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32년 지역 일간지 기자의 지역신문 제작기

기록하는 사람 2022. 12. 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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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남도민일보>에서 퇴직했다는 소문을 듣고 <신문과 방송>에서 원고청탁이 왔다. '32년 지역 일간지 기자의 지역신문 제작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지난 세월을 정리도 할 겸 원고를 썼고 <신문과 방송> 2022년 3월호에 실렸다.

 

1990년 3월 지역신문 기자를 시작해 2021년 12월 말 퇴직했으니 꼬박 32년을 기자로 살았다. 마지막 12년은 편집국장, 출판미디어국장, 전무이사였다. 정년까지 3년이 남았으나 앞당겨 퇴직한 건 ‘전무’라는 경영진의 책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퇴직 후에도 내 정체성은 ‘기자’이고 싶다. 지금도 카카오 브런치와 티스토리에 글을 쓰고, 유튜브에 영상도 올린다. 지역 방송국과 다큐멘터리 작업도 함께하고 있다. 책도 쓸 예정이다.​

원고 청탁을 받고 잠시 사양할까 고민했다. 섹션명이 취재기·제작기인데, 뭐 대단한 특종을 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취재 영역을 개척했거나 보도 양식을 개발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쓰기로 했다.

나는 현업 시절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산지니, 2012)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전자는 지역신문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낸 책이고, 후자는 편집국장을 맡은 후 그런 문제를 고쳐나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이제 퇴직도 했으니 ‘지역신문 기자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한 번쯤 정리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나만큼 행복하게 기자 노릇을 해온 이는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행복이 오롯이 내 판단과 노력 덕분만은 아니었다. 많은 분의 영향과 도움을 받았고, 때로는 행운도 따랐다.

‘가오’보다는 기자로서의 ‘떳떳함’으로

첫 번째 다행스러운 일은 기자 초년 시절 내 삶의 사표(師表)가 되는 분을 만났다는 것이다. 경남 진주의 김장하 선생이다. 그는 한약업으로 큰돈을 벌었으나 ‘아픈 사람들에게 번 돈으로 내가 호의호식할 수 없다’며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 장학금을 주고, 시민사회와 문화단체를 키웠으며, 100억여 원을 들여 설립한 진주 명신고를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한 분이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런 분이 평생 자가용 승용차 없이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지역신문 기자들은 기동력을 명분으로 너도나도 차를 사는 분위기였다. 내근에서 외근으로 발령 나면 차부터 사는 걸 당연시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땐 기동력보다 ‘가오’ 때문이었다. 당시 기자 월급으로 차를 모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 시절 만연했던 촌지를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

나는 처음부터 사회부 기자로 시작했으나 끝까지 차를 사지 않았다. ‘나는 부자가 아니어서 김장하 선생처럼 돈으로 사람들을 도울 순 없지만, 적어도 떳떳하지 못한 돈을 받진 않겠다’라는 결심으로 더 당당한 가오를 가질 수 있었다.

​한 분야쯤은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두 번째 다행스러운 일은 내가 깊이 취재해보고 싶은 특정 분야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필독서이던 시절 대학을 다녔다. 덕분에 근현대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자가 된 후에도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1997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 국민에게 대중적으로 알린 계기가 됐던 <‘훈’ 할머니 혈육 찾았다> 특종(한국기자협회 제84회 이달의 기자상, 한국신문방송인클럽 1998 언론대상)도 그래서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후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밝히는 기획취재를 계속해 중국 동북 3성에서 피해 할머니 7명을 찾아 국내에 알렸다. 그분들 중 대다수는 국적 회복 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9년부터 경남도민일보에 100회에 걸쳐 연재한 <지역사 다시 읽기> 시리즈를 통해 청산하지 못한 친일 문제, 기득권 세력의 실체, 민간인 학살의 진실 등을 밝혀내고 해방 후 사회운동의 역사를 재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이 취재를 통해 1960년 3·15마산의거와 4·11항쟁 당시 시위 군중 진압과 체포, 고문, 시신 유기, 용공 조작 등에 가담했던 인물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친일파 출신이라는 게 드러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상당수 독립운동가는 용공 혐의로 수감 중이거나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돼 국가의 관리·감시를 받던 중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취재 과정에서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된 학살 희생자들은 늦게나마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을 수 있었고,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용공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던 분들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런 작업은 《토호세력의 뿌리》(불휘, 2005)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김주완이 쓰거나 제작에 참여한 책


