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주완

24년 전 만났던 막걸리 보안법 할아버지

김훤주 2009. 1. 2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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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당 최문순 국회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1월 15일 주최한 토론회 플래카드를 오늘에야 봤습니다. 물론 전에부터 인터넷에서 돌아다니고 있었겠지만, 제가 좀 많이 둔한 탓에 이리 됐습니다.

‘긴급 토론회 - 인터넷판 막걸리 보안법을 폐지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사이버 모욕죄를 일러 ‘인터넷판 막걸리 보안법’이라 한 것 같습니다. 토론회 내용은 제가 읽어보지 않았습니다만.

최문순 의원 토론회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 결에 저는 24년 전인 1985년 겨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막걸리 보안법’의 전형을 그 때 제가 현실 속에서 진짜로 만났던 것입니다.

2.
저는 서울 구치소 미결(未決) 감방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국보’가 하나 새로 들어왔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저도 학생운동 기관지를 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딱지를 달고 있었거든요.

‘나중에 운동 나가면 한 번 만나 봐야지.’ 마음을 먹었더랬습니다. 그래 만났는데 웬걸, 제 예상이랑 크게 달랐습니다. 제 또래겠지 생각했는데, 앞에 서 있는 이는 예순을 넘긴 할아버지였습니다.

오마이뉴스 사진.


순간, 이북에서 온 간첩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그래서 조금 무서운 마음도 생겼지만), 어쩌다 이리 됐는지 제가 물었지요. 행색이 아주 꾀죄죄했습니다. “모르겠어. 막걸리를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경찰서대?”

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좀더 일러줬습니다. “경찰이 그러는데 신고가 들어왔다 그래. 내가 술에 취해 ‘김일성 장군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이러면서 두 손을 번쩍번쩍 치켜들었다는 거야.”

저는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별 것 아니니까 곧 나갈 것 같은데요. 아무리 세게 나와도 1심에서 집행유예일 겁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아니야, 아닐 거야.” 이러시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 월남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북에서 한 농지개혁 따위를 눈으로 몸으로 겪었을 것입니다. 이북에서는 당시 의식주만큼은 해결해 줬습니다. 이남에 와서는 농사짓던 이북에서와는 달리 날품팔이를 했다고 했습니다.

3.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일가붙이도 없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했습니다.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집도 없고 겨우 세 들어 사는 방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선술집이나 포장마차에서 고달픈 색신(色身)을 달래느라 막걸리를 들이켜다가 그만 취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만 옛날 생각이 나서 앞뒤 가리지도 않고 그냥 “수령님 만세!”를 외치고 말았습니다. 한 열흘쯤 지나니 할아버지 공소장이 왔습니다. 저는 공소장을 받아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할아버지가 이번에 집행유예로 나갈 수 없는 사정이 적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막걸리 국보’가, 초범이 아니고 재범이었던 것입니다. 당시로부터 10년도 넘게 전인 73년인가에(그러니까 유신헌법 제정 직후가 되겠네요.), 똑같이 술에 취해 ‘만세’를 불렀다가 감방에 들어간 경력이 있었습니다.

재범일 때는 보통, ‘죄질이 불량’하고 나아가 이른바 ‘상습성’까지 있다는 딱지를 붙여 집행유예를 잘 때리지 않습니다. 실형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징역 3년 자격정지 4년 집행유예 5년 선고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풀려나면서 할아버지 있던 감방에 가서 잘 지내시라 인사를 했는데, 제가 입고 있던 솜옷 사제 수의(囚衣)를 가리키면서, “너무 추워. 나갈 때 나 주고 가.” 그랬습니다. 때는 1986년 1월 9일인가 그랬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워서 고달픈 분이셨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군부 독재 아래 살아야 했던 슬픈 현대가 거기 있었습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또는 할 수 있는 말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입에 달았다가 호되게 당하던,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이지요.

4.
아마 ‘표현의 자유’를 옭아맨다는 측면에서 사이버 모욕죄는 막걸리 보안법이랑 진짜 닮았습니다. 그래서 최문순 의원이 이런 플래카드를 내걸고 토론회를 긴급하게 열었나 봅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것은 타당한 표현입니다.

현행 형법으로 실행되고 있는 모욕죄가 친고죄(親告罪)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는 달리, 새로 만들려는 사이버 모욕죄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라는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수사기관의 개입이 곧장 이뤄질 수 있습니다.

‘친고죄’란 이른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도 할 수 있고 처벌도 할 수 있습니다. 고소가 없으면 수사기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반의사불벌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벌은 피해자가 바랄 때에만 할 수 있지만, 수사만큼은 고소가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5.
현실에서 보자면, 제가 이명박 대통령이나 한나라당을 크게 욕보였다 해도, 현행 형법상 모욕죄로는 대통령이나 한나라당이 고소(이 경우 정치적 부담이 만만찮지요.)를 해야만 수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버 모욕죄가 지금 한나라당이 하자는 대로 실행이 되면(찬성론자들 사이에서는 반의사불벌죄 규정조차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런 고소가 없어도 경찰이나 검찰이 곧바로 수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러니까 모욕죄가 아니라 사이버 모욕죄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이명박 대통령이나 한나라당으로서는,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지요.

대부분 사람들은 권력이 자기를 지켜본다는 느낌만 받아도 손은 오그라들고 발걸음은 멈칫거리게 돼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컴퓨터를 들여보고 있다가, ‘아 저거 모욕이잖아.’, 임의로 자기 판단만으로도 수사를 할 수 있다면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크게 찌그러지겠지요.

김훤주

한국사회의 이해와 국가보안법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편집부 (한울,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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