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1.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프롤로그

김훤주 2019. 1. 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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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전라도 순천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순천만을 관광자원화하면서 습지를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다

하지만 경남에 습지가 많다는 것은 정작 경남에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른다

창녕 우포늪-소벌과 김해 화포천습지 등을 아우르는 내륙습지, 사천 광포만과 하동 갈사만 등 연안습지, 그리고 산지습지인 밀양 재약산 사자평과 양산 천성산 화엄늪 등등 경남은 그야말로 습지 부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성 장산숲에는 돌평상도 있다.

이들 습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습지와 인간-인문과 역사로 습지를 들여다보다>가 나온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200810월 경남 창원·창녕에서 람사르협약 제10차 당사국총회가 개최되는 데 맞춰서 펴낸 책이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습지와 관련된 저술은 거의 전부가 습지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습지가 얼마나 생명력이 높은지와 얼마나 멋진 풍경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과 글이 대부분이었다

물을 얼마나 많이 머금는지, 오염물질을 얼마나 많이 걸러내는지, 기후 조절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 등도 자주 등장하는 거리였다.

아주 차진 하동 섬진강 신월습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과 습지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습지에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습지에는 수많은 세월 인간이 새겨놓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인간이 습지와 교섭해온 과정은 역사가 되고, 습지와 교섭하면서 만들어진 생활양식은 사회문화가 되며 습지와 함께하면서 이룩된 문물은 인문이 되는 것이다.

<습지와 인간>은 습지의 외형과 속성을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과 습지가 어떻게 관계 지어왔는지, 그 결과 어떤 흔적이 남았는지를 찾아 따라가 보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습지 유적인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창원 주남저수지에 이르기까지 경남의 여러 습지가 대상이었다. 나름대로 새로운 관점과 내용을 담으려고 애를 썼고 그 덕분에 작으나마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적지 않다. 1960~70년대 회고담을 섞어가며 재미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새로운 내용이 별로 없었다

주남저수지를 보기로 들자면 다호리고분군과 천연기념물 음나무군, 주남돌다리를 다루었는데 그것들은 이미 당시에도 습지 관련으로 두루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말하자면 알려지지 않은 역사나 숨어 있는 유적을 찾아내지 못한 게으름이 있었음을 반성하게 된다.

이번에 펴내는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는 개인적으로 보자면 습지에 대한 개안의 시작이었다. 눈이 조금이나마 새롭게 열리고 나니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주남저수지를 보면 주남저수지만 보였다. 바로 옆에 벼이삭이 넘실대는 논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거기에 원래 모습 그대로 있어 온 자연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범람과 역류라는 낙동강 본류의 엄청난 에너지를 인간이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던 1900년대 이전에는 거의 황무지였음을 알게 되자 호기심과 궁금증이 무궁무진 이어졌다

일제 강점과 동시에 일본 연초왕 재벌 무라이 기치베에가 일대를 차지했다는 자료를 찾고 창원 대산과 김해 진영 일원에서 주남저수지를 축조하고 광활한 저습지를 농지로 개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남저수지 둘레의 습지 관련 유물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남에는 갯벌도 풍성하다. 사천의 종포·대포 갯벌이 얼마나 넓은지 저녁노을이 얼마나 근사하게 지는지 아는 이가 드물다

남해 창선섬 원시 모습 선창. 가까이 나뭇배와 멀리 통발이 모두 이채롭다.

사천의 항공산업도 알고 보면 일대가 갯벌이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갯벌과 비행기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려면 넓고 트인 개활지가 필요하다. 일제가 1940년대 군용 비행장을 사천에 지은 까닭이다.

사천강 기슭 들녘에는 그 때 지은 콘크리트 격납고 한 채가 마치 무덤처럼 덤덤하게 서 있다. 비행장을 닦고 격납고를 짓는 과정에서 수많은 식민지 백성들이 강제 부역을 했을 것이다

갯벌에 새겨진 아픈 역사가 지금의 화려한 항공산업의 메카라는 이름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창원 동판저수지. 주남저수지의 일부분이다.

습지의 베풂에 안기는 수동적인 모습보다는 인간이 목적의식을 갖고 습지를 경영해 나가는 능동적인 모습도 인상적이다

창녕 화왕산성과 함안 성산산성, 양산 영축산 단조늪의 단조성 등의 경우 산꼭대기를 돌로 두른 산성과 내부 구조들은 그 안에 있는 습지를 능동적으로 활용한 결과물이다.

람사르협약 습지 규정을 따르면 남강댐 또한 엄연히 습지지만 10년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인간이 습지를 망친 사례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남강댐이 과연 나쁜 결과로만 남았을까? 남강댐 덕분에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습지도 있었고 깨끗하게 원형을 되찾아 가고 있는 습지도 있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본 습지와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학창시절에 우리는 문명이 물가에서 시작했다고 배웠다. 물이 인간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습지와 연결시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습지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우포늪이나 화포천의 풍경 정도를 떠올린다. 농사짓는 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저수지와 도랑, 강가나 해변의 모래사장도 습지라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 습지 관련으로 두 번째 책을 내면서 대단한 지식 따위를 전달해야겠다는 욕심을 줄였다. 전문가가 보면 내가 갖고 있는 습지에 대한 지식이 얄피한 아마추어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산꼭대기 있는 하동읍성 발굴 현장. 산꼭대기인데도 읍성을 두고 사람이 살았던 까닭은 여기에 물이 나는 습지가 있다는 데에 있다.

독자 여러분께 이 책이 그저 습지가 무엇인지 습지와 인간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습지와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보람은 충분하다고 여긴다.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는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7년 한 해 동안 경남도민일보에 연재한 습지 문화 탐방이 바탕이다. 그 위에서 2018년 추가 취재를 통하여 적지 않게 보완 수정했다

개안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습지와 인간-인문과 역사로 습지를 들여다보다>를 쓸 때 현장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녀주신 정대수·윤병렬·윤미숙·김덕성·이종훈·전원배·이현주·조경제·육근희·이종명·이상용·이수완·권용협·최상철님이 선생님이셨다. 이제 고인이 되신 이상길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님의 가르침은 특히 컸다

이번에는 정우규·유장근·홍중조·배성동·윤병렬·김덕성·이찬우·김순재님에게 고마운 도움을 많이 받았다. 책에 실수나 잘못이 있다면 모두 내 탓이다. 거침없이 꾸짖고 속시원히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20188

김훤주

#실제 출판된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프롤로그에서는 사진을 쓰지 않았습니다. 블로그라서 그에 걸맞게 하려고 사진을 몇 장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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