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위인 동상 백 개보다 나은 의로운 졸업생 추모비

김훤주 2019. 1.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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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2013년부터 해마다 하고 있다. 지역의 중·고생들과 함께 역사 현장을 찾아 해당 지역만의 고유한 향기를 맡아보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한 해에 서른 곳 이상 학교를 찾게 된다.

갈 때마다 교정을 둘러보곤 하는데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어떤 학교는 아름드리 나무가 많고 어떤 학교는 운동장 천연 잔디가 멋지고 어떤 학교는 화단이 잘 가꾸어져 있다

세종대왕·이순신장군·신사임당 같은 위인의 동상이나 책읽는 소녀 같은 조형물도 있는데 이 또한 뜯어보면 재미있다. 논에서 일하다 나온 농군처럼 투박한 이순신도 있고 왕방울눈 이웃집 꼬마를 닮은 세종대왕도 있고 만화책을 읽는지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책읽는 소녀도 있다.

고성고 교정의 나무들.

색다른 조형물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20113월 세운 고성고 교정의 의사자(義死者) 천찬호 추모비 얘기다

"2010712일 빗길 고속도로 교통사고 현장에서 2차 사고 방지를 위해 스스로 가던 길을 멈추고 구조활동을 돕다 안타깝게 숨진 살신성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고 후배들과 사회의 귀감으로 삼고자 이 비를 세운다."

앞뒤 정황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몰라도,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그 삶의 자세가 떠올라 비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성고 교정의 의사자 천찬호 추모비(윗부분)

찾아보니 이랬다. 3학년 때 학생회장을 지냈고 2001233회로 졸업했다. 대학을 나오고 군대에서 전역한 뒤 건설회사에 다니던 스물아홉 나이였다. 새벽 245분께 호남고속도로 순천 기점 20.8지점에서 사고 현장을 보았다. 곧바로 타고가던 자동차에서 내려 구조활동을 돕고 수신호를 하다가 달려오는 승용차에 치여 숨졌다.

추모비나 동상은 기억을 불러다 준다. 세월에 묻혀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버린 어떤 인물의 삶과 죽음을 지금 여기로 데려와 준다. 추모비가 없다면 학생들은 선배 한 사람이 이렇게 의로운 일에 목숨을 바쳤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추모비를 새겨보며 기리는 마음을 먹거나 저런 자세로 살아야지 본을 받거나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는 일은 없도록 세상을 바꾸어야지 다짐할 수도 있다.

이순신·세종대왕·신사임당 동상이나 사립학교 설립자 동상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하지만 그런 동상 100개보다 이 추모비 하나가 더 값지다. 학생들이 품을 수 있는 현실적인 질감이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고성고 교정의 의사자 천찬호 추모비.

학교와 동창회가 어디에도 없는 훌륭한 보물을 하나 만든 셈이다. 그런데 물어보았더니 대부분이 거기 어떤 조형물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값진 보물을 묻어두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선생님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너희들 선배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단다’, 툭 던져만 주어도 좋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삶을 대하는 훌륭한 자세 하나를 배울 수 있을 텐데.

어쨌거나 고성고 말고 다른 학교들도 이런 졸업생을 찾아내어 기념하고 교육에 활용하면 좋겠다.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1월 15일치 데스크칼럼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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