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해마다 시집 내고 다달이 공부하는 노동자 동인

김훤주 2008. 12. 25.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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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객토. 동인들 바뀜은 있지만 19년 동안 이어온 모임입니다. 저는 아니지만, 마산 창원 일대에 터잡고 사는 노동자들의 시 쓰는 모임입니다. 12월 6일 이들이 마산역 한 횟집에 모여 동인 시집 제6집 출판기념회를 했습니다. 스무 사람 남짓이 모인 자리였지요.

저는, 오랫동안 이들과 만나지 못했던지라 이 날 자리가 출판기념회인줄도 모르고 끄덕끄덕 찾아갔습니다. 갔더니 6집 <가뭄시대>가 한 쪽에 쌓여 있었고, 표성배 이상호 정은호 이규석 문영규 배재운 박만자 같은 동인들이 있었습니다.

서정홍 선배는 <가뭄시대> 뒤에 붙인 글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서 객토를 이리 말했습니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첫 마음 변하지 않고 ‘공부 모임’을 한 달에 두 번씩이나 하고, 200년부터 2008년까지 모두 여덟 권의 동인 시집을 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부지런한 동인 모임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예 없는지도 모릅니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돈벌이도 안 되는 ‘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붙들고 있는 것인지요.”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합천 산골에서 몸소 농사를 짓는 서정홍 선배는 같은 글에서 시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맨발로 산밭으로 가서 괭이로 이랑을 만들다가 ‘시인’이란 말이 참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이나 노동자들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 싶었습니다. 시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지요. 시는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것이지요. 시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 주는 것이지요.

시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이지요. 시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거나,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는 것이지요. 시는 참된 것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는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

기륭전자 농성 사진을 표지에 실었습니다.

뒤로 책장을 넘깁니다. “‘모두들 어느새 나이가 들었구나!’ 싶습니다. …… 슬프고 가슴 아픈 시가 많았습니다. 동인들 이야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라 해도 걱정이 될 텐데, 그게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라 더욱 슬프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몇 줄 건너서는, “밤늦도록 읽고 또 읽으면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은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꿋꿋한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메마른 세상에 꿈이라도 없으면 살아도 죽은 목숨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꿈을 꿉니다. 어디로 가야 ‘사람의 길’로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지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마지막에는 이리 적혀 있습니다. “부디 이 시집을 많은 분들이 읽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집이 세상에 나오는 날, 벗들과 아무 걱정 없이, 정말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술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그날까지 모두들 잘 지내시길…….”

책이 나온 그 날 그 자리에는 동인은 아니지만, 이월춘 이응인 이명희 성영길 이한걸 이런 이들도 오셨습니다. 저는 그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몇몇은 시를 낭송하셨고 멋지게 플루트를 부신 분도 계셨습니다.

플루트를 부는 가운데 낭송을 하기도 했고요, 그냥 플루트만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뜻으로 여럿이 함께 어울리면 이리 좋아질 수 있구나 한 번 더 느꼈습니다. 이날 이토록 좋은 자리도, 결국은 ‘객토’와 <가뭄시대>가 없었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3.
동인들은 머리글에서 이리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희망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속단하지 마라,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희망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데서 희망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조금은 익숙한, 변증이고 역설입니다. “그러나, 가는 발자국이 자꾸 느려진다. 한 발자국이라도 어깨를 맞대 마음 따뜻하게 나누며 함께 갈 수 있는 동지가 필요하다.” 했습니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꿋꿋한’ 모습입니다.

이들은 “문학의 생명은 소통에 있다.”고 잘라 말합니다. 또 “선 자리를 밝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 내 놓고 보면 늘 막막하다. 소통은 상하좌우가 따로 없다. 좀 더 제자리에서라도 열심히 뛰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도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가뭄시대는 무엇일까요? “공장도 학교도 논도 밭도 메마르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시대에……” 눈에 보이는 어떤 물건을 두고 메마르다거나 타들어간다고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일까요? 행여 그것은 인간성이 아닐까요!

이리 해 놓고 보니 동인들의 메시지가 온전하게 읽힙니다. 희망이 지금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찾은 동인들입니다.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거나 찾았다는 증거로 시를 썼고 시집을 냈습니다. 시와 시집의 목적은 소통입니다.

