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3. 일제강점 피땀어린 농업유산 주남저수지

김훤주 2019. 2. 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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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피땀 어린 근대농업유산 창원 주남저수지

저마다 다른 산남·주남·동판저수지

경남의 바닷가에 사천만이 있다면 내륙 낙동강 강가에는 주남저수지가 있다. 주남저수지는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 산남저수지와 가운데 주남저수지 그리고 남동쪽 동판저수지가 그것이다

이들 서쪽에는 모두 산자락이 내려와 있다. 산남은 백월산 기슭에 놓였고 동판은 구룡산 기슭에 놓였으며 주남은 백월산과 구룡산 기슭 모두에 걸쳐져 있다

주남저수지는 두 갈래 물줄기로 낙동강과 이어진다. 하나는 정북쪽 본포마을로 난 인공 수로이고 다른 하나는 동북쪽 유등마을로 향하는 주천강이다.

세 곳 저수지는 저마다 특징이 뚜렷하다

산남은 크기가 작다. 찾는 사람도 적어서 새들에게 좋은 쉼터가 된다. 물이 얕은 편이라 작은 철새가 많이 찾는다. 개구리밥·마름 같은 작물풀이 수면 가득할 때가 많고 풍경은 또한 한가롭다

반면 주남은 씩씩하고 시원하면서 다채롭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탐조대가 마련되어 있는 동쪽 제방에서 보면 경관이 단조롭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와 다른 여러 느낌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전망대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주남저수지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이런 습지 풍경이 가까이에 있다.

주남저수지.

동판은 숨은 듯 앉아 있다. 왕버들 등이 곳곳에 있어 아기자기하고 다정다감하다. 사람이 별로 찾지 않고 물이 깊어 고니처럼 큰 철새가 쉬었다 간다.

동판저수지. 몽글몽글한 왕버들이 많고 살짝 비켜나 있어서 한적한 느낌을 준다.

이런 주남저수지의 본바탕은 낙동강 배후습지다. 강물은 홍수가 나면 양옆으로 넘치면서 자연제방을 쌓는다. 강물에 섞여 있던 자갈과 모래와 흙이 강가를 따라 쌓이면서 도도록해진다. 바깥으로 넘쳐흘렀던 물이 이런 자연제방 때문에 도로 갇히면서 습지가 형성된다

강줄기 배후(背後)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배후습지라 한다. 지금은 일대 자연제방과 배후습지가 구분 없이 모두 농토로 바뀌어 대산평야를 이루고 있다.

먼 옛날, 사람들이 먼저 살기 시작한 데는 배후습지가 아니라 자연제방이었다. 주남저수지 일대를 두고 말하자면 낙동강 쪽은 높이가 해발 10m 안팎인 반면 주남저수지 쪽은 3m정도밖에 안 된다

주변보다 볼록 솟은 자연제방에서는 농사도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었고 안전한 거처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100년 전만 해도 그랬다. 주남저수지 쪽이 아니라 낙동강 따라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자연제방에서만 농사가 안정적이었던 것이다

강이 가까우니 논농사였으리라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실은 밭농사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제방 농토는 모래가 많은 사질토여서 물을 머금기가 쉽지 않았던 때문이다.

논농사에 적합하도록 물을 머금는 진흙 펄은 아래쪽 배후습지로 쓸려 내려갔다. 사람들은 배후습지에서 부분적으로 벼농사를 지었지만 비가 조금만 내려도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물은 양쪽 모두에서 들어왔다. 동쪽의 낙동강에서도 역류해 들어왔지만 서쪽의 백월산·구룡산 언저리 여러 골짜기에서도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실농(失農)을 하면 다른 곡물 씨앗을 대신 뿌리는 대파(代播)를 하였다. 지금은 잡초 취급을 받지만 옛날에는 피가 대신 심는 구황식물이었다. 지금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는 메밀도 대신 심는 작물이었다.

