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4>를 읽었다. 앞서 읽었던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3>과 마찬가지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정리는 아니고, 그냥 가볍게 한 번 끼적거려 보았다.
1918년, 동북3성을 장악한 장쭤린은 정규군 양성을 서둘렀다. 사병들은 긁어모으기 쉬웠지만 장교가 부족했다. 신해혁명으로 폐교된 ‘동3성 강무당((講武堂)’ 자리에 ‘동북강무당’ 간판을 내걸고 생도들을 모집했다. 16쪽
동북강무당은 동북군의 요람으로 윈난(雲南)강무당, 바오딩(保定)군관학교, 황푸(黃埔)군관학교와 함께 중국 4대 군관학교 중 하나였다. 개교도 쑨원이 광저우(廣州)에 설립한 황푸군관학교보다 6년 빨랐다. 훗날 신중국의 장군을 13명 배출했다. 19쪽
장작림(張作霖)을 얄궂은 군벌 가운데 하나로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밝은 눈과 추진력을 갖추고 시대정신까지 읽을 줄 아는 걸물이었던 것 같다.
……내덜란드 무기상이 상하이의 신문에 광고를 냈다. 신문을 본 장쭤린은 공병청장 한린춘(韓麟春)을 상하이에 파견했다. 상하이에 온 한린춘은 넋을 잃었다. 한 집 건너 도박장이었다. 살벌한 인간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없었다. 기계 구입 자금을 탕진한 한린춘은 장쭤린에게 편지를 보내 이실직고했다.
“도박장에서 자금을 날렸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도박에 도가 통한 듯합니다. 득도한 선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여한이 없습니다. 황푸강에 투신하겠습니다.”
편지를 읽은 장쭤린은 한바탕 욕을 늘어놓더니 “내 부하 중에 득도한 놈이 생겼다”며 포복절도했다. 황급히 군수처장을 불렀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냈다. 빨리 100만원을 들고 상하이에 가서 한린춘을 만나라. 반은 도박에 쓰고 나머지 반으로 기계를 구입하라고 해라. 강물에 뛰어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라. 감기라도 걸리면 도박판에서 판단이 흐려진다. 한린춘이 도박에 열중하는 동안 너는 옆에 앉아서 심부름만 해라.”
다시 도박장에 간 한린춘은 본전의 네 배를 따자 손을 털었다. 딴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기계 구입에 사용했다. 한린춘이 선양에 도착하는 날, 장쭤린은 직접 역에 나가 “너 같은 부하를 둔 게 영광”이라며 연신 엉덩이를 두드려줬다. 어처구니없는 얘기 같지만 ‘중국의 크르푸’라 불리던 선양병공창(瀋陽兵工廠)은 이렇게 탄생했다. 22~23쪽
도박으로 공금을 날린 부하에게 다시 공금을 쾌척하는 도박을 했다. 재산이 엄청났기에 할 수 있었겠지만 부자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4 표지.
인연을 중요시 여긴 장쭤린도 비서실장을 내쫓은 적이 있었다.
“8년간 내 옆에 있으면서 반대 의견을 낸 적이 없다. 항상 네, 네 하면서 시키는 대로만 했다. 쓰레기 같은 놈이다.”
이유가 장쭤린다웠다. 24쪽
권력자를 모시는 비서가 ‘노’라고 소신있게 얘기하기는 정말 어려운가 보다.
1992년 1월, 54년 만에 자유를 획득한 장쉐량(張學良)은 일본 여류 작가의 방문을 받았다. 청년 시절 얘기를 하던 중 의외의 말들을 쏟아냈다.
“나의 여성 편력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네 살 때 친척 여자애가 나를 유혹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무릉도원에서 노는 것 같았다.” 28쪽
사실일까? 요즘 우리나라 미투 운동을 보면 장학량이 먼저 유혹했거나 했을 개연성이 높아보인다. 하지만 생각도 못한 별별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데가 중국이니까…….
