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2년 건립된 마산시 합포구 신포동 3·15회관(지금은 철거되고 없음)의 전면에는 모두 12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이 하필 12개인 것은 1860년 3·15마산의거 당시 경찰이 쏜 총탄에 학살된 12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12열사가 아니라 사실은 14열사
이들 12열사는 김영호(당시 19세·마산공고)·김효덕(19·직공)·김용실(18·마산고)·김영준(20·무직)·전의규(18·무직)·김삼웅(19·무직)·김영길(17·직공)·오성원(20·구두닦이)·김주열(17·마산상고)·강융기(19·마산공고)·김평도(38·점원)·김종술(16·마산동중) 등을 가리킨다.
이들 중 김영길 열사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른 날 밤 경찰과 대치하던 중 총탄에 맞아 숨졌고, 김평도·김종술 열사는 4월 26일 이승만 독재자가 물러난 날 원정데모대와 시위를 벌이던 중 희생됐다. 그외 9명은 3월 15일 1차 봉기 때 경찰의 실탄발사로 숨졌다.
김주열 열사
이들 12열사 외에도 3월 15일 북마산파출소 앞 시위 때 가슴에 총탄을 맞아 투병생활을 해오던 조현대 열사(당시 20세)도 이듬해인 61년 2월 부산에서 끝내 숨졌고, 역시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아오던 김동섭 열사(28·무직)도 63년 결국 숨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3·15 마산의거 때 학살된 민간인은 모두 14명에 이른다.
또 당시 부상자 가운데 지금까지 숨진 9명까지 포함하면 3·15의거와 관련, 희생된 사람은 모두 23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현재 4·19혁명 부상자회 회원으로 돼 있는 나머지 부상자 46명도 작고할 경우 모두 합동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그러나 실제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 당시 검찰기록이나 대한적십자사의 구호활동 기록을 보면 부상자와 고문피해자가 180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명단은 남아있지 않지만 모두 27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도 있다.
4·19혁명부상자회 경남지부 최성배 사무국장은 지난 97년 기자와 인터뷰 과정에서 “의거 당시 공무원의 경우 자신의 신상에 불이익이 있을 것을 우려, 대부분 자녀의 부상사실을 쉬쉬하며 은밀히 치료를 시켰으며, 이후 마산시에서 부상자 조사를 실시할 때도 신고를 안한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례는 조현대 열사의 경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가슴에 총상을 입은 후 4·19혁명 직후 지급된 위로금으로 근근이 병원치료를 받아왔으나 얼마후 이마저 바닥이 나자 치료를 받을 길이 막막했다. 이에 따라 부산에 있다는 친척의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숨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은 61년 3월 15일자 부산일보에 보도됐으나 혼란스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후 1998년 필자가 이 사실을 찾아내 당시 경남매일에 보도함으로써 공식 희생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공식 사망자 명단에 끼지 못한 사람이 더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신문보도 등에 따르면 김주열 열사 외에도 실종자가 상당수 있었으며, 경찰이 시망자의 숫자를 고의적으로 축소하려 했다는 흔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주열 열사를 살해 유기한 박종표(맨 오른쪽)와 발포 경관들.
가해자는 누구?
이처럼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만든 가해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1차적으로는 물론 이승만 정권이다. 그는 해방직후부터 자신의 집권을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을 뿐 아니라, 6·25전쟁 과정에서도 최소한 수십만명의 양민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무참히 학살했다. 그리고 3·15의거 때도 부정성거에 대한 마산시민의 정당한 항쟁을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 학살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산에서 직접 부정선거를 총지휘하고 시민의 봉기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했을 뿐 아니라 폭력적인 진압과 발포명령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책임자들도 분명히 규명이 돼야 한다.
3.15묘역 의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가해자 명단과 죄상 기록.
우선 부정선거의 총책으로 이용범(국회의원·창원을·자유당 경남도당위원장)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마산시민의 민의를 배신하고 이용범에게 매수돼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 허윤수(국회의원·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도 뺄 수 없다. 허윤수는 특히 3·15의거 와중에도 자신의 죄상을 뉘우치지 못하고 시민과 언론의 의원직 사퇴요구를 무시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이 쫓겨난 이후에도 다시 7·29총선에 출마하려는 뻔뻔스런 작태를 보이다 주위의 만류로 포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지난 92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고향 진주에 묻혔다.
또한 발포명령자로 지목되는 서득룡(부산지검 마산지청장)과 손석래(마산경찰서장)도 직접적인 가해자로 꼽힌다. 또 이용범의 수족노릇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고문하는 등 죄상을 남긴 강상봉(마산경찰서 사찰계장)과 항쟁을 공산분자의 소행으로 모는데 앞장섰던 이필재(서울신문 마산지국장), 시위진압을 지휘한 최남규(경남경찰국장) 등도 대표적인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한 가해자 명단과 죄상은 국립 3.15묘지 의거기념관에 위의 사진처럼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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