붓과 옻칠이 출토된 다호리고분군

주남저수지 일대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살이의 터전이었다. 다호리고분군은 옛날 삶터의 뚜렷한 물증이다. 언덕배기에 앉은 다호마을이 동쯕 배후습지(동판저수지)를 향해 흘러내리는 비탈에 있다

2000년 전~2100년 전 무덤들로 1988~91년 발굴에서 유물이 많이 나왔다. 습지가 아니었다면 삭거나 썩어졌을 것들이 축축한 물기 속에 있으면서 산소가 차단된 덕분에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화폐 구실을 겸했던 쇠도끼(鐵斧철부), 활발한 해외교역을 일러주는 중국제 청동거울과 중국 동전 오수전(五銖錢), 350살 먹은 참나무로 만든 널()이 출토되었다. 아울러 활과 화살, 청동제·철제 칼을 비롯한 무기들, 쇠낫·괭이 같은 농기구 등도 나왔다

특히 함께 출토된 여러 칠제품(漆製品)은 붓이나 긁개(요즘으로 치면 지우개)와 더불어 크게 눈길을 끌었다.

먼저 붓과 긁개는 문자 사용을 보여주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증거다. 다음으로 칠제품은 고유한 옻칠문화일 가능성이 높다. 발굴 당시에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중국 한나라의 낙랑문화가 옻칠문화의 뿌리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호리에서 같은 시대에 만든 칠제품이 나와서 낙랑문화와 상관없이 동시에 공존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97년에는 다호리 가까이 덕천리지석묘에서 대략 2300년 전에 만든 옻칠그릇이 나왔다. 이로써 우리 옻칠문화의 고유성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다호리에서 나온 목재품은 거의 옻칠이 되어 있었다. 옻칠을 하면 보기도 좋고 썩지도 않고 벌레도 먹지 않고 오래간다.

합산패총은 이보다 앞선 시기의 자취다. 합산마을에 있어 합산패총이라 하는데 산남저수지 동쪽 부분과 맞물린다. ()은 조개이니 조개가 산더미로 쌓였다 또는 산이 조개처럼 생겼다 정도가 되겠다

신석기시대(8000년 전)~철기시대(2000년 전) 일대 언덕배기에 살던 사람들의 쓰레기터다. 재첩 껍데기가 나온다 하니 옛적에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 섞이는 기수역(汽水域)이었겠거니 여기면 맞겠다.

일대가 습지였기 때문에 만들어졌던 합산패총과 다호리고분군은 이처럼 뜻깊은 문화재들이 출토된 현장이다. 그런데도 막상 가보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거리가 없다. 안내판은 다호리고분군에만 있고 합산패총에는 아예 없다

덕천리지석묘는 육군종합정비창 안에 있어서 찾아가기조차 어렵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인간 역사·문화와 습지의 관계를 아우르는 전시 공간이 하나 주남저수지 둘레에 들어서면 좋겠다.

일본 연초왕 무라이가 만든 저수지

주남저수지 일대는 일제강점기를 맞아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당사자는 일본사람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였다. 일본에서 담배를 팔아 큰돈을 벌어들인 연초왕이었다 한다

무라이는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주남저수지 일대 대산평야를 조성했다. 촌정농장=무라이농장은 900만평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늪지대와 황무지가 대부분이던 일대 토지에 17만원을 들여 제방을 쌓고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낸 결과였다

촌정농장의 촌정제방은 자연제방과 배후습지 사이를 갈라주는 경계였다. 산남마을에서 대산면 소재지까지, 대산면 소재지에서 제동·우암리 주천강 있는 데까지 들판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야트막한 구릉(독뫼=똥뫼)들 사이를 높이 2~3m 둑을 쌓아 삐뚤삐뚤 이었다

이를 산부제(山附堤)라 한다. ()에 붙여() 만든 제방()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산자락에 해당되는 길이만큼 노력과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요즘 제방은 이쪽과 저쪽을 직선으로 이어서 쌓는다. 기술도 장비도 동력도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는 물론 1970년대만 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동할 수 있는 동력과 장비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촌정제방=무라이제방은 배후습지에 물을 가두어 저수지로 삼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들판이 있는 자연제방 쪽으로 물이 못 나오도록 막는 구실을 했다.

