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80년대 민주화운동 비화가 공개된다

기록하는 사람 2008. 11. 1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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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진해의 6월항쟁은 진해경찰서장실에서 시작됐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 경남추진위원회(상임대표 김영식 신부)가 최근 펴낸 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자료집 <항쟁의 시대와 그 기록>(전 2권)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80년대 경남지역 민주화운동의 각종 비화(秘話)와 비사(秘事), 진귀한 사진들이 실려 있다. 예정보다 1년 정도 늦게 나온 책이지만, 책이 지닌 가치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박영주 자료편찬위원장과 발간위원 449명, 자료를 제공해준 20여 명, 증언을 해준 72명의 땀과 발자국이 묻어 있는 이 책은 격동의 시대 80년대를 민주화에 대한 열망 하나로 돌파해온 경남사람들의 역사다.

이 책은 17일 저녁 7시 30분 천주교 마산교구청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서 공식 배포된다. 이 책을 통해 밝혀진 재미있는 비화와 비사를 소개한다.

87년 7월 11일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서 열린 시국대토론회를 봉쇄한 전경들.


◇경찰서장실에서 시작된 시위?
 
6월항쟁의 절정은 6·10대회였다. 경남의 6·10대회는 사전 모의에 따라 마산에 집중됐지만, 진주와 거창에서도 소규모 집회가 열렸다.

하지만, 마산과 가까운 진해에서, 그것도 마산집회 예정시간(오후 6시)보다 훨씬 이른 오전에 진해에서 6·10대회 시가행진이 열렸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또한 시위의 중심인물이 됐던 진해 여좌성당 허성학 신부는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경남본부(경남국본)'의 상임위원으로, 그날 오후에 마산에서 열릴 집회를 주도하기로 예정돼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진해에서 예정에 없던 집회가, 그것도 진해경찰서장실에서 시작됐던 것일까?

그것은 허성학 신부를 감시하던 진해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그날 아침 여좌동 성당의 사제관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 데서 비롯됐다.

"6월 10일 날 아침에 내가 약간 늦잠을 잤는데, 주방에서 인터폰이 왔는데, 경찰들이 와서 나를 찾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안에서 잠을 자는지, 모르겠다고 하라고 그러고 침실로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주방 사람이 침실로 식사를 가져다줘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침실 문이 왈칵 열려요.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까 형사들인 겁니다.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형사들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나도 당황하고 자기들도 당황했어요. 내가 벌떡 일어서서 그만 안두겠다고 잡으러 나가니까, 자기들은 피해서 달아나고, 나는 잡을 거라고 맨발로 뛰어나갔어요."

이 때부터 맨발의 신부와 형사들의 추격전이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래, 동네사람들한테, 저 형사가 성당에 도둑질하러 들어와서 남의 문 열다가 쫓겨서 도망간다고 소리 질렀죠. (…) 한 8시나 됐을 겁니다. 그래 나는 9시에 미사를 해야 되는데, 나는 도저히 미사 못 가겠다, 신부 혼자 있는 독신자 숙소에 경찰이 그런 식으로 침범하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미사 하겠나? 내가 경찰서장실에 가서 드러누울 테니까, 당신들은 당신들 알아서 기도나 하고 그냥 있어라, 그러고는 경찰서로 갔어요. 그랬더니 성당 할머니들이, 우리 신부님 내 놔라! 하면서, 내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간 줄 알고, 구속된 줄 알고, 경찰서에 막 들어왔어요."

그날 정보과 형사들은 허성학 신부가 마산 6·10대회에 참석하는 걸 저지하기 위한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차고에 허 신부의 차가 보이지 않자 이미 마산으로 넘어간 줄 알고 확인차 사제관 침실 문을 열어본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항의하기 위해 찾아간 진해경찰서장실에 서장은 없었다. 서장 역시 마산 집회를 막기 위해 투입돼 있었던 것이다. 비어있던 경찰서장실은 허성학 신부와 성당 할머니들이 점거한 셈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서장실에 앉아 "침입자를 불러 사죄를 시켜라. 서장님도 오라"고 항의를 했다. 그러면서 허 신부는 경찰서장실에 앉아 진해 시위를 지휘(?)하게 된다.

