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역사의 진실은 덮어도 또 나오게 돼있다"

기록하는 사람 2008. 11. 2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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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진실화해위 김동춘 상임위원

"지금 우리는 암매장된 민간인학살 희생자의 무덤 위에 서 있다."

사회학자로서 한국현대사를 꾸준히 추적해온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어떤 글에서 했던 말이다. 그의 표현대로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는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로 암매장된 유골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희생자의 숫자는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을 헤아린다.

하지만, 흔히 나치의 유태인학살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일제의 각종 만행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대한민국 정부의 자국민에 대한 정치적 학살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희생자의 유족들마저 오랜 침묵을 강요당해왔다. 오랜 독재 치하에서 그걸 발설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 왔던 탓이다.


2005년 12월 출범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반세기가 넘도록 은폐돼온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그 피해자를 위로함으로써 국가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하기 위한 기구다.

통폐합 위기에 놓인 진실화해위원회 회의실.


현재의 기구만으로도 신청사건 처리 벅차다

진실화해위는 2010년 4월말까지로 활동시한이 정해져 있다. 지금까지 1만 1000여 건의 피해신청을 접수해 약 3000여 건을 처리했다. 하지만 신청기간이 짧았던 데다 홍보기간도 부족했고, 여전히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유족들이 신고를 기피했던 점으로 미뤄볼 때 미신고 건수가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는 출범 후 신청사건에 대한 조사와 함께 지난해부터 미신청 사건의 진상파악을 위한 피해자 전수조사, 그리고 암매장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작업도 병행해왔다.

최근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유해발굴과 김해지역 피해자조사,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함양군 민간인희생 피해자 전수조사도 그런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처럼 경남도내 20개 시·군 중 피해자 전수조사가 이뤄진 곳은 딱 2곳, 남아 있는 10여 곳의 매장 추정지 중 발굴이 이뤄진 곳도 2곳(마산 여양리 포함)에 불과하다.


문제는 현재의 진실화해위원회 인력과 예산, 조사시한으로는 남아있는 과제만 완료하기에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한나라당은 지난 20일 설상가상으로 14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통폐합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과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 등 14명이 발의한 이 법안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등 13개 위원회는 진실화해위로 통합하고,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군의문사위)는 기한도래에 따라 폐지하고 미결사건은 진실화해위로 이관토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침 신지호 의원 등이 통폐합 법안을 발의한 다음날, 진실화해위원회 출범 때부터 상임위원(차관급)으로 재임해왔고, 그 이전에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에 앞장서온 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김동춘 전 성공회대 교수(사회학)가 진주에 왔다. 진주MBC가 주최한 외공리 유해발굴 관련 토론회에 참석하고, 진주지역 유족들과 간담회를 하기 위해서였다.


21일 오후 진주MBC 빌딩에 있는 1층 커피숍에서 김동춘 상임위원을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의도대로 위원회가 통폐합되면 사실상 진실규명 활동은 기능중지 상태가 될 것"이라며 "대승적으로 보면 지금 이 문제를 풀어버리고 가는 것이 이명박 정부에도 플러스가 됐으면 됐지 손해볼 일은 아닐텐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금 털고 가는 게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에도 도움이 될 것"

-신지호 의원 등이 14개 과거사 관련 기구 통폐합 법안을 발의했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위원회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된다고 봐야 합니다. 당장 군의문사위원회만 하더라도 업무의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남아 있는 군의문사 사건 300여 건은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진행 중인 것들로, 수사에 준하는 정도의 상당이 높은 전문성이 필요한 사건이라는 거죠. 조사관도 그렇고, 위원들도 마찬가집니다. 다른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군의문사 사건만 와도 기구를 다시 세팅하고 업무를 숙지하는데 최소 6개월이 걸리는 것 등을 감안하면 시간이나 비용이 더 들게 됩니다. 북파공작원 사건도 그렇고 민주화운동 보상도 그렇고, 하나하나가 만만한 게 아닌데, 너무 편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대로 가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거죠.

-보수 정권 입장에서도 지금 깨끗하게 처리해버리는 게 역사적 부담을 덜게 될텐데 왜 그럴까요?