지금과 같은 주남저수지제방은 뒤이어 1922~24년 쌓았다. 1920년 설립된 대산수리조합이 주축이었다. 1928년까지는 주남저수지에서 직선거리로 7떨어진 북쪽 낙동강변 본포까지 인공수로도 내었다

함께 설치된 본포양수장은 가물 때는 물을 주남저수지로 퍼 넘기기도 했고 자연제방 농지에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로써 자연제방에 있던 밭들이 논으로 바뀔 수 있었다. 낙동강 본류 쪽 제방도 축조했는데 1928년부터 36년까지 9년이 걸렸다

그 사이 농장 소유권이 두 차례 바뀌었다. 1927년 부산 거부 하자마 후사타로迫閒房太郞에게 170만원에 넘어갔다가 1938년에는 천일표 고무신으로 유명했던 의령 출신 김영준에게 270만원에 다시 넘겨졌다.

소출은 엄청났다. 무라이 기치베에의 경우 1922년 소작료로 걷은 곡식이 벼 27000, 보리 1700, 1000섬이었다. 반면 조선 농민들은 제방 쌓는 데는 헐값으로 동원되었고 소작은 비싸게 부쳐야 했다

일본인 지주의 곳간은 조선인 소작농의 고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농지 소유가 한 곳에 집중되면 여러 사람이 고달파지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해방된 뒤 19699월에는 대홍수를 맞아 창원농지개량조합에서 1970~76년 제방을 높이는 작업을 벌였다.

근대농업유산 주남저수지

사정이 이렇기에 주남저수지는 그 자체가 우리나라 근대농업유산이다. 그냥 있는 습지가 아니고 아무렇게나 생겨난 농토가 아니다. 자연제방과 배후습지를 나누었던 무라이제방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1920년대 만들어진 촌정제방이 지금은 산남마을에서 대산면사무소까지 이어주는 도로로 남아 있다.

산남마을에서 대산면 소재지까지 구간은 지금도 도로로 쓰이고 있다. 주남저수지에서 본포를 향해 나 있는 인공수로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인공의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다.

주천강 또한 근대농업유산을 여럿 안고 있다. 시작 지점에는 1922년 만든 콘크리트 배수문이 있고 하류쪽 800m 가량 주남교도 원래는 수문이었지 싶다. 축조한 연대는 여러 기록으로 보아 1936년으로 짐작된다

주남교라 해서 지금은 상판이 다리로 쓰이고 있지만 1930년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수문이었다. 아래쪽 균형잡힌 무지개 모양 아치가 아름답다.

주남교 아래쪽을 보면 홈이 뚜렷하게 나 있다. 과거 수문을 여닫는 철판이 끼어 있던 자리다.

위에 아스팔트가 씌워져 있고 철제 난간도 있어 지금은 영판 처음부터 다리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판과 다릿발을 보면 원래 쓰임새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상판은 정육면체로 돌을 다듬어 가지런히 쌓았고 갈라진 부분은 콘크리트로 이어 붙였다

다릿발은 사이가 무지개 모양인데 가운데 둘은 조금 내려갔고 양옆 둘은 깊이 내려갔다. 바닥도 정육면체 다듬은 돌과 콘크리트로 마감했는데 가로로 홈이 길게 파여 있다. 수문을 막을 때 위에서 철판이 내려와 끼이는 자리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삭막하지 않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남교에서 직선으로 4.5km 떨어진 하류에는 우암교와 주호교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또 다른 근대농업유산이 들어서 있는 자리다. 두 다리 모두 김해 한림면 본산리와 창원 대산면 우암리를 이어준다

주호교가 먼저 생겼으며 우암교가 나중에 생겼다. 우암교는 곧은 도로에 이어져 있고 주호교는 굽은 도로에 이어져 있다. 주호교에서 물줄기 하류를 굽어보면 구릉 아래로 물결이 일렁이는 바위터널이 눈에 띈다.