​취재가 계속되면서 역사 기록물 수집과 활용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픈 욕심이 생겨 대학원 기록관리학 석사과정에 들어갔고, 때마침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관련, 여러 건의 조사 용역에 연구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지역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취재·보도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 결과물은 《80년대 경남 독재와 맞선 사람들》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편집국장 4년을 마치고 출판미디어국장을 맡았을 때는 민간인 학살 유족회와 협력해 창원유족회 증언자료집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진주유족회 증언록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경남유족회 증언집 《70년 만의 증언》 등을 펴냈다.

​우리가 이런 책을 꾸준히 펴내자 시민사회의 출간 의뢰도 들어왔다. 열린사회희망연대 20주년 백서 《친일 친독재가 활개치는 나라》, 《행동하는 시민 아름다운 세상》 1·2권이 우리 출판사에서 나왔고, 경남지역 1세대 시민운동가의 삶을 기록한 경남공익활동지원센터의 《인향만리》도 나왔다.

후배들에게 전한 기자 인생의 행복

​나는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에서 ‘지역신문 기자 수칙’ 중 하나로 이런 말을 썼다.

“기자는 모든 분야에 대해 조금씩은 알아야 하고,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말처럼 내가 역사 분야를 깊이 파고들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그날그날 일회성으로 소비되고 마는 기사만 쓰면서 살아왔다면 과연 기자 인생은 행복했을까? 행복은커녕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월급쟁이 기자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편집국장을 맡은 후 후배들에게도 이런 행복을 경험케 해주고 싶었다. 2011년 ‘민중의 힘’을 뜻하는 월간 《피플파워》를 창간하고 ‘도서출판 피플파워’를 등록한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기자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콘텐츠로 가치가 살아있는 긴 호흡의 글을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잡지에 연재된 글들을 책으로 엮었다. 우선 내가 경남 주요 인물의 삶을 스토리텔링해 《열두 명의 고집 인생》을 썼고, 권영란 기자가 경남 20개 전통시장을 스토리텔링한 《시장으로 여행가자》를 썼다.

책으로 출간된 경남의 재발견


2012년에는 한창기(1936~1997)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의 기획으로 출간된 명저 《한국의 발견》(1983) 경남 편의 30년 뒤 버전을 우리가 만들자고 결심했다. 후배 기자에게 그 책을 정독케 한 후 1년 기획으로 <경남의 재발견> 연재를 시작했다. ‘발품으로 찾아낸 역사·문화·관광 인문지리지’라는 부제가 붙은 《경남의 재발견》이 그렇게 나왔다. 이른바 ‘공익콘텐츠 발굴 기획’의 시작이었다. 이는 경남 먹거리 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 경남의 19가지 자산을 스토리텔링한 <한국 속 경남> 등으로 이어졌다. 이 기획은 내가 편집국장을 그만둔 후에도 <경남의 산>, <남해 바래길>, <경남을 걷다>, <경남 자전거 여행>, <하동, 다녀올게요>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콘텐츠 크라우드펀딩 실험

​나도 인물 스토리텔링 작업을 계속해 《풍운아 채현국》을 잡지에 연재한 후 책으로 냈고, 《별난 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은 당시 포털 다음의 스토리펀딩으로 연재한 후 책으로 엮었다. 스토리펀딩은 꽤 성공적이어서 1,008명이 918만 원을 후원해줬다. 이에 용기를 얻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후배 임종금 기자의 <대한민국 악인열전> 연재는 경남도민일보 웹사이트를 통해 스토리펀딩을 진행했다. 여기에도 독자 150여 명이 160만 원을 후원했다. 책으로 나왔을 때 판매 실적도 꽤 좋았다.

