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김해에 한국판 '쉰들러'가 있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2. 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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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원 학살 직전 100여 명 목숨 구한 한림면장

최근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결정이 이뤄진 김해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당시 유독 한림면에서만 희생자가 거의 없었던 배경에는 한국판 '쉰들러'가 있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쉰들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군이 학살하려던 유태인 1200여 명을 구해낸 독일의 기업가로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리스트>의 실존인물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주민들에 따르면 김해의 쉰들러는 1950년 한림면(당시 이북면)의 최대성 면장(1906년생)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면장을 맡고 있던 최대성씨는 한국전쟁을 거쳐 1956년까지 면장에 재임했다.

최대성 한림면장의 1966년 회갑 때 사진.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3일 김해경찰서 한림지서는 비상소집 명령을 내려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한림면소재지 금융조합 창고에 구금했다. 이 예비검속 과정에는 대한청년단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도 나서서 경찰을 보조했다.

다른 읍·면의 보도연맹원들도 같은 시기에 예비검속돼 경찰서 유치장과 김해읍사무소 창고, 김해전매소 창고 및 진영금융조합과 한얼중학교 등에 구금돼 있던 중 생림면 나밭고개와 상동고개, 대동면 주동리 주동광산과 숯굴, 진례면 냉정고개 등에서 대부분 학살됐다. 이렇게 하여 최근 진실화해위가 희생자 명단을 확인한 사람만 272명이었다.

그러나 유독 한림면 보도연맹원 100여 명 중 학살된 사람은 CIC(육군정보국 특무대)에 직접 연행됐던 4명뿐이었다. 한림면 금융조합 창고에 구금됐던 사람들은 한 명도 학살되지 않았던 것.

이처럼 한림면 보도연맹원들이 생명을 구한 것은 경찰의 학살을 최대성 면장이 앞장서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최 면장은 경찰이 자신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당시 한림면 대한청년단 단장을 하고 있던 동생 최대홍씨를 통해 다시 경찰을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최대성·대홍 형제는 창고에 구금된 사람들 중 젊은 사람들은 모두 대한청년단에 가입시키는 조건으로 석방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창고 뒷구멍으로 탈출시켰다.

2007년 숨진 영남기호학파의 마지막 유학자 화재 이우섭 선생이 쓴 최대성 면장의 묘비명.


이에 따라 최대성 면장이 1978년 72세의 나이로 숨지자 영남 기호학파의 마지막 유학자로 불렸던 화재 이우섭 선생(2007년 7월 작고)이 직접 묘비명에 당시의 사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대성 면장의 조카이자 최대홍 단장의 아들인 최윤규(72·김해시 한림면 명동리)씨는 "나도 그 때 어른들이 잡혀 있는 걸 봤고, 인근 독점골짜기에 다른 지역사람들이 경찰에 끌려와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며 "한림면에서는 큰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모두 살았는데, 그 덕분인지 아버지가 우익단체의 단장이었지만 이후 좌익으로부터도 아무런 해꼬지를 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화재 선생이 쓴 묘비명에는 "경인년 대란에 지역청년이 좌경연맹에 오염된 자를 공이 가진 방책을 다하고 사력을 짜서 경각의 위명을 살려낸 것과, 피란민의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구제한 것이 만인에 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같은 최대성 면장의 미담은 지난 1월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결정서에도 공식 기록됐다.

백부 최대성 면장과 아버지 최대홍 한림면 대한청년단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최윤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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