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풍운아 황운하

풍운아 황운하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기록하는 사람 2018. 5. 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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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풍운아 황운하 마지막 화. 백한번째 프로포즈


1983년 경찰대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황운하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입실 시각은 오후 6시. 친구들과 헤어진 황운하는 6시가 약간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황운하를 부른 지도관은 흡연과 음주 여부도 확인했다. 황운하는 모두 인정했다. 오히려 당황한 지도관이 되물었다.


“왜 이렇게 다 인정하느냐?”

“거짓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술·담배를 하다 적발된 경찰대 학생에게는 퇴교조치가 내려졌다. 황운하는 그를 아낀 한 교수 덕에 구제받을 수 있었다. 황운하는 경찰대 생활에 몰입이 어려웠다. 스스로 자신이 경찰 조직에 있어야 할 동기를 찾아야 했다. 졸업 즈음 자신이 경찰에 있어야 할 이유로 찾은 게 경찰조직 숙원 해결이었다. 그 중 하나가 수사권 독립이다. 이 정도 구조 변화를 꾀하려면 형사소송법 체제를 바꿔야 한다.


황운하는 경찰조직에서 경정 직급인 형사과장 시절, 형사들에게 수사국장이 되어 이러한 큰 틀을 바꾸는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경정에서 총경, 그리고 경무관을 거쳐서 치안감으로 승진해야 수사국장이라는 보직을 받을 수 있다.


황운하에게 2002년 총경 승진 기회가 찾아온다. 2001년 한 경찰대 동기가 서울청 홍보계장을 지냈다. 총경 승진 1순위라 인기가 많은 보직이었다. 그 동기는 총경으로 승진하면서 자기 후임으로 황운하를 추천했다. 당시 동기는 두터운 경찰청장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황운하를 밀어주는 것은 가능했다.


황운하는 이렇게 거절했다.


"기자들 상대는 체질에도 안 맞고, 일선 형사과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만약 황운하가 서울청 홍보계장으로 갔다면 2002년에 총경 승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운하는 일선 형사과장을 택했다. 그리고 2004년 강남서 형사과장 시절 경찰 수뇌부에 찍혀 직위해제를 당했다. 집에서 놀다가 소청심사로 강동서 생활안전과장으로 복직됐다.


주변에서는 황운하 총경 승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우선 승진 가능성이 높은 보직이 아니었다. 심사 기준에는 근무 기간도 포함된다. 황운하가 복직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 짧은 기간을 가지고 심사 받아 승진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그 경찰대 동기는 집에서 놀고 있는 황운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최기문 청장하고 있어. 너는 모르는 채 하고 여기로 와. 그럼 내가 인사 시킬 테니까 여기 와.”


물론 황운하는 가지 않았다. 그 시절에 황운하를 챙겨준 동기생은 그 친구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 박종희는 경찰청장 최기문에게 황운하 직위해제  문제를 따진다. 언론사와 갈등을 해소하려는 무리한 징계라고 지적했다.


경찰청장이 국정감사 지적을 받는 상황에서 최기문 청장이 황운하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한 참모가 경찰청장에게 “황운하를 승진 안 시키면 경찰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을 남기는 경찰청장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황운하는 총경 승진 후, 2005년 수사구조개혁팀장을 맡으면서, 수사권 독립은 '수사 구조'를 개혁하는 시도라는 걸 알리고자 했다. 지금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사람들은 지금 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눈앞에 제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검찰이 부패하다고요? 경찰도 부패하잖아요. 검찰이 부당한 지시를 하듯 경찰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릴 수도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는 사건은 언제나 존재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6년 한화그룹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권 독립 토대로 삼으려 했다. 경찰이 재벌 회장을 구속한 첫 사례였고 마무리도 깔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 늑장수사와 은폐 의혹으로 이런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남대문서장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대문서장이 수사를 지연시킨 것은 눈앞에 명백히 드러난 상황이다. 현장에 나간 형사들을 철수해 수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사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다.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에 앞서 문제점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면 검찰 권력 독점은 바꾸기 어렵다. 애초에 오류를 드러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고자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던 이는 조현오 청장이었다. 2009년 서울지방경찰청장이던 조현오는 황운하에게 서울청 형사과장 자리를 제안한다.


조현오 청장은 ‘조파면’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내부 비리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조현오 생각은 이랬다.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조현오 청장이 업주 접촉 지시를 어긴 직원을 숙청하듯 날려버려도, 경찰은 ‘비리 경찰’이미지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이경백 사건이 단적인 예였다.


2010년 6월 황운하가 구속한 이경백은 곧 보석으로 풀러났다. 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 ‘이경백 부실 수사’ 여론이 일자 조현오 경찰청장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반면,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에 ‘황운하를 승진 시킨 것’을 가장 잘 한 일로 여긴다고 했다. 

