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횡묵이 함안군수로 있었던 기간은 3년 10개월 남짓이다. 1889년 4월 21일 자인에서 들어와 1893년 2월 27일 고성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오횡묵은 지역사회의 여러 폐단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멋대로 설치며 횡포를 부리는 일부 양반부터 먼저 때려잡았다. 아전과 결탁하여 백성들 등쳐먹고 군수를 능멸하는 적폐 중의 적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빼돌리거나 떼어먹어 엄청나게 밀려 있던 조세도 한 해만에 별 탈 없이 정리했다. 아전·장교와 관노·사령들도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제대로 다잡았다.
근본인 농사를 위해서도 잘되도록 돌보느라 크게 애썼다. 들판에 나가 보이는대로 돈과 담배(남)와 바늘(여)을 나누어주면서 열심히 일하라고 타일렀다. 농사철을 앞두고는 제방 쌓는 공사를 몸소 감독하였다. 몹시 가물 때는 잇달아 열다섯 차례 기우제를 지내는 정성까지 바쳤다.
설 같은 명절이나 청명 같은 절기에는 관아 일꾼들에게 철에 맞는 음식을 주었으며 형벌을 앞둔 죄인들에게도 차별 없이 먹을거리를 나누었다. 장터까지 일부러 돌아다니면서 춥고 배고픈 할멈을 찾아 돈을 주었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활쏘기 시합장과 향교나 서당에서 베푼 적이 많았다.
여론을 주도하는 양반들을 위한 노력도 적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한데 어울렸고 저마다 문장을 뽐낼 수 있는 시회는 물론 실력을 겨루는 시험도 적지 않게 치렀다. 자신의 봉급을 헐어서 상품을 장만하였고 그이들이 선물을 가져오면 그 선물을 밑천삼아 다시 잔치를 열기도 했다.
1만 명 이름이 아로새겨진 만인산
덕분에 오횡묵은 지역사회에서 사랑과 존경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바친 만인산(萬人傘)이 대표적이다. 비단으로 일산(日傘)을 만든 다음 한가운데부터 가장자리까지 고을 사람들 이름을 수놓아 새긴 물건이 만인산이다. 만 사람이 물심양면으로 함께 만들었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선정을 베푼 수령에게 바치는 백성들의 선물이었다.
1890년 6월 3일, 부임한 지 1년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점심 때가 지난 미시(未時) 무렵 함안 관아는 밀려드는 백성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수교(首校=우두머리 장교)가 문밖에서 돌려보내려고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관박대(鴉冠博帶) 연사우립(煙簑雨笠) 남녀노소 수천 명이 문과 마당을 가득 채웠다. 수교가 손을 휘둘러 무어라 말하였으나 밀고 들어왔다. 조금 뒤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정당(政堂=동헌)을 향하여 두 손을 맞잡고 섰다.” 아관박대는 양반들, 연사우립은 농민들의 차림새로 여기면 적당하다.
“저잣거리 장사꾼은 실을 바쳤고, 시골 아낙네는 바느질하는 품을 내었으며, 대장장이는 장대를 만들고, 문사(文士)는 이름을 적어서 하루도 안 되어 이루어졌으니 바로 이 수산(繡傘)입니다. 원님께 바치니 사양하지 마소서.” 수산은 만인산을 달리 이른 것인데 수를 놓아 새긴 일산이라는 뜻이다.
오횡묵은 이미 정선에서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 만인산을 받는 영예가 자칫 잘못 지나치면 질곡이 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횡묵은 받기를 거절하였다. “지나친 아름다움과 헛된 명예는 사람들이 다같이 미워하는 것이오. 내게 허물을 더하지 말아주시오.”
그렇지만 물러날 백성들이 아니었다. 도중에 그만둘 것 같으면 애초 시작을 하지 않았다. 먼저 여태껏 베풀었던 오횡묵의 선정을 죽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이런 연유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감화하여 자기 이름을 수놓아 드리는 것인데, 무엇이 미심쩍어 받아들이지 않으시냐 다그쳤다.
