몹시 친한 유전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각본에 따른 것이다.

작금 자본과 사회가 남자들을 부추겨 함께 외치되 집에 있는 여자는 아름답도다, 젖 물리는 여자는 아름답도다, 여자들은 낳은 애를 어떻게든 질러내더라, 배웠건 못 배웠건 집에 남아 낳고 또 낳아라. 집에서 나와도 잊지 말지니, 그대들은 집사람, 부를 땐 고무장갑 끼고 달려와도 나가라면 말없이 썰물처럼 빠져라, 집에서건 밖에서건 아주 아주 싼값에 노동과 웃음과 서비스로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그대들은 집사람.”

204쪽에 이어집니다.

“여성은 가족에서 부여받은 역할을 이행하면서도 이를 제대로 수행 못 한다는 자의적인 기준과 판단으로 구타당하거나 억압당하기도 한다. 또한 좋은 어머니, 아내라는 환상적인 기준, 기대치와 어긋나느 역할 속에서 늘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유한준의 아내도 그랬겠지 싶습니다. 아내 방에다가 그리 적어 걸었으니 이런 숨막힘이 아내 내면에 확실하게 심겼지 않았을까요?


<선비 문화>에 이 글을 쓴 사람은 같은 글에서 “조선의 선비들은 살림만 잘 사는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 속물이 되지 않고 고상하게 살고자 하는 뜻을 함께 하고, 남편의 잘못을 바로잡고 큰 학문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내를 이상적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선 선비가 바라는 아내의 상’은 허상입니다.

남편은 아무 책임도 안 지면서, 팔방미인 정도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높은 수준을 요구해, 거기에 못 미치는 때에는 스스로 책망(自責)하게 만들었습니다. ‘손 안 대고도 코 푸는’, ‘돼 먹지 못한’ 수작입니다. 아내에게만 짐을 지우는 못된 짓입니다.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는 204쪽에서 ‘행복의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읽어볼 만합니다.

“가족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구성원 모두가 진정 행복해져야 하고 누구의 삶을 희생한 안락함이 아니어야 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로 선택하고 타협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목소리와 시도가 금기(禁忌)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또 있습니다. “고통이 비밀이 되지 않아야 하고 현실과 어긋난 부분이 끊임없이 발화(發話)되어야 하고 가족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와 자립보다 가치가 있다는 고정관념이 타파되어야 한다. …… 분배와 역할이 성별화되어 평등하지 않은 가족, 구조적으로 정의롭지 않은 가족에서 다른 모습을 찾아가려면, 가족 속에서 침묵당한 눈으로 가족을 다시 보아야 한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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