길이가 30m는 됨직한데 돌아가 반대편을 보니 이마 한가운데와 왼편 어깨에 한자가 적혀 있다. 이마는 가로 두 줄로 촌정농장/주천갑문(村井農場/注川閘門)’이라 되어 있고 왼편 어깨는 세로로 명치 455월 준공(明治四十五年五月竣工)’이라 새겨져 있다

1912년 들어선 주천갑문의 전면. 한가운데에는 가로 두 줄로 村井農場 注川閘門이라 적혀 있고 왼쪽에는 세로로 明治四十五年五月竣工이라고 적혀 있다.

주천갑문 내부. 천연암반을 뚫은 흔적이 뚜렷하다.

주천갑문 전면에 새겨진 明治四十五年五月竣工.

주천갑문 전면에 새겨진 村井農場注川閘門.

주호교 아래에서 본 주천갑문 뒷면.

명치 45년이면 일제 강점 이태 뒤인 1912년이다. 그 때 촌정농장을 조성하면서 천연암석을 맞뚫어 물길을 내고 갑문=수문을 달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그 갑문이 용도 폐기되었는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런 굴착이 요즘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엄청난 일이었다. 커다란 소득이 생기지 않는데도 대단한 공력을 들였을 리는 없다. 왜 이렇게 했을까?

여기 천연암석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당시는 주천강 흐름을 막는 병목 같은 지점이었지 않을까 싶다. 여기를 뚫으면서 물이 아래위로 잘 빠지도록 하는 효과가 생겼다

홍수 시기 범람은 지류인 주천강이 원인이 아니었다. 본류인 낙동강이 지류를 거슬러 역류하면서 들판을 물에 잠기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천갑문은 역류하는 낙동강 물줄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촌정제방 너머 저수지(배후습지)로 빼돌리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주천갑문 상류 쪽 가까이에는 주천강 옛날 물줄기도 남아 있다. 창원시 대산면 제동·우암리와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가 톱니처럼 맞물리는 일대이다. 주천강이 생긴 그대로 자연스럽게 곡류사행(曲流蛇行)하던 자취다. 1912년 주천갑문이 들어설 때도 이랬다고 한다

그 뒤 더 내륙 쪽으로 들여 지금과 같은 주남저수지 제방을 쌓으면서는 곧은 물길 직강(直江)도 하나 내었겠다. 행여 옛날 풍치를 볼 수 있으려나 싶어 둘러보았지만 분별없이 들어선 건축물과 넘쳐나는 쓰레기로 가득할 뿐이었다.

주남저수지 앞 인공연못과 들판. 주남저수지는 둘레에 이런 들판이 많아 먹이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철새가 많이 찾는다.

촌정농장을 경영한 무라이 기치베에에게는 무라이 요시노리(1943~2013)라는 손자가 있었다. 그 손자가 20105월 할아버지가 경영하던 김해 진영 촌정농장 자리(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가 있는 창원 대산면은 김해 진영과 맞붙어 있다. 들판으로 보자면 하나로 붙어 있다.)를 찾은 적이 있다

요시노리는 주민들에게 “100년 만에 왔다. 여러분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한 다음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앞엣말은 일본말로 했고 뒤엣말은 한국말로 했다

요시노리는 와세다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제강점기와 그에 뒤이은 시기에 벌어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수탈을 연구·고발하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벌였다. 이런 스토리까지 겹쳐놓으면 주남저수지와 일대 대산평야가 더욱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주남저수지에는 여기에 더하여 함께 누리면 좋을 것들이 제법 있다

주천강 주남교에서 상류쪽 200m가량 지점에 놓여 있는 동읍 판신마을과 대산면 고등포마을을 잇는 주남돌다리, 신방초교 뒷동산의 천연기념물로 700살이 넘었다는 음나무 네 그루, 칠성그린아파트 담장과 바짝 붙어 있는 동산처럼 커다란 바위덩이들, 그리고 그 둘레를 300년 가까이 둘러싸고 있는 포구나무 열한 그루 등등

주남돌다리.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 다리다.

옛날 모습과 사연을 품고서 일대를 찾는 이들에게 좀 더 풍성한 느낌을 안겨주는 존재들이다.

김훤주

※ 2018년 11월 펴낸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피플파워)에 두 번째로 나오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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