그렇지만 오횡묵은 밀당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일이 뒷날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수령은 물론 백성들도 끝까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다 함께 힘쓰자는 취지로 말하고 백성들이 장만한 만인산을 받아들였다.
고을 인사들의 성명과 함께 ‘청백엄명혜휼은애 통정대부 행함안군수 겸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 오공횡묵 만인산 경인 유월 일 정통인화(淸白嚴明惠恤恩愛 通政大夫 行咸安郡守 兼 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 吳公宖默 萬人傘 庚寅 六月 日 政通人和)’가 수놓여 있었다. 앞쪽 여덟 글자=청백엄명혜휼은애가 좋은 수령의 조건이라면, 마지막 네 글자=정통인화는 ‘정사가 잘 펴지고 사람들이 화합한다’는 뜻으로 그 결과인 셈이다.
만인산 선물에 담긴 뜻은
만인산을 받으면 수령은 명예가 높아진다. 상급자인 관찰사나 임금도 알아준다. 그러면 바치는 백성에게 만인산은 무엇이었을까?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우리는 당신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요청이었다. “당신이 가신 자리에 성질 고약하고 욕심 많은 사람이 오면 우리는 죽습니다” 하는 공포이기도 했다.
지역 양반들이 대구감영에 올린 글에 그와 같은 심정이 담겨 있었다. “동쪽집에서 약을 쓰던 병이 아직 완치되지 않았는데 의원을 서쪽집으로 옮긴다면 전날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은 다시 위태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이미 시약(試藥)한 고질(痼疾)의 치료를 힘 있는 집에 뺏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1890. 6. 12.)
두 달 뒤인 8월 4일 서울 본가를 향해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오횡묵이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수산으로 일제히 칭송함에 백성들의 뜻을 볼 수 있다. 질병에 침뜸이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음식이라. 유임을 바라는 것이 마땅하니 반드시 임금께 올리겠다.” 그들은 이렇게 감영에 진정을 해서 받은 판결문을 오횡묵이 길을 떠날 때 내밀었다.
그 때문인지 이틀 뒤 오횡묵은 대구감영에서 순찰사한테 “서울 가는 휴가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京往次 請由不得).”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음날 길을 나서 9일 오각(午刻)에 함안 관아로 돌아왔더니 “뜻밖이라서 관속들이 허둥거리고 분주한 것이 곱절은 요란하였다.” 우두머리가 없으면 늘어지는 것은 예나 이제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이듬해는 5월 2일 서울행에 나섰다. 임기 만료는 중추(仲秋=8월)에 있었다. “번거로운 장부·회계와 시끄러운 공사간은 이참에 마감하고 각 면마다 단단히 타일러 시킨 일들도 조목조목 단속한” 다음이었다. 그렇지만 한 해 전보다 더 많은 인원이 나서서 남아 달라고 사정했다.
이수정에서는 삼반관속과 조씨 수십 명이 따로 길을 막았고 사거리에서는 통인들이, 부촌(富村)에서는 좌수와 공형 등 십수 명이 시간차를 두고 잇따라 나왔다. “40리 사이에 읍민들이 다섯 곳으로 나왔다. 나는 다시 관아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다투듯이 하니 마음에 매우 가련하였다.”
그들은 7월 15일에는 서울에까지 와서 문장을 올렸다. 이조와 병조는 따지지 않은 채 물렸지만 영의정은 판단을 내려주었다. “수령의 치적을 들으니 기쁘고 다행이다. 아직 갈리지 않았고, 멀리서 이렇게 호소를 하니 가기를 아쉬워하는 여러 사람의 뜻을 잘 알겠노라.”
결정권은 임금에게 있었다. 오횡묵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함안은 홍수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갈려고 했으나 재세(灾歲)에는 잘못 다스리는 수령만 체직을 허락할 수 있다. 가을농사가 크니 오래 비우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1891. 10. 18.) 이에 오횡묵은 바꾸어 주십사 하고 엎드려 빌었지만 임금은 꼼짝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오횡묵은 1893년까지 함안에 더 있게 되었다.
