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황운하 연재 순서
- 제1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제2화. 내 자존심이 어때서
- 제3화. 서부지검 이상 없다
- 제4화. 외시출신 경찰청장
- 제5화. 북창동의 언터처블
- 제6화. 오늘 참 멋진 날이야
- 제7화. 백한 번째 프로포즈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김대중은 프랑스 대혁명처럼 구체제에 대한 모순을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체제 모순 타파 가운데 하나가 경찰 수사권 독립이었다.
1999년 경찰청장 김광식은 수사권 독립 소신을 피력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는 오랫동안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형사 검찰 파견이었다. 정작 형사과 인력은 부족한데 경찰은 검찰 일을 거들었다. 검찰 파견 직원 관련 규정을 따르지 않는 편법 파견이었다. 파견 경찰을 철수하려면 서장 결재가 필요했다.
황운하는 파견 경찰 철수를 시도했다. 서장은 결제에 앞서 검찰 보복을 걱정했다. 그래도 조직에 대한 자존심은 있었다. 해보겠다고 나서는 황운하에게 힘을 보탰다. 황운하는 관련 규정을 바탕으로 '파견 경찰관 철수 복귀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서울중앙지검에 보냈다.
서울중앙지검은 반응이 없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황운하는 파견 형사에게 복귀 시점을 알리면서 이를 어기면 징계하겠다고 통보했다. 형사들은 모두 예고한 시한에 맞춰 복귀했다. 황운하는 미리 방송 카메라를 불러 그 앞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이 내용은 9시 뉴스 첫 보도로 나간다.
1998년 검찰은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을 구속했다. 이어 1999년 경찰청 정보국장도 구속한다. 검찰이 경찰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에 맞춰 경찰이 의욕적으로 나선 수사권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황운하는 공고해 보이는 구체제 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게 돼 있다고 확신했다. 1999년 검찰 파견 경찰 철수 이후 황운하는 검찰 쪽 전화를 자주 받는다. 대부분 '두고 보자'는 내용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에 호의적인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대북특검과 대선자금 수사로 요동쳤다. 황운하는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수사 지휘를 받는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이었다.
이 시기 황운하와 식사를 했던 서울지역 일간지 기자는 흥미로운 일을 접한다. 그 자리에는 한 변호사가 함께했다. 변호사는 황운하에게 괜히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 했다. 대화에 호기심을 느낀 기자는 취재를 시작했다. 일개 경찰서 형사과장이 검찰 뒤를 캐는 전무후무한 일이 진행 중이었다. 시발점은 용산역이 주무대인 브로커 '오다리'에 대한 첩보다. 당시 오다리를 만난 형사가 전한 이야기다.
"처음에 용산경찰서에 가니까 오다리라는 친구가 접근을 했어. 지인이 나를 한 호텔 식당에 데리고 가더니 박 사장이라고 소개하는 거야. 그가 나에게 유능한 형사라고 익히 들었다며 친해보자네. 그때는 뭐하는 친구인지 몰랐거든. 그런데 내 앞에서 전화를 하더니 '김검, 박검' 그러면서 상대에게 야지 넣고 하는데 속으로 사기꾼인가 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이었어!“
박 사장은 '오다리'로 불렸다. 다리 다섯 개는 '마당발'과 '잽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역 주변에는 성매매집결지가 있었다. 용산역에도 윤락업소가 80여 곳 정도 있었다. 각종 불법영업으로 업주에게 문제가 생기면 오다리가 나섰다. 오다리는 변호사를 구해주면서 거액을 챙기곤 했다.
