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주완

일흔 여섯 할아버지가 낸 첫 시집

기록하는 사람 2008. 10. 1.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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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흔 여섯 되신 한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분이 얼마 전 첫 시집을 내셨습니다. 제목은 할아버지가 낸 시집답게(?) 『해질녘의 사색』(도서출판 경남)입니다.

시집이 나온 지 얼마 안돼 그 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주완아, 알다시피 내가 차도 없고 해서 그러는데, 누구 이 근처에 있는 기자더러 나에게 좀 다녀가라 하면 안 되겠나. 내가 뭘 보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렇게 해서 후배를 통해 전해받은 책이 이 시집이었습니다.

그 땐 솔직히 책을 받았지만, 표지와 목차만 슥~ 훑어본 후 "어르신이 참 대단하셔..."라고 생각하곤 그냥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저희 신문에 난 어르신의 성함을 보고 이 시집이 떠올랐습니다. 어르신은 이순항(李順恒)이며, 현재 경남불교신도회 회장입니다. 불교계를 훈계하는 창원중부경찰서장의 기고문이 논란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경남불교신도회장으로 계시는 이순항 어른도 경찰서 항의방문을 하는 자리에 함께 계셨던 모양입니다.

다시 열어본 시집은 제목에 걸맞게 반성, 참회, 후회와 같은 자기성찰과 사람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곧 맞이해야 할 저승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같은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시(詩)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박노해와 김남주 등 몇몇의 시를 빼고는 그냥 말장난 내지는 자아도취로만 생각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순항 어른의 시들을 읽으면서도 마치 박노해의 노동시처럼 마음의 흐름이 막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온 인생을 정산하는 시도 그렇습니다. "전문회계사에게 맡길까"라는 대목이 압권입니다.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서툰 정산精算

아름답다란 말은 참 아름답다
24시간 아름다움 속에서
아름다운 생각으로
아름다운 말로
아름다운 행동으로
아름답게만 살고 싶은데

시샘하고
열등하고
질투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온갖 걱정일랑 다 안고

여생餘生이란 의미를 알자
공수래空手來에서 공수거空手去로 옮기는 준비시간
뭘 성내고
뭘 괘씸히 여기고
뭘 언짢아 하고
뭘 섭섭히 여기고
뭘 못마땅해 하고

기껏 칠십 평생
그것 가져가려고
바둥바둥 살아왔나
허송세월이지
암 허송세월이지

왜 남는 것이 없나
왜 가져갈 것이 없나
정산精算이 서툴러서인가
전문회계사에게 맡길까
그러다가 밑바닥까지 뒤집히면
더 을씨년스러워라
(후략)

저승에 가서 만날 옥황상제에게 무엇을 보고드려야 할 지 걱정하는 시도 있습니다.

순종順從

옥황상제께서 부르실 때
표연히 떠날 수 있는
이승의 준비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인생칠십人生七十
조상님, 부모님
인연 있는 모든 사람
감사가 앞서야지
행여 울음 터질라

적명의 즐거움일랑
수행, 고행 다 겪은
수도인의 몫인 것
왠 탓에 부러워하지
70선線 정산精算이
가난, 무절제, 허욕, 게으름,
미움, 성냄, 의심, 예민,
위선, 격노, 천격賤格, 의존,
흉내, 무지, 이기利己,
기록란이 비좁도록 이것들이니

옥황상제께 무엇을 보고 드리랴
차라리 벌받을 각오 단단히
이승의 이별연습에 열심히
한恨의 핑계 울음 같은 것
싹 지워
순명順明하는 것이 순항順恒이 아닌가


마지막 구절에서 '순명'은 어른의 젊을 적 이름이고, '순항'은 현재의 이름입니다. 어른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게 왠지 죄송스럽긴 하지만 소년처럼 순수한 노인의 생각을 엿보며 쓸쓸하면서도 달콤한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더 소개하고픈 시가 많지만 이런 식으로 자꾸 시만 인용하다 보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네요. 이제 마무리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렇게 시집을 내놓고도 시인은 극구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고 우깁니다. 그러면서 이 시집도 "지금 마른 장마에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니 잠시 우스개로 삼으소서"라고 당부합니다.

책머리에 쓴 글의 제목은 "먼저 드리는 말씀"입니다.

"시 읽기를 좋아하고 시가 아름다워 시를 쓰고자 내 소리를 한 소절 한 소절 시의 형식을 빌려 흉내 내 보았다. 시인의 신비스런 시작詩作이 그리워 내 학습의 산물을 한데 모아 시집詩集이라는 이름을 짓기로 했다. 내가 시인이 아닌 줄 아는 가까운 분들과 또 나 혼자서 존경하는 분들께 심심파적深深破寂거리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미련을 부려 보았다. 지금 마른장마에 찌는듯한 더위가 계속되니 잠시 우스개로 삼으소서."


과연 그 분의 말씀대로 '가까운 분들과 나 혼자서 아는 분'들께만 드리기 위해서인지 뒷표지에는 "300부 한정판"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저희들이 1999년 무모하게도 시민주를 모아 일간지를 창간하겠다고 덤벼들었을 때 처음부터 함께 해주셨고, 창간 후 저희의 강권에 의해 초대사장을 지내셨으며, 경영진과 노동조합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을 때도 끝까지 노동조합과 젊은 기자들 편에 서 주셨던, 그 후 은퇴하고 이렇게 시인으로 데뷔하신 존경하는 선배기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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