△맞습니다. 200억 원 정도의 굉장히 적은 돈으로 많은 국민을 달래고 화해를 이끌 수 있는데, 지금 이것을 풀지 않고 넘어가면 나중에 또 불거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해결하는 게 다음 정부에도 부담을 덜어주게 됩니다.

스페인의 경우에도 망각협정으로 덮어두자고 했다가, 최근 기억법이라는 게 제정돼 다시 조사 중입니다. 아르헨티나도 한창 진실화해작업이 진행되다가 유야무야됐으나, 이후 진보적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가해자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이처럼 미진하게 되면 언젠가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게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입니다.


진주MBC 토론회 직후. 아직 분장을 지우지 못한 상태다.


-다른 정부투자기관이나 위원회의 경우, 임원들에 대한 현 정부의 사퇴압력도 노골적으로 진행됐는데, 진실화해위는 그런 압력이 없었나요?

△진실화해위는 정부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법적 기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는 기구죠. 아마 이번 통폐압 법안도 그런 기조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이 개정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임원들을) 정리하게 되는 거죠. 현재 장관급인 위원장이나 차관급인 상임위원을 한 급씩 낮춰버려도 현 임원은 자동정리됩니다. 그 후 한나라당 성향의 임원들이 위원회를 장악하게 되면 명맥은 유지하되 기능은 상실하는 기구가 될 겁니다.

사실 통폐합하지 않아도 내년 11월이면 현 임원의 임기가 만료됩니다. 그 때가 되면 당연히 한나라당 성향의 임원과 위원으로 교체될 것이고, 그 경우에도 기능은 상실된다고 봐야 겠죠. 이미 지금도 현 정부 출범 후 관련기관들의 협조가 현저하게 소극적으로 돌아섰어요. 권고처리도 소극적이고…, 이 또한 기간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지리산 외공리 암매장터에서 발굴된 피학살 유해들.


-이런 말씀을 하시면 현 정부에서 싫어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정무직 공무원은 입장을 가진 공무원이죠. 공무원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정부 입장에서도 대승적으로보면 인권 문제를 풀고 가는 게 박수를 받을 일이지 손해볼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학자로 있다가 고위공무원 생활을 해보니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배우는 게 많습니다. 정부 조직과 운영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고, 개인연구자로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하지만 연구자로 있을 때에 비해 제 주장이나 의견을 강하게 펼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공직에선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타협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출범 때부터 쭉 상임위원으로 있었는데, 그동안의 위원회 활동을 평가해본다면?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평가에 자유롭진 않지만, 기대 이상의 자료가 꽤 나왔습니다. 특히 폐기된 줄로 알았던 경찰 자료들이 적지 않게 발굴됐습니다. 경남 김해와 울산, 서산 등의 경우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의 명단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 경찰이 50년대 이후 연좌제가 공식 폐지되던 80년대까지 계속 학살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를 계속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신청사건에 대한 조사뿐 아니라 피해자 전수조사나 유해발굴도 해온 걸로 아는데.


△작년부터 매년 일곱 군데 정도 피해자조사 용역을 해왔고, 각 지자체에 협조를 요청해 피해자 기초사실조사도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해당 공무원에게 특별한 인센티브가 없다보니 지역별 성과의 편차가 많습니다. 유해발굴도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해오고 있죠.

-유해발굴의 경우, 이미 발굴된 유해를 처리할 방안도 마땅치 않은데다, 발굴된 곳도 전체 매장 추정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 기간 내 못하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일부 몇 군데만 발굴하고 나머지를 그대로 둔다면 행정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해발굴에 대해서는 위원회 활동기간이 종료되더라도 별도로 발굴작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가칭 '유해발굴특별법'을 만들어 제기된 매장추정지에 대한 발굴작업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국회 행정안전위에서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행안부 내 권고처리단이 정부입법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안되면 국회 발의로도 꼭 제정해야 합니다.

-피해자 전수조사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이 또한 몇 몇 지역만 하고, 나머지 지역은 하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면 이것도 불가능하게 되는데, 사실은 행정기관에서 해야 합니다. 사실 4·19 이후에 한 번 했고, 함양군 같은 경우도 당시 군 차원에서 조사를 하여 경남도에 보고된 자료가 나왔는데요. 문제는 향후 5~10년 내에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이 다 사망할 정도로 늦었다는 겁니다. 그게 안타까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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