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번역원 누리집에 갔더니 <만기요람(萬機要覽)>이 우리말로 옮겨져 있었다. 말로만 듣고 실제로 보지는 못했던 터라서 반가웠다. 그리고 아무 조건없이 원문 이미지도 내려받을 수 있었다.
<만기요람>은 조선 순조 8년(1808년)께 호조판서 서영보와 부제학 심상규가 왕명을 받들어 편찬해 바친 책이라 한다. 국가 재정과 경제·군사 제도의 실정·운용에서 연혁에 이르기까지 전체 요점을 간추려 오만가지(萬機)를 몸소 처결하는 군주가 정무를 볼 때 곁에 두고 참고로 삼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이 <만기요람>에서 '재용(財用) 5 / 각전(各㕓)'을 보면 부록(附)으로 장시(場市=鄕市)가 있는데 여기에 마산포장(馬山浦場)이 나온다. 이 마산포장이 바로 지금의 마산어시장이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잘 나가는 시장이었던 것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지방(=향외鄕外)에서 장이 서는 날은 한 달에 여섯 번이다. 1·6일, 2·7일, 3·8일, 4·9일, 5·10일처럼 한다. 다만 송도(=개성)는 서울(시전?)과 같다.
경기도 102곳, 충청도 157곳, 강원도 68곳, 황해도 82곳, 전라도 214곳, 경상도 276곳, 평안도 134곳, 함경도 28곳이다. 함경도 길주(吉州) 북쪽 삼수갑산 일대에는 본래부터 장이 없고 살림집에서 일상으로 사고판다.
○ 경기의 광주 사평장·송파장·안성 읍내장·교하 공릉장, 충청도의 은진 강경장·직산 덕평장, 전라도의 전주 읍내장·남원 읍내장, 강원도의 평창 대화장, 황해도의 토산 비천장, 황주 읍내장, 봉산 은파장, 경상도의 창원 마산포장, 평안도의 박천 진두장, 함경도의 덕원 원산장이 가장 큰 장이다.”
마산포장 관련 기록.
여기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200년 전인 당시는 경상도에서 가장 큰 장이 마산포장=마산어시장이었다는 사실이다. 경상도는 경남뿐만 아니라 부산·울산·대구·경남·경북까지를 포함한다. 아울러 마산어시장이 역사가 만만찮게 오래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마산포장은 1760년 지금 마산 창동 자리에 조창이 들어서면서 생겨났을 것이다. 조창은 오늘날로 치면 세금창고다. 옛날에는 조세를 돈으로 바치지 않았다. 곡식이나 면포(綿布)나 특산물로 바쳤다. 마산에 들어선 조창이라서 마산창이라 일렀다.
마찬가지 <만기요람> 재용편 2에서 ‘조전(漕轉)’ 항목을 보면 마산창이 나와 있다. ‘조운선이 20척이 있고 창원·함안·칠원·진해(지금 창원 마산합포구 삼진지역)·거제·웅천(지금 창원 진해구)·의령동북면·고성동남면에서 여덟 지역에서 조세 물품을 거두어 모은다’고 되어 있다.
조세물품은 가을에 거두어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이듬해 봄철에 서울로 배로 실어갔다. 여덟 고을에서 거두었다니 정말 엄청난 규모였을 것이다. 또 이렇게 많은 물품이 오고갔으니 사람이 끓지 않을 수 없었겠다. 마산포장이 컸던 것은 이런 어마어마한 물품 왕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마산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고 창원이 마산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산이 아닌 ‘창원’의 마산포장이라 적혀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2010년 옛 마산과 옛 창원과 옛 진해가 하나로 합해져 통합 창원시가 되었을 때 잠깐 논란이 되기도 했었던 사안이다. 200년 전에 이미 창원이 큰 고을로 있었고 마산은 다만 창원의 일부였다는 얘기다.
마산창 관련 기록.
지역의 나누어짐과 합해짐은 변화무상하다. 창원 마산을 두고 보면 이렇다. 처음에는 탁순국(창원)과 골포국(마산)이 없어진 뒤 신라 지배 아래 굴자군으로 있었다. 이어 757년에 의안군(창원)과 합포현(마산)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에는 둘 다 김해(당시는 금주金州)에 소속되었다. 그러다 250년 넘게 세월이 흐른 1282년에 창원은 의창으로 마산은 회원으로 독립이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 이렇게 독립시킨 이유가 가소롭다. 1282년은 고려-몽골연합군이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한 직후다. 일본 정벌의 전진기지가 합포였다. 고려·몽골 군사 3만~4만이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 백성들이 개고생을 하게 되어 있다. 고려 전역의 백성들이 모두 개고생을 했지만 군사 주둔지인 마산·창원 일대 백성들은 더더욱 심하게 개고생을 했다. 살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야반도주를 하는 줄줄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토록 개고생을 시킨 대가로 의창과 회원을 금주에서 떼어내 별도 행정구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요즘 관점으로 보면 정말 개풀 뜯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 짓거리다.
조선 시대 들어 다시 합쳐서 창원으로 만들었다. 1408년 일이다. 의창에서 ‘창’을 따고 회원에서 ‘원’을 땃다. 이렇게 없어진 마산이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살아난 것은 500년이 지난 1914년이다.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창원에서 떼어 마산부로 삼았다. 흩어지고 합해지는 것이 이와 같았다.
옛 마산과 옛 진해와 옛 창원이 없어지고 새로 생겨난 통합 창원시가 옳다거나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좋은 점은 살리면 되고 나쁜 점은 줄이면 된다. 이런 따위는 계속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일희일비할 필요는 전혀 없다. 무엇이든 사람 하기에 달렸다.
창원 마산 지명 변화 얘기하다 보니 별 것을 다 입에 올리고 말았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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