살아남은 인간이 있다면 통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바짝바짝 타들어가지 않고 메마르지 않은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있으면 아직 살아 있다고 대답하라는 주문입니다. 그러나 적막강산입니다. 그래서 이 동인들은 지금 제자리에서라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4.
뜀박질을 구경할 차례입니다. 저는 시 쓰기를 지난 해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빚을 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부채의식이 이런 글을 쓰게 만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제, 객토문학동인들이 소통을 조금이라도 더 이루도록 이리 거들기 말고는 없지 싶습니다. 6000원이면 한 권 살 수 있습니다. 하하.



하루살이
                                                                     문영규

오늘은 본의 아니게
일찍 잠자리에 든다
불을 켜 놓으면 날아드는
하루살이들 때문이다

하루살이들은 흡사 목숨 걸고
불빛을 쪼는 듯하다
모든 것 하루 만에 끝내야 하기 때문일까

사랑하고 임신하고
육아에서 교육까지
입시 지옥을 지나 대학을 마치고
취직해서 돈 벌고 출세하고
그러다가 제 짝을 얻고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아무나 붙잡고 멱살잡이를 하고
술 먹고 옥상에 올라가
달보고 짖기도 하고

KTX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더욱더 빠르지 않으면 안 되는,
눈 깜짝할 사이도 쪼개어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한 세대의 일들을
하루 만에 다 해야 하는 게 그들의 운명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인생을 재수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모멸인 것이다.




닮지 마라

                                                             배재운

용돈이 궁한 아이
광고지에 끼어있는 무료 쿠폰처럼
연필로 몇 장 그려
엄마 생일 선물로 대신했다

설거지 무료 이용권
안마 무료 이용권
빨래개비기 무료 이용권

부도날 위험이 다분한 약속어음 같은
속이 뻔히 보이는 외상 선물
그것도 사랑이라 여기며
흐뭇해하는 아내에게
오늘은 왠지 미안하다

여태껏
뭐 하나 변변하게 해준 것 없이
올해도
말로만 때워야하는
궁색한 내 모습
아이야 그건 닮지 마라



가뭄시대

                                                  이규석

쨍쨍한 신자유주의 불볕을 몰고
단비를 기다리던 농부의 마음처럼
논바닥은 말라 쩍쩍 갈라지고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신용불량에 족쇄 찬 노숙자들처럼
웅덩이 속 작은 물고기들
허연 배를 뒤집으며 파닥거리고

차별에 차별로 배배 꼬이고 꼬여
일자리에 생활까지 위태위태한 비정규직
바싹 타들어간 그 가슴 같이
벌겋게 물드는 저녁노을
내일로 갈 길목에 걸려
불길한 징조처럼 버텨 섰고

이 환장할 목마름앞에
지금 우리가 뿌리내릴 땅
먼지만 풀풀 인다



반성

                                       박만자

하늘 쳐다보기가 두렵다

풋고추 생된장에 푹푹 찍으며
식은 밥 한 덩이 찬물에 말아 먹으면서도
배만 부르면 되었는데
뭘 먹을까 고민하고

무료 급식소에서 주는 점심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몇인데
끼니 투정이라니

어느 해
봄 소풍 날
빈 도시락에 옥수수 빵 받아들고
나무아래 쪼그리고 앉아
점심을 먹었던 기억을 지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 마음은

                                                표성배

목련꽃 피니 봄인가 싶었는데
참꽃 지니
봄이 가는가 싶네

봄이라고
꽃들,
피었다 지며
제 각각 뽐내지만
쌩쌩 도는 기계 앞에
얼씬도 못하는
꽃 따위
나와 무슨 상관인가

오늘도 어제처럼
기계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하는
내 마음은 싱숭생숭

꽃 피었다
꽃 떨어졌다
지랄 같은 봄날은
화사하기만 하네



잔칫날 아침에

                                                         정은호

아내가 망설였다 다른 날도 아닌 친정집 잔칫날인데 입고 갈 옷이 없단다

살면서 눈 비 내린 적 왜 없었겠냐만 갈음옷 한 벌 없이 어딜 나설 수 있을까

땡빚을 내더라도 당장 온 한 벌 사 입어라고
여태껏 뭐하고 있었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만

화가 금세 내 마음속에 들어와 가슴이 뜨겁다



벼룩시장

                                                                  이상호

어디에 이렇게 생생한 길 있을까
어디에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길 있을까

방 한구석에 앉아
달세, 전세, 주택, 아파트를 지나
경차, 중형차, 수입차를 지나
선반공, 용접공, 조립공, 영업 등
숱한 자리들이
시름을 잊게 하는

어디에 이렇게 화끈한 길 있을까
한 장 한 장 넘기는 순간마다
희망의 길 불끈불끈 솟다가
쉽게 구겨져 버리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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