"그 다음에, 내가 다른 신자들한테 연락을 해서 성당에서 피켓을 만들어 오라고 했어요. 그냥 가지고 오면 들킬테니까, 긴 몽둥이 몇 개 하고, 각목 몇 개 들고, 종이에다가 '4·13 호헌철폐'라고 써가지고는 종이는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종이를 붙일 판자는 딴 사람이 별도로 들고 오고…, 개인적으로 여럿이 들고 와서 경찰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챈 거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종이는 판자에 테이프로 붙이고, 못질만 하나 탕탕 하면 그냥 바로 피켓이 되니까…, 그래서 이에, 우리는 간다! 하면서, 한 40~50명이 진해경찰서에서 여좌성당으로 가면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겁니다. 호헌 철폐하라! 4·13호헌 철폐해라! 박종철을 살려내라!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성당으로 가면서 40~50여 명이 구호를 외치니까 자연적으로 길거리 시위가 돼버렸던 거죠."

예정에 없던 6·10 진해 시위는 이렇게 된 것이었다. 허 신부는 이렇게 오전 진해시위를 마친 후, 점심시간에 경찰을 따돌리고 마산에 도착, 그날 오후 3·15의거탑 앞의 마산집회를 주도하다 경찰에 연행됐다.

경남대에 정보수집차 들어갔다가 학생들에게 발각돼 불타고 있는 안기부 직원의 승용차.


◇경찰이 깡패들에게 얻어맞은 사연
 
6·10대회 이후 최대시위였던 6·26 대행진 날 밤, 백골단이라 불리던 경찰 체포조가 북마산의 깡패(?)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는 수모를 겪었다. 경찰로선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추억일테지만, 역시 허성학 신부의 증언에 의해 공개되고 말았다.

"그날 저녁에 9시쯤 됐는데, 태양극장 근처에 포장마차가 있었어요. 그날 우리 데모 요원들이 육호광장 옆에서 하다가 쫓겨서, 북마산파출소든가, 그쪽 근처에 있다가 쫓기니까 포장마차로 들어간 겁니다. 백골단들이 포장마차에 도망간 사람들을 잡으려고 왔는데, 거기 술 먹고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 지역에 사는, 깡패라고 하면 좀 뭐하지만…, 백골단들이 뭘 모르고 그 사람들을 두들겨 패니까,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사람들입니까? 백골단들이 혼이 나서 쫓겨서 도망가고, 우리 사람들은 포장마차 이쪽으로 들어갔다가 저쪽으로 나가버렸죠. 그래, 술 먹은 사람을 두들겨 팼으니, 가만히 있겠습니까? 백골단들이 지역 깡패들한테 실컷 두들겨 맞은 겁니다. 그 꼴을 우리는 멀리서 쳐다보고 막 웃고 있었죠."
 
◇동경유학생이던 배대화 교수, 야쿠자로 오인?
 

마산 양덕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우는 시민들.

현재 경남대 교수가 돼 있는 배대화씨는 6월항쟁 당시 동경대 유학생이었다.

당시 유학생들 중에는 현 국회의원인 강창일씨 등도 있었는데, 유학생 모임에서 고국의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삭발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전날 머리를 깎았지만, 이 결정을 전해듣고 다시 삭발을 했다.