조현오는 2011년 말 황운하를 경무관으로 승진시킬 때 청와대 민정수석이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다.


통상 경찰 고위직 인사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인사비서관과 경찰청장이 논의한다. 민정수석은 승진자 적격 여부를 검증한다. 보통 민정수석은 검찰과 접촉이 잦아 검찰 출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그래서 경찰은 검찰 눈 밖에 나면 승진하기 어렵다.


황운하가 승진하려면 배짱 두둑한 상사가 받쳐 줘야 했다. 황운하는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했고 수사기획관이 됐다. 2002년부터 황운하가 힘들 때 도와주려했던 경찰대 동기 친구는 앞서 2009년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2011년 베이징 주재관을 지냈다.


수사기획관 황운하가 범죄정보과에게 받았던 첫 보고는 베이징 주재관, 즉 경찰대 동기생이 저지른 범죄행각이었다. 2012년 3월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경무관 박병국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옛 고마웠던 생각들이, 괴로움으로 번졌을 황운하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물러난 후, 황운하를 과감하게 기용한 상사는 없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과거 황운하가 수사했던 사건에 관계된 검사 일부가 박근혜 정권 핵심으로 포진됐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승진과는 더욱 멀어졌다.


2016년 황운하는 경찰대학교 교수부장이 됐다. 황운하가 경찰 생활을 시작한지 29년째인 해이자, 경무관 5년차였다. 경찰은 계급정년 제도가 있다. 승진을 못하면 경무관은 6년차에 경찰 조직을 떠나야 한다. 황운하는 박근혜 정권과 경찰 인사에 대한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내 역할을 해야 경찰로서 존재해온 살아온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것인데, 만약에 내 잘못으로 치안감 승진에서 밀려난다면 오케이지만. 우병우 민정수석이 훼방 놓고, 정치권 실세들이 치안감 자리를 땅따먹기 하듯이 하니까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 내가 그런 걸 바꿔보려고 살아왔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치안감으로 승진이 안 되니까 승질이 나지.” 


치안감으로 승진이 되지 않아 불만을 쏟아낸다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 고위직에 있는 경찰대 후배는 그가 박근혜 정권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에 탄복했다.


"운하 형 대단해. 털어서 먼지 안 나나 봐.”



아직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조직에서 나가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또한, 다가오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운하는 2016년 4월, 경찰대학교로 출근하면서,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 본 소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25년 전, 나도 경감 초임 시절에 경찰선배들에게 도대체 뭐하느라 이렇게 형편없는 경찰 조직을 만들었냐며 당돌하게 따진 적이 있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 경찰 조직에서 지금껏 실제로 별 이루어놓은 것이 없이 벌써 퇴직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도 별 이루어놓을 자신이 없는 것이 또 부끄럽고 또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내게 주어진 어쩌면 마지막 미션일수도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나마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선배들의 실패사례를 후배들은 반복하지 않도록 올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공격을 내가 받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부끄럽다면 적어도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걸 아는 사람은 덜 부끄럽다지만 그대로 난 몹시 부끄러웠다." (출처 황운하 블로그. 2016년 4월 25일 쓴 ‘경찰대학에 출근하다’ 글 중에서) 


에필로그 


2017년 연말은 황운하 경찰 퇴직 예상 시점이었다. 그런 경우, 누구나 평생 몸 담았던 경찰 생활을 담은 자서전 한 권 정도는 소장하고 싶기 마련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게 될 황운하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 필자가 써주고 싶다고 자청했다.


취재는 2016년 여름에 시작했다. 2016년 경찰 조직 내 황운하 관련 취재는 어려웠다. 황운하가 박근혜 정부와 경찰 수뇌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인사를 앞둔 고위직들은 그와 가깝다는 인상이 줄까봐 취재를 꺼려했다. (바쁜 시간 쪼개서 취재에 응해준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17년 초, 황운하는 수사구조개혁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무관 6년차 임기를 그렇게 보냈다. 수사권 독립을 위해 멀리서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 뒤로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2016년 연말,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열렸고 이듬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황운하는 치안감으로 승진하여 울산지방청장으로 부임했다.


경력 30년 경찰 황운하가 경찰 조직 발전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까? 확신하기 어렵다. 그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호소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수사권이라는 주제 안에서 보이는 통렬한 일관성 덕분일 것이다.


나 또한 황운하를 겪은 지금, 그가 한국사회에 끊임없이 던져온 ’경찰 수사권 독립‘이라는 프로포즈를 다시 장기적 과제로 밀어내며, 외면하는 주장을 하지는 못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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