경남의 재발견 신문 연재


​출판 크라우드펀딩도 진행해봤다. 권영란 기자의 《남강오백리 물길여행》 출간을 앞두고 과연 출판할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는 89명이 263만 원을 모아줬다. 덕분에 인쇄·제본비를 미리 확보한 후 출판할 수 있었다.

이런 콘텐츠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내용만 좋다면 포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자체 힘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지만, 문제는 그런 콘텐츠 생산력과 열정을 갖춘 기자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한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가진 후배 기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들의 기자 인생이 행복해질 테니까.

다행히 내가 퇴직 후 김훤주 기자가 출판미디어국장을 맡았다. 그는 환경 특히 습지, 그리고 역사·문화 답사 여행 분야에 특화된 전문성을 갖고 있다. 그는 《습지와 인간》,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경남의 숨은 매력》,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 등 많은 책을 썼고, 관련 기사를 연재했다. 또 경남의 각 시·군별로 《나고 자란 우리 창원 이 정도는 알아야지》 시리즈 출판물도 계속 내고 있다. 그가 담당 국장을 맡은 만큼 후배들의 전문성도 잘 살려줄 것이라 믿는다.

독학으로 시작한 뉴미디어와 유튜브 실험

​나는 2000년부터 인터넷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때 html을 익혀 혼자서 뚝딱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었다. 많은 사회단체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기자는 콘텐츠를 전달하는 새로운 기술과 도구의 출현을 외면하거나 회피해선 안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와 경남도민일보가 뉴미디어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는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이미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 책에 소상히 써놨기도 하고 환경 변화가 워낙 빨라 그때 이야기는 이미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블로그와 유튜브에 대해서만 짧게 이야기하려 한다. 내가 2007년 시작한 블로그는 지금도 가장 유용한 콘텐츠 생산과 저장, 유통 수단이며, 유튜브 또한 영상시대 최고의 기록 매체이자 수익 창출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글쓰기만을 고집하다간 도태될 수밖에 없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2014년 무렵 영상 편집을 독학으로 배웠다. 2000년 html을 공부할 때보다 훨씬 쉬웠다. 유튜브나 포털에 스승이 널려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 유튜브 <김주완TV> 구독자는 2만 6,000여 명이다. 구독자 5,000명이 넘는 다른 채널도 하나 더 운영하고 있다. 주로 지역사회의 주요 행사나 강연, 집회를 영상 기록으로 남긴다. 대박이 날 만한 콘텐츠는 아니지만 나름 의미도 있고 수입도 꽤 나온다. 퇴직 후 노후 대책으로도 좋다.

 

김주완TV 유튜브 채널



독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자세

​지역신문의 성공은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독자들이 그 신문을 친밀하게 여기고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 힘이 돼줄 매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편집국장 시절 모든 인터넷 기사 하단에 해당 기자의 프로필과 담당 분야, 핸드폰 번호를 공개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지역 사람들과 적극 소통하라고 권장한 것도 그런 차원이다. 대표이사와 간부, 기자들이 진심을 보이면 독자들이 알아줄 거라고 믿는다.

내가 퇴직 전 전무이사로서 주도했던 두 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다. 2017년 지령 5,000호 독자 응원 광고 이벤트와 2018년 정기후원회원 모집이 그것이다. 1만 원 응원 광고에는 3,506명이 참여했고, 후원회원은 현재 진행형이다.

퇴직 후 지역의 두 어른이 술자리에 나를 불렀다. 먼저 현업에서 은퇴하신 분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경남도민일보 이야기가 나왔다. 한 어른이 신문 구독만 하고 아직 후원회원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다른 어른이 “당장 후원회원 가입하라”고 윽박질렀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내 유튜브 채널에서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32년 지역 일간지 기자의 지역신문 제작기 _ 지역신문 성공하려면 독자와의 거리 좁혀야|작성자 신문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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