"그 당시 일본사회는 머리를 그렇게 밀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조폭 조직원, 일본말로 야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죠(웃음). 그런데 갑자기 머리를 빡빡 민 한국 유학생들이 하나 둘, 서너 사람, 점점 더 많아지니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왜 한국 유학생들이 갑자기 저렇게 머리를 밀고 다니는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유학생 배대화씨는 지도교수로부터 "그렇게 머리를 깎는 것은 일본에서는 야쿠자나 하는 짓"이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받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죄수 선생과 죄수 제자, 죄수 타이피스트의 조우
 
지금은 정년퇴직한 김용택 교사. 그는 전교조 사태로 해직된 후 1990년 구속돼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뜻밖의 제자들과 조우한 기막힌 경험을 털어놨다.

"도교육청에 들어가서 농성투쟁을 벌이다가 저와 이영주, 안종복, 이인식 선생님과 함께 구속되었는데, 마산교도소에 미결수로 갇혀 있으면서 검취(검사 취조)를 받는다고 수갑을 차고 검사실에 들어갔습니다. 당시에 심문하던 사람이 김용진 검사였는데, 그 검사실에는 마산여상 졸업생이 타자수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제가 들어서자 알아보고, 선생님! 하고 깜짝 놀라는 겁니다. 그래 자세히 보니까 제가 수업에 들어갔던 반의 졸업생이었어요. 더 놀라운 것은 어떤 여자가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차고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그 친구도 나를 보자말자 선생님! 하면서 눈물이 글썽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제자는 노조 운동하다가 집을 압수수색 당했는데 미제침략사란 책이 나와서 잡혀 온 거예요."

기구한 상황이지만, 제자 덕분에 수갑을 푼 채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고 김용택 선생은 회고했다.

"참으로 황당한 상황이었죠. 죄수 선생에, 죄수 제자에, 타이피스트 제자가 한 자리에 만났으니까요. 그러니까 타이피스트 하는 그 제자가 울면서, 검사에게 수갑을 풀어주면 안되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검사가, 오늘 참 재밌게 됐네, 사제지간에 취조 한 번 받아보자, 이러면서 능글맞은 웃음을 짓던 그 검사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고 박종철 군 추도회 및 규탄대회(2월 7일 마산 가톨릭여성회관).


◇김영만 선생이 파렴치범으로 몰릴 뻔 했던 사연

 
김영만 전 열린사회희망연대 대표는 1982년 마산수출자유지역 여성노동자들의 독서모임인 '초록회'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연행됐다. 당시 안기부는 김영만 선생을 여자관계가 복잡한 민주인사로 조작하려 했다. 민주화운동 진영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기 위한 의도로 보였다.

"사진을 좍 보여주는데 보니까 초록회 회원 애들인겁니다. 그 사진을 펼쳐놓고 한다는 말이, 이 새끼야! 여기 누구하고 몇 번 했어? 딱 첫 마디가 그 말인 겁니다. 그래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 당시에 민주화 운동이나 그런 걸 한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여자관계를 추적해서 사진을 찍고, 그런 얘기가 있었거든요."

자칫 파렴치한 누명을 덮어쓸 뻔 했던 그는 어떻게 상황을 모면했을까?

"아무 소리 안하고 윗옷을 벗고 내 등을 보여줬어요. 예전에 척추 수술을 한 흉터가 흉측하게 나 있었죠. 그 때는 척추 수술을 하면 성블능자가 된다는 얘기가 있을 때고, 실지로 그 때 부분적인 마비로 완전한 몸 상태는 아니었죠. 내 등을 보더니 더 이상 그 문제는 추궁을 안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하고 같이 잡혀갔던 그 친구는 그 때부터 개 맞듯이 맞았어요. 빠져나갈 길이 없으니까요."
 

이들 비화 외에도 자료집 1권에는 모두 72명이 겪은 80년대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또 2권에는 어렵게 수집한 당시의 각종 사진과 유인물·소식지, 취재기자의 메모, 신문기사 자료 등과 함께 지난해 <경남도민일보>가 26회에 걸쳐 보도한 기획기사와 경남의 6월항쟁에 대한 논문 및 발제문이 실려있다.

하나같이 80년대 경남의 현대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텍스트가 될만한 기록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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