오다리는 판검사와 친분을 과시했다. 물론 경찰도 유착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경찰은 형사들이 잘못해 검찰에 불려 다니면 오다리가 나서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오다리에게 신세를 진 경찰이 제법 있었다. 황운하는 초기에 오다리를 수사할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다. 마침 형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2001년 유명 연예인 마약 사건을 인지 수사한 젊고 유능한 형사였다. 2003년 3월 17일 진술서를 확보하고 오다리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긴급체포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검찰이 기각한다. 경찰은 오다리 사건 관련 영장을 다섯 번 신청한다. 압수영장 세 번, 구속영장 두 번이다. 검찰은 모두 기각한다. 언론은 '다섯 번 영장 기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다리는 2003년 5월 27일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오다리 통화기록을 확보한다. 최근 3개월 동안 검사, 변호사, 판사 50여 명과 150통 이상 통화한 내용이었다. 절반 이상이 서울중앙지검 서부지청 검사들이었다. 6월 들어 대검은 현직검사 22명을 상대로 감찰을 시작했다. 계좌추적에서 금품을 받은 것이 드러난 검사들은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로 넘어갔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법무부 소속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이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검사징계위원장은 법무부 장관이다.
2003년 10월 4일 <경향신문>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끝내 자기 오기를 관철했다고 보도했다. 법무부 소속 검사는 무혐의로 벗어났고 이후 순탄한 길을 걸었다. 오다리 보도로 막상 피해를 입은 쪽은 강남경찰서 형사과장인 황운하였다. 총경 승진을 앞두고 직위해제 당한 것이다.
언론과의 마찰이 징계 배경이었지만 2003년 6월 20일 <한국일보>는 "그간 자주 물의를 빚어 온 점 등도 감안됐다"는 고위 간부 말을 인용하면서 ‘'트러블메이커'에 대한 시범징계 가능성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황운하는 이후 소청심사로 직위해제 처분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듬해 황운하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황운하를 중용한 첫 번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다. 외무고시 출신 허준영은 2005년 1월 취임했다. 그는 청문회에서부터 경찰 수사권 소신을 거듭 밝혔다.
수사권이 있는 검찰은 챔피언이었고 경찰은 도전자였다. 도전자는 계속 시합을 요구했고 챔피언은 웬만해서는 도전자를 피하려 했다. 2004년 9월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협의체 회의가 수차례 열렸다. 2005년 중반 국회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진행은 갈수록 지지부진했다. 참여정부는 검찰·경찰 중재, 국회 입법, 총리실 조정 등을 거치며 결론을 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경찰청장 허준영은 수사구조개혁팀을 꾸려 황운하 총경을 팀장으로 불렀다. 황운하 행보는 다시 대외적인 충돌을 가져왔다. 황운하가 허준영에게 보고 없이 전결로 하달한 공문이 문제가 됐다. 모두 두 번이었는데 검찰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 공문은 검찰 강제인치 등 잘못된 관행을 거부하라는 지시였다.
수사지휘권을 앞세운 검찰이 저지르는 나쁜 관행 가운데 '피의자면담제도'가 있다. 법원 영장실질심사제도를 흉내 낸 이 제도는 법적 근거가 없다. 만약 경찰이 긴급체포를 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 검찰이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다면 화상통신을 하거나 검사가 경찰서로 찾아오면 된다. 법원이 피의자를 면담하는 제도인 영장실질심사도 피의자 신청이 없으면 할 수 없는데, 검찰은 경찰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피의자 뜻과 무관하게 검찰청으로 데려오게 했다. 기관이 다른데도 공문도 없었다. 경찰은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경찰서로 데려왔다.
황운하는 전국 경찰서에 '피의자 면담을 위한 검사면전 강제인치거부'를 내용으로 담은 공문을 하달한다. 충남지방경찰청과 강릉경찰서 두 곳이 검찰과 맞붙었다. 청와대도 황운하 행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청와대 공직기관비서관실이 나서 허준영에게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허준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 문제로 허준영과 청와대는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허준영은 왜 자신에게 보고도 없이 행동한 황운하를 오히려 감쌌을까? 한 경찰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내용은 청장에게 보고해도 그 누구도 보내라고 할 수 없어요. 거기서 황운하의 과단성이 나오는 거죠.”