인간은 별것도 아닌 인연을 필연으로 만들 줄 아는 동물이다. 근 한 세기에 걸친 장쉐량과 쑹메이링(宋美齡)의 인연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29쪽
필연은 없다. 우연이 거듭되면 그것이 바로 필연이다.
동북군벌 장쭤린은 톈진(天津)에 주둔하던 장남 장쉐량을 불러들였다.
“지금 중국은 외국 자본가들의 낙원이다. 코 큰 것들이나 원숭이 같은 것들에게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민심부터 얻어야 한다. 민심이 떠나면, 평소 가까웠던 외국 지도자들도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 때를 놓치지 마라.” 1925년 5월 31일, 장쉐량은 상하이의 전국학생총회 앞으로 위로 전문을 보냈다.
“노동자들을 지원하던 학생들이 영국 경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늘의 뜻(天道)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슬픔을 가눌 방법이 없다. 국력이 약한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져도 좋단 말인가! 내가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간 모아둔 봉급 2000원을 보낸다.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한기(寒氣)를 면하는 데 써 주기 바란다.”
이런 소문일수록 빨리 퍼지기 마련이다. 32쪽
‘민심을 얻어라’는 말,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진보정당들에게 되풀이 들려주고 싶다. 우리나라 진보정당들은 간종 종지만도 못한 울타리 안에서 자기네들끼리의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나는 본다).
인류가 생긴 이래, 트집 잡힐 거리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35~37쪽
그래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어떤 하나는 잘못했어도 다른 열 가지 백 가지를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장쉐량은 여자들 앞에서 잘난 척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본인은 잘 몰랐지만 엄청난 장점이었다. 이날도 쑹메이링에게 그간 여기저기 다니며 실수하고 망신당한 얘기만 늘어놨다. 쑹메이링은 연신 배꼽을 잡았다.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칵테일파티가 끝나자 3층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 쑹메이링은 장쉐량의 손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41쪽
잘난 척하지 않는 것은 굉장한 미덕이다. 굳이 여자 앞에서만 그럴 필요는 없겠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면 또한 엄청난 장점이다.
(장쉐량이 장제스에 대해서는) 평가도 인색했다.
“국가 지도자라는 게 남들이 보기엔 대단한 것 같아도 별게 아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된다. 나도 처음엔 장제스를 존경했지만 날이 갈수록 꼴도 보기 싫었다. 장제스는 인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항상 노예를 구하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노예에 대한 정의도 명쾌했다.
“노예는 말 잘 듣고, 윗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묘한 재주가 있는 부류들이다. 앞에서는 네, 네 하고 뒤에 가서 딴소리하기 일쑤다. 장제스는 어디서 찾아내는지, 그런 사람을 잘도 구해왔다.” 43쪽
나도 누군가에게 노예가 되기 위하여 애쓴 적은 없는가? 나도 주위에서 인간보다는 노예를 찾으려고 애썼던 적은 없는가?
장쭤린과 장쉐량 부자는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여자관계가 복잡했을 뿐, 엉뚱한 사람을 기용해 망신당한 적도 없고, 국민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도 않았다. 후세에 비장미와 즐거운 웃음거리를 선사했을지언정 조롱당할 짓은 하지 않았다. 신의를 제일로 쳤다. 한 번 한 약속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꼭 지켰다. 애국자인 것도 분명했다. 58쪽.
장작림과 장학량이 없었더라면 중국 현대사는 지금보다 훨씬 단조로워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쑹메이링을 만나고 온 위펑즈가 장쉐량에게 투덜댔다.
“…… 시아버지(장쭤린)는 더했다. 내가 물었더니 8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의형제가 뭐냐고 물었더니 결국은 의형제 맺었다는 것들끼리 죽기 살기로 싸우는 법이라며 씩 웃었다. 시아버지 말이 맞는 것 같다. 난징에 와보니 여자들도 보통이 아니다. 오늘 쑹메이링이 불쑥 의자매 맺자는 바람에 당황했다. ……얼떨결에 의자매와 의엄마까지 생겼다. 그 여자 너무 정치적이다.” 73쪽
결국 세상살이라는 것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들끼리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란다. 일면 이해가 되고 인정도 된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 50년 넘게 살면서 의형제 비슷하게 맺은 사람조차 한 한 명도 없으니.
