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8. 마동호갯벌, 역사·문화 모두 풍성한 생태계

김훤주 2020. 4. 18. 08:45
반응형

해방 이후 전국 최초 간척

마동호 갯벌을 한 바퀴 둘러보는 시작점은 간사지교가 적당하다. 고성군 마암면 삼락마을과 거류면 거산마을을 잇는 다리다.

 

여기 오면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조그만 빗돌이 있다. '국회의원 벽산 김정실 선생 공적비'. 김정실(1904~69)은 고성읍 출신으로 19506.25전쟁 직전인 5월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고성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사람이다. 19882월 세웠다는 비문을 보면 김정실의 공적은 이렇다.

 

선생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제 땅을 갖도록 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 2대 국회의원이 되자 곧 1951년 피난정부의 어려운 재정과 당시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지역민들의 숙원사업인 고성 간척지 조성사업을 온갖 열정을 다해 마침내 이루어내였으니 이는 해방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간척사업이었다. 1951년 지역 유지 천경두씨와 추진위원회를 구성 19523월 총사업비 36천만원으로 착공하여 6012월 준공된 이 간척 농지는 쏙시개의 버려진 황량한 갯벌에서 이제 경지면적 백여 정보에 년간 3천여 석의 쌀을 생산하는 기름진 옥토가 되어 거류·마암·고성 3개 읍면에 속한 7개 부락 3백여 농가에 생의 터가 되고 있다.”

국회의원 벽산 김정실 선생 공적비. 1950년대 고성 간척지 사업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왼쪽은 당시 만들었던 거산방조제와 간사지교이고 오른쪽 1998년 새로 만든 다리이다.

9년에 걸친 간척사업이었다. 마동호 갯벌에서 육지 가까운 안쪽 100(30만 평)는 논으로 개간되었다. 바깥에는 거산방조제와 간사지교를 이어 붙여 바다를 막았다. 500m 가량 되는데 이전에는 배를 타야 건널 수 있었다.

 

지금 쓰는 다리는 1998년 만든 새로 만든 것이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옛 다리에는 수문이 달려 있다. 바다에서 짠물이 올라오지 않도록 막는 구실이다. 이렇게 소금기를 줄여야 개간한 농지가 염해(鹽害)를 덜 받기 때문이다.

 

간척사업을 한 뒤에는 여기를 쏙시개라 하지 않았다. 무엇이라 했을까? 지금처럼 마동호라 했을까? 아니었다. ‘간사지(干沙地)’라 했다. 사전을 보면 간사지는 “‘간석지(干潟地)’의 비표준어라 적혀 있다. 방패()처럼 생긴 펄()이 밀물·썰물에 따라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땅()이 간석지다.

철새들이 노니는 마동호갯벌.

간단하게 말하면 개펄을 모래()로 착각하는 바람에 생겨난 이름이라 하겠다. 이런 보통명사가 고성에 와서는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간사지를 마동호라 한다. 왜일까?

 

생김새 독특한 거산리지석묘

간사지교에서 거산방조제를 건너 맞은편 거산삼거리로 간다. 1010호 지방도로 거산삼거리 언저리에서 마동호 갯벌을 돌아보면 들판 한가운데 고인돌이 하나 솟아 있다. 거산리지석묘인데 모양이 독특하다. 보통 고인돌은 땅바닥에 있지만 이 고인돌은 사람 키보다 높은 축대 위에 있다. 원통 모양 축대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돌계단도 있다.

 

고성군청 문화관광과에서 붙인 안내문은 이렇다.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이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첫째 문장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둘째 문장은 드물게 보는 내용이다. 2000년 전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자리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축대 위 덮개돌이 예사롭지 않다. 표면이 편평한 돌이 적당하게 기울어져 있어 하늘로 오르는 상승감이 느껴진다. 요즘도 거산마을 사람들은 여기서 섣달그믐에 동제(洞祭)를 올린다고 한다.

거산리지석묘. 일부러 쌓아올린 축대 위에 있는데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이 갖추어져 있다.
거산리지석묘의 상판. 적당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 상승감이 느껴진다.

이 들판에 논이 먼저였을까? 고인돌이 먼저였을까? 당연히 고인돌이 먼저다. 그 때 고인돌이 하나밖에 없었을까? 여러 개 있었을까?

 

김해 율하리 청동기시대 유적지를 보면 죽어서 묻히는 공간과 살아서 생활하는 공간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죽은 이를 위한 장소와 산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 사이에는 솟대로 경계까지 표시했다. 솟대 저 너머에는 여러 고인돌들이 일정한 영역에 모여 있다. 요즘으로 치자면 공동묘지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다른 고인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산방조제로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60년 전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는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사람이 지는 지게나 소가 끄는 구루마 아니면 트럭 정도가 고작이었다.

 

방조제 바닥에 까는 돌을 멀리서 가져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 가까이에 커다란 바위가 널려 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여기 있던 여러 고인돌들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2000년 뒤 후손들을 위하여 방조제의 기초가 되어준 셈이다.

 

고인돌들이 그대로 남았다면 지금 이 거산리지석묘와 함께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대접받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달래보자고 하는 흰소리다.

 

고인돌 가까운 길섶에는 둠벙도 있다. 크지는 않은데 모양이 단정하다. 갯가에 흔한 퇴적암을 일정한 크기로 떼어내어 벽면을 쌓아올렸다. 지금도 농사에 활용되고 있는 모양인지 안에는 물이 넉넉하게 고여 있다. 둠벙은 오랜 농경문화의 산물이다. 이런 역사·문화 유적들이 어우러져 있는 데가 바로 마동호 갯벌이다.