허준영은 2005년 12월 WTO 쌀협상 비준반대 시위에서 농민 두 명이 사망하면서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새로 청장으로 취임한 이택순은 황운하를 경찰청 밖으로 내보냈다.
황운하는 대전서부서장으로 가서도 '수열모'라는 모임을 만든다. '수사구조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검찰이 주도하는 형사소송법 체제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깨우쳐야 했다. 그 지점에서 구체제 모순을 뒤바꾸는 에너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모임을 꾸리고 몇달이 지난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서는 대전지검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한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데려오게 했다. 대전서부서 직원은 수열모 모임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나서 서장 황운하에게 바로 보고한다. 대전서부서는 검찰 요구를 거부하는 사유를 적어 공문으로 보냈다. 피의자를 면담하고 싶으면 검사가 경찰서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검사는 직접 경찰서로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9월 15일 검사가 다시 인치 요구를 했다. 황운하는 또 거절했다. 대전지역 언론은 당시 검·경 갈등을 '살얼음판', '초유의 신경전', '폭풍전야' 같은 표현으로 묘사했다.
검찰 안에서는 황운하를 겨냥해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며 '인권옹호직무명령불준수죄'로 기소하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종전 같은 기소처리는 없었다. 2006년 9월 26일 대전CBS 정보보고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본인이 희생양이 되겠다고 덤벼드는데 우리도 사실 겁난다.
검찰만 황운하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경찰 수뇌부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이미 경찰청은 이런 문제를 검찰에 협조하기를 바랐다. 경찰청장 이택순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황운하를 소리 지르는 노점상에 빗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운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택순은 9월 25일 황운하를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보낸다. 누가 봐도 문책성 인사였다. 황운하는 26일 이임식에서 검찰을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요, 사법개혁의 방해 세력이고, 강력한 인권침해 집단이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대다수가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도 검찰개혁 방법으로 경찰 수사권에 힘을 보태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경찰이 중요한 순간마다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한 예다.
게다가 국민은 경찰이 어떤 수사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경찰이 존재감을 알리려면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므로 대기업, 정치인 수사는 대부분 검찰 몫이다.
황운하는 형사과장 시절 마약사건을 중요하게 다뤘다. 검찰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수사해서 이목을 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연예인 마약 문제였다. 2007년 황운하가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 시절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사건이 터진다.
2007년 3월 8일 한화그룹 회장인 김승연이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직접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보복 폭행 사건'이다. 수사 결과도 깔끔했다. 일선 경찰서가 처음으로 재벌 회장을 구속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 초기 경찰이 은폐를 시도하면서 늑장수사를 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과정에 한화 쪽 로비가 있었고, 전 경찰청장 최기문이 역할을 했다. 5월 25일 경찰청 감찰 이후 서울청장 사퇴와 서울청 수사부장, 형사과장, 남대문경찰서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경찰청장 이택순이 자기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일이 벌어진다. 경찰이 검찰에? 황운하는 5월 26일 이택순 퇴진을 요구한다. 일선에서는 경찰청장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경찰을 수사기관도 없는 조직으로 만들었다고 분개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같은 달 28일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경찰지휘부회의에서 국장급 일부가 사퇴를 건의했다. 이 모든 것은 조직 발전을 위한 충정으로 이해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택순에게 힘을 보태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사퇴를 건의했던 국장 및 청장들은 인사 조치되거나 회의 때마다 면박을 당했다.
황운하에게는 중징계가 예고됐다. 8월 29일 경찰청 중앙징계위원회에 황운하가 소환됐다. 황운하가 차에서 내려 경찰청 정문으로 들어갔다. 황운하는 징계위원을 향해 징계받을 일을 한 게 없다고 반박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인용하기도 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당시 민중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사건인데 그 구체제 모순에 맞선 사람들을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징계위원장이 황운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너무 세게 이야기 하지마! 무섭다고!”
(다음 4화. 외시 출신 경찰청장)
글쓴이 : 서형 seohyung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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