인간은 지날 일들을 가공할 줄 안다. 없던 일들을 만들어내고, 엄연한 사실을 뭐가 뭔지 모르게 둔갑시키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다. 80쪽
인간은 만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요물이다.
잡교(雜交)를 거쳐 만들어진 동식물이 모본(母本)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낯선 문화나 사상과의 접촉도 마찬가지다. 혼혈아가 총명하고 예쁜 것처럼 견문 넓은 사람은 생김새도 다르다. 고집과 신념을 적절히 배합할 줄 알고, 말만 잘하는 엉터리들과 전문가를 식별하는 안목이 탁월하다. 가끔 괴상한 사고도 치지만 결국은 남이 상상도 못할 업적을 후세에 남긴다. …… 황푸군관학교는 연합과 잡교의 결정체였다. 공산당의 홍색(紅色)과 국민당의 남색(藍色), 군벌들의 회색(灰色)이 뒤섞여 만들어낸 금색(金色)과도 같았다. 91쪽
가끔 괴상한 사고도 치지만? 그러니까 사람이든 세상이든 옹졸하게 보아서는 되지 않을 일이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사람을 품는 품은 넉넉할수록 좋을 것이다.
천제루(陳潔如)는 ‘도박과 화류계에서 헤매는 사람’이라며 장제스를 싫어했다. 장제스를 총애하던 장징장은 천제루를 달랬다. “지금은 평화시대가 아니다. 장제스는 교양을 겸비한 불량배다. 난세에는 저런 사람이 큰일을 한다. 당장은 팔난봉꾼 소리를 듣지만 언젠가 엄청난 일을 할 테니 두고 봐라. 황제가 되고도 남을 재목감이다. 뭐를 줘도 아깝지 않다”며 천제루를 장제스의 방에 밀어넣었다. 103쪽
교양을 겸비한 불량배라~~ 정말 멋지다! 그런데 나는 교양을 겸비하지도 못했고 불량배가 되지도 못했다.
쑨원이 랴오중카이를 군관학교 당 대표에 임명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랴오중카이는 국민당 좌파의 실질적인 대표였다. 무기와 경비 등 소련의 지원이 절실한 때였다.
랴오중카이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연하의 장제스를 먼저 찾아와 머리를 숙였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만 구걸해오겠다. 집행은 네가 해라. 생도 교육에도 관여하지 않겠다. 네가 전담해라. 교관 선정도 네 몫이다. 나도 가끔 추천은 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네가 해라. 나는 서명만 하겠다.”
실제로 랴오중카이는 그렇게 했다. 광저우 자본가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굴욕을 감수했고, 아편에 취해 있는 시골 군벌 앞에 무릎을 끓고 무기와 탄약을 구걸해 장제스에게 갖다줬다. 생도들의 급식비를 위해 부인의 패물을 들고 전당포를 출입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05~106쪽
황포군관학교 국민당 대표는 아마 경남도민일보로 치자면 사장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조선일보 사장은 누리는 자리이겠지만 경남도민일보 사장은 달마다 직원들 월급 맞추느라 날마다 생똥 싸지 않을 수 없는 자리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상에서 입소문이 가장 빠른 나라가 중국이다. 국·공 양당이 합세해 군관학교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황푸로 가자!(到黃埔去)” 전국의 괴짜들이 황푸로 몰려들었다. 북양군벌 우페이푸가 ‘황푸군관학교 응시생은 발각 즉시 총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난세의 청년들이다 보니 열정이 대단했다. 자신과 조국의 미래, 심지어 민족의 미래가 양어깨에 달려 있다고 착각했다. ‘신해혁명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군벌들이 중국을 암흑세계로 몰아넣었다. 이들을 타도하지 않는 한 혁명은 요원하다’며 군벌들에게 모든 탓을 돌렸다. 108쪽
나도 착각한 적이 있었다. 나만이, 우리만이 진리의 담지자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바로 그 순간 진리는 나와 우리를 떠났었다. 진리가 내게도 우리에게도 조금은 있겠지만, 더 크고 더 많은 진리는 그 울타리 너머에 있었다.