선정비는 헤어지는 아쉬움을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오횡묵도 함안을 떠날 때가 되었다. 처음 임기를 채운 데 이어 두 번째 임기까지 마저 채웠던 것이다. 1893년 2월 3일 고성부사로 옮기라는 발령을 받았다. 백성들도 이제는 더이상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인산을 바치는 대신 선정비를 만들어 세웠다. 만인산은 머물러 달라는 뜻이었고 선정비는 아쉽지만 잘 가시라는 뜻이었다. 22일 자이선에 올랐다가 저물어 내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이미 비석을 세웠다고 했다. 대중들의 뜻을 막기 어려워 다만 맡겨 두었으나 끝내 마음에 겸연쩍은 바가 있었다.”
‘군수 오후 횡묵 청덕선정비(郡守吳侯宖默淸德善政碑).’
‘후를 기다렸는데 늦게 오셨네(徯侯來暮)/ 우리 백성들을 풍족하게 하셨네(其蘊我民)/ 봉록을 덜어서 관아를 수리하셨고(捐廩修廨)/ 재해를 맞아서 돈을 나누셨네(節灾分緡)/ 선비를 좋아하여 수고롭지만 글을 쓰셨으며(好士劬書)/ 노인을 받들고 가난을 구휼하셨네(養老恤貧)/ 만인산에 이어 넉넉하게 칭송하노니(繼傘餘頌)/ 빗돌도 다듬어 세워졌구나(又礱貞珉).’
함성중학교 진입로에 다른 빗돌 여섯 기와 함께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인데 세운 때가 “신묘(辛卯=1891년) 2월”이어서 실제보다 2년이 앞선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태 전에 이미 한바탕 소동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신묘년에 지역 양반들이 비석 세우는 의논을 하여 이미 모양을 이루었다. 내가 듣고는 절대 못하게 하여 드디어 잠잠해졌다.”(1893. 2. 22.)
다른 선정비는 주인이 누구일까? 왼쪽부터 차례대로 정주묵(鄭周黙)과 한규직(韓圭稷)이고 그 다음 오횡묵에 이어 이병익(李秉翊)·김영규(金永珪), 마지막에 김명진(金明鎭)이다. 앞에 두 선정비는 오횡묵이 부임 초기인 1889년 4월 27일에 살펴보고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한 선배들이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둘은 오횡묵 이후에 군수를 맡은 후배들이다.
맨 오른쪽 김명진은 한 번 눈여겨 살펴볼 만한 인물이다. 오횡묵과 비슷한 시기에 경상도순찰사였다. 오횡묵의 직속 상관인 셈인데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1890년 6월 11일 새벽 김명진은 감영에서 갑자기 죽었다. 오횡묵은 29일 발인을 맞아서 시를 지어 “저를 위한 울음이 공을 위한 울음보다 갑절로 슬픕니다(哭私尤倍哭公悲)”라고 할 정도였다. 김명진은 훌륭한 목민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선정비가 충청도와 경상도에 20개 안팎으로 전국 최고 수준일 정도다.
오횡묵이 찾은 마지막 함안 명승
<함안총쇄록>을 보면 오횡묵이 다른 업무 없이 본인을 위하여 찾은 명승은 와룡정이 거의 유일하다(1890. 3. 8.). 별천계곡도 찾았지만 여러 양반과 함께하여 시문을 지었으니 업무 성격이 강하다. 악양루도 올랐으나 공무를 띠고 가다 짬을 내어 들렀을 뿐이다. 그만큼 공무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런 오횡묵도 전근 발령을 받고나서는 여유를 부렸다. 2월 23일 “봄비가 잠시 개이고 날씨가 화창하여 석성(=지인 김인길)과 함께 내동(內洞)에 달려갔다.” 내동은 지금 여항면 내곡마을이다. “광려(匡廬)가 남쪽 10리 가까운 데 있는데도 공무에 시달리고 여가가 없어서 놀며 즐기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잠깐 머문 다음 늙은이와 젊은이 대여섯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여산재(廬山齋)에 이르니 주인 선비 이욱(李旭) 형제가 쫓아나와 서로 이야기하며 조금 쉬었다. 마을에서 활 몇 바탕 거리인데 지경은 깊숙하고 형세가 막혀 시내와 산에 그윽하고 고요한 정취가 있었다.”