 

경남 최대 규모 갈대밭

거산마을에서 논밭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마동호 갯벌의 서쪽 부분과 만난다. 경남에서 가장 너르고 상태도 가장 좋은 갈대밭이 바로 여기다.

 

바람이 불면 집단으로 출렁인다. 겨울에는 추워서 오소소소리를 내고 여름에는 시원하다고 솨아솨아소리를 낸다. 가을볕에 초록색이 빠져나가고 나면 잎사귀는 내려쬐는 햇볕을 되쏘는 장면이 눈부시다.

마동호 갯벌 간척지의 풍경. 농사를 짓지 않으면 곧바로 갈대가 들어가 자란다

갈대는 제방 너머 간척지에도 있다. 농사를 짓는 논에는 없다. 반면 묵정논이나 송전철탑 자리에는 있다. 갈대는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는 그 순간을 틈타 땅속뿌리를 재빨리 내뻗는다. 습지 생태의 놀라운 복원력이라 하겠다.

 

지금 눈에 보이는 갈대밭이 예전에도 갈대밭이었으리라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옛날 쏙시개 시절에는 고성천이 용산천을 비롯한 여러 물줄기를 쓸어담고 내려왔다. 그래서 흐름이 세었는데 1960년 거산방조제·간사지교가 들어서고 약해졌다.

마동해 갯벌의 갈대밭. 경남에서 가장 넓다고 할 수 있다.

옛날 같으면 물살에 쓸려 나갔을 것들이 방조제 안쪽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퇴적된 바가 있으니까 그 위에서 갈대가 자라난다. 갈대는 바닷물에 잠기지 않으면서도 소금기가 있는 땅을 좋아한다.

 

사람에게는 이런 갈대밭이 그냥 보기 좋은 풍경일 따름이다. 다른 생물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집이기도 하고 호텔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조산소·식당·유치원 노릇도 한다.

 

곤충들은 펄이나 잎사귀에 알을 낳고, 벌레가 깨어나면 잎사귀를 양식으로 삼는다. 새들은 벌레와 곤충을 먹기 위하여 갈대밭에 날아들고, 힘센 짐승을 피하기 위하여 갈대밭 덤불에다 둥지를 틀기도 한다.

마동호갯벌에서 노니는 철새들.

갈대는 이처럼 다른 많은 생명들을 품는다. 마동호 갯벌에 희귀한 새들이 많은 까닭이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의 <마동호의 가치 제고를 위한 현황조사 보고서>(2012. 12.)를 보면 이렇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동물 1급이 넷(황새·저어새··두루미)이고 2급이 열다섯(노랑부리저어새·큰고니·큰기러기·물수리·독수리·잿빛개구리매·알락개구리매·붉은배새매·조롱이·흰죽지수리·흑두루미·재두루미·검은머리갈매기·수리부엉이)이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새도 둘(원앙·황조롱이)이 더 있다.

 

지구의 역사를 켜켜이 담은 암석

갈대밭 말고 다른 풍경을 보고 싶으면 다리를 하나 건너 동쪽으로 가면 된다. 세월교라고, 콘크리트로 만들었는데 홍수가 지면 물에 잠기는 잠수교다.

 

건넌 다음에 간사지교가 있는 쪽으로 걷다 보면 갈대밭 너른 풍경은 어느 결에 멀어진다. 대신 갈대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새들이 나타난다. 새들은 길쭉하게 드러난 펄에서 쉬다가 다시 물에 들어가 먹이를 잡는다.

 

조금 더 가면 해식애도 나타난다. 바위가 바닷물에 깎여나가면서 만들어진 절벽이다. 진흙 따위가 쌓이면서 굳어진 퇴적암이기에 파도에 좀더 쉽게 깎였겠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채석강처럼 아주 멋지고 웅장하지는 않다.

마동호 갯벌 주변 곳곳에 자리잡은 해식애. 지구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래도 앞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게 퇴적암이라지? 저렇게 두껍게 쌓이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을까? 굳어서 바위가 되려면 또 얼마나? 굳어진 바위가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데는? 솟아난 바위를 파도가 얼마나 핥아야 저리 깎일 수 있을까?’ 이렇듯 지구의 세월이 24시간이라면 인간의 생명은 0.1초도 되지 못한다.

 

암면과 해면에서 따온 마동호

거산방조제로 돌아와 바깥바다를 바라본다. 대략 2.5km 떨어진 거리에 마동호 방조제가 보인다. 마암면 보전리에서 동해면 내곡리까지 834m를 이었다. 농어촌공사는 2002년 방조제 공사를 시작하면서 안쪽을 담수호로 만든다고 했다. 이 담수호 이름이 마동호다.

 

마암면과 동해면에서 첫 글자를 땄다. 넓이는 408ha이고 저수 총량은 740만 톤이다. 농업용수 개발이 목적이라지만 농경지와 농민이 줄어드는 현실은 무시되었다. 반대가 거세지면서 '마동호'이라는 이름이 많이 오르내렸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마동호''간사지'를 대신하게 되었다.

새로 들어선 마동호 방조제. 커다란 수문이 아래에 여럿 달려 있다.

어쨌든 마동호의 담수화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은 경기도 시화호가 말해준다.

 

담수호를 만들려면 바닷물을 막아야 한다. 1994년 완공된 시화호는 바닷물의 흐름을 막으면서 오염이 극심해졌다. 1997년 다시 수문을 연 뒤에도 시화호는 오염사고를 냈다. 그 탓에 2000년 특별관리해역으로까지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썩은 바다로 공인된 셈이다.

 

2021년 완공을 목표로 거의 다 만든 마동호도 방조제에서 수문을 닫는 순간 시화호처럼 되고 말 것이다.

 

김훤주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