임표(린뱌오). 나는 임표에 대해 국민학교 시절 동아일보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문화대혁명 시절 엄청난 우상숭배의 대상이었다.
쑨원과 줄다리기 끝에 군관학교 교장 자리를 꿰찬 장제스도 자신을 환골탈태시켰다. 일기에 금주(禁酒)·금연(禁煙)·금색(禁色)을 다짐했다. 금색은 실패했지만, 술과 담배는 죽는 날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111쪽
시대의 영웅 장개석이 이런 정도라면 나 같은 다른 보통 남자들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뭇 남자들에게 빠짐없이 장착된 누추하고 추잡한 성욕 덩어리들~~
“보르딘의 측근이었던 황푸 출신 공산당원 중에는 장제스가 아끼는 제자들이 많았다. 이 청년 장교들은 틈만 나면 장제스의 집을 출입했다. 장제스의 부인 천제루가 해주는 밥을 먹고 때로는 시장도 따라다녔다. 저우언라이는 천제루가 무거운 물건이라도 들고 가면 달려가곤 했다. 장제스 부부와 저우언라이가 풀밭에 나란히 앉아 얘기 나누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랬던 사람들이 훗날 사생결단을 벌였다. 정치가 뭐고, 권력이 뭔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도 현장에 있었지만 왜들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122쪽
‘그 때는 그런 시대였다’는 말을 나도 좀은 실감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때 정말 사소한 문제를 두고 사생결단을 했다. 사생결단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사생결단을 했다.
(후쭝난은) 중학교 졸업 후 간판만 학교지 학교 축에도 못 드는 소학교에서 국어와 역사·지리를 가르쳤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을 애들에게 가르치다 보니, 세상에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일기를 남긴 것을 보면 양심적인 교사였다. ‘나는 행운아였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회초리 맞으며 고문(古文)을 익혔다. 학생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덜기 위해 고문을 끼고 살았다. 천하대사가 이해되기 시작하자 어떤 부잣집 아들도 부럽지 않았다’는 일기도 남겼다.
…… 군관학교 학생모집 공고를 본 후쭝난은 교사 생활을 청산했다. 친구에게 ‘도둑놈들 소굴에서 벗어난 것 같다’는 편지를 남겼다. 129쪽
자기가 도둑놈 사기꾼인 줄 알면 그 사람은 대단하다. 나는 농부가 무척 좋은 직업이라고 가르쳤던 선생님을 한 분 안다. 그이는 어느 날 학생한테서 ‘그런데 선생님은 그 좋은 농부 안하고 왜 선생님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그이는 얼마 안가 교직을 그만두고 농사 지으러 갔다.
깨지지 않는 동업은 없다. 정당 간의 연합도 일종의 동업이다. 결국은 치고받고 하게 마련이다. 국·공 양당은 북벌과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두 차례 합작했다. 합작 동안 중공은 결별에 대비했다. 국민당 수뇌부에 우수한 첩자를 침투시켰다. 145쪽
사는 동안 죽는 데 대비해야 한다. 죽고 나서 죽음에 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8년에 걸친 항일전쟁 기간은 가관이었다. 말이 좋아 연합이지 잠복한 첩보원을 색출하는 데 기를 썼다. 수천 년간, 겉과 속이 달라야 사람 취급하던 민족이다 보니 피아를 식별하기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아이건 어른이건 무조건 처단했다. 국민당도 마찬가지고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제 명에 못 산 사람도 많고, 성공한 첩보원도 많았다. 슝샹후이는 학계와 군사정보 계통에서 공인한,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뛰어난 간첩이었다. 150쪽
겉과 속이 달라야 사람 취급을 받았단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 취급 받기 틀린 종자임이 틀림없다. 슬픈 일이다.