목적지는 여산폭포였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구불구불 굽어지고 비스듬히 꺾어져 상당히 걷기 어려웠다. 활 한 바탕 정도 가니 물이 돌머리에서 곧바로 떨어진다. 일고여덟 자는 될 성 싶은데 여산폭포라 한다. 잠깐 서성거렸더니 해가 이미 서녘이었다. 아래로 옮겨 재실 앞 반석에 잠시 앉아 술과 안주를 먹었다.”
기록을 따라 찾아가 보았더니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여산재는 6·25전쟁으로 불타고 대신 추본재(推本齋)가 있었다. 마을과 조금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살짝 돌아앉은 덕분에 그윽하고 고요한 느낌이 가득했다. 골짜기 따라 활 한 바탕 정도=100m 안팎에 여산폭포가 있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높이가 2m 남짓인데 늦가을이라 줄어든 탓인지 물은 돌머리 아닌 어깨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옛날 선비들이 좋아할 만한 모양새였다. 양쪽 비탈이 가파르지도 평평하지도 않아서 시야는 적당하게 열려 있었다. 바닥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멋스럽고 깨끗했다. 냄돌아 흐르는 여울도 깊지가 않았다. 여름이면 물에 들어가 탁족(濯足)을 즐기거나 봄이면 오횡묵처럼 가장자리에 머물면서 바라보기에도 좋았다.
<함안총쇄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산폭포 맞은편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새긴 크고 작은 글자가 남아 있었다. ‘폭포(瀑布)·여산 주인 이○신(廬山 主人 李○新)·이용탁(李用鐸)·진사 안몽백(進士 安夢伯)·박준○(朴俊○)·조○(趙○)·조낙규(曺洛奎)·허규(許煃)·○구하(○究夏)’ 등이었다.
글자가 새겨진 바위는 두 개 더 있었다. 폭포 아래 50m 즈음 왼편에는 ‘이양선(李養善)·금탄(琴灘)·허규(許煃)’가 새겨진 바위가 있고 다시 그 아래 30m 정도 오른쪽 바위에는 ‘이용우(李容友)’가 새겨져 있다. 두 바위는 모두 물에 잠겨 있지 않았다. 지금은 메말랐지만 여름철 물이 좋으면 여울(灘)을 이루기도 하나 보다.
떠나는 원님을 위해서도 군악 의장을
오횡묵의 함안을 떠나는 모습은 어땠을까. 1893년 2월 26일로 끝나는 <함안총쇄록>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오횡묵이 함안을 떠난 2월 27일의 정경은 그가 고성부사로 부임해서 적어내려간 <고성총쇄록>에 담겨 있다.
“길에 올라서 남문을 나오니 고을 관속들이 깃발을 펼치고 군악(軍樂)을 베풀며 5리 여정을 전송하였다. 보내게 되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뜻을 특별히 표현한 것인데 대개 전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부임할 때나 하는 의장 행진을 오횡묵을 위해서는 이임길에도 펼쳤다는 얘기다.
오횡묵이 미리 사절을 하였음에도 그 날도 아쉬워하는 걸음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아고 줄곧 이어졌다. 양반들은 광가리(廣加里)에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전별하였고, 아전들은 진해현(=지금 창원시 진동면)까지 와서 있다가 작별 인사를 올렸다. 오횡묵 군수의 4년 가까운 노고에 대해 함안 백성들은 이렇게 답례를 올렸다. <끝>
김훤주
## 2020년에 펴낸 책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도서출판 피플파워)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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