슝샹후이는 사교성이 부족했다. 먼저 나서거나 제 발로 사람을 찾아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요직을 맡으면 먼저 편지를 보냈다.
“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너와 연락을 안 하겠다. 단,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찾아라. 한밤중이라도 달려가겠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후, 덩샤오핑(鄧小平)과 예젠잉(葉劍英), 리셴녠(李先念) 등도 이런 편지를 받았다. 다들 슝샹후이의 처신과 의견을 존중했다. 153쪽
남의 곁을 탐내기는 어렵지 않다. 자기 곁을 내어주기는 쉽지가 않다.
린뱌오의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황푸 시절에 본 장제스는 군벌에 불과했다. 항상 군립하려고만 했지 교관과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화도 잘 내고 변덕도 심했다. 기분 내키면 잔정을 베풀었지만, 가끔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우리를 우롱했다. 그런 사람은 특징이 잇다. 큰 일을 이룬 듯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다.” 156쪽
임표는 장개석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다. 장개석이 일개 군벌에 불과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말하는 임표도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모택동 다음 가는 지위까지 누리고 우상숭배의 되었지만 1970년대 초반 어느 날 외국으로 달아나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죽었다.
“…… 황푸의 걸출한 인재들은 모두 공산당 쪽에 합세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 있는 너희들은 전부 무능한 놈들이다. 지치이후용(知恥以后勇), 부끄러운 걸 알면 용기가 생기는 법,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장제스의 훈시는 효과가 있었다. 국민당군도 도처에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뒀다. 163~165쪽
쪽팔리는 줄도 모르면 인간도 아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인간도 아닌 인간들이 너무 많다.
내가 잘 모르는 인물이지만 엄청난 고수임은 틀림없지 싶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부터 마오쩌둥을 싫어했다. 마오쩌둥이 황푸에 강연 올 때마다 ‘목욕도 안 하고 머리도 제대로 안 감는다. 옆에만 가면 냄새가 진동해서 머리가 아프다. 칫솔질도 안 하는 주제에 입에서 고전이 술술 나온다“며 무시했지만 현실은 존중했다. 8월 14일, 중공 측 대표로 충칭에 파견 나와 있던 저우언라이에게 통보했다.
”서북을 순시할 계획이다. 시안에서 마오쩌둥과 만나고 싶다.“ 175쪽
현실은 호오(好惡)와 애증(愛憎) 그 너머에 있다. 호오와 애증에 갇히면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개혁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개혁을 하려면 인간부터 개조시켜야 했다. 인간이 인간을 개조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인류 역사는 실패한 개혁자들만 양산했다. 243~244쪽
개혁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맞는 말이다.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씨부렁거림은 거짓말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접으면 그 사람은 거리낄 것이 없어질 것이다.
“푸이는 친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슬퍼하거나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한 방에 수용된 사람이 병으로 신음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수천 년간 중국인들은 황제라는 이상한 동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도 인정하지 않았다.” 244쪽
만주국 황제 부의는 허깨비이긴 하지만 권력자였다. 권력자는 인간이 아니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없는 괴물이다. 권력을 나누고 없애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좋은 일이다.
일본은 36년간 화교와 조선인을 이간시켰다. 특히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조선인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비겁하고, 야비하고, 지저분한 민족이 중국 민족’이라고 각인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식민지 교육의 귀재였던 시오하라(鹽原時三郞)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부임해 기획한 이 교육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골목에서 조선과 화교 청소년들이 조우하면 서로 조롱하고, 끝내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특히 화교 밀집지역이던 서울의 순화동 골목은 조용한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였다. 318쪽
지금 우리는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 우리끼리 서로 조롱하고 서로 멸시하고 서로 비방하고 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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