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폭력성의 뿌리
어린 시절에 대한 나의 기억은 폭력과 동행하고 있다. 개인적인 폭력이 물론 많지만 집단적인 폭력도 있었다. 10대였던 70년대는 물론 20대였던 80년대도 한국 사회는 폭력이 지배했다.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폭력도 많았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짊어져야 했던 폭력도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하는 폭력은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경우였다.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당하는 폭력은 당연히 개인의 몫이었다. 군부독재정권에 대항했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도 어쩌면 개인의 몫이었다. 대항을 포기하면 폭력도 멈추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구성원이면 무조건 당해야 하는 폭력이 있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나라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냥 태어난다. 그 결과로 당해야 하는 폭력이었다. 부조리한 폭력이었다. 합당한 이유도 없이 가해지는 폭력이었다.
1982년 서울역의 그로테스크한 폭력
그런 가운데 하나를 나는 1982년 가을에 보고 또 겪었다. 나는 그 때 서울에서 한 대학에 다니는 1학년 학생이었다. 추석을 맞아 고향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려고 서울역에 갔었다. 인터넷이 없는 시대였고 전화로도 예매가 안 되어 직접 창구에 가서 기차표를 끊어야 했다.
표를 끊으려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또 지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 열망으로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다.(나중에 기차를 타 보니 완전 콩나물시루였고 선반 위에 올라간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 넓은 서울역광장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 넓은 서울역 광장에서 사람들은 행선지별로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서울역 당국은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두들겨서 앉혔다.
그렇게 하려고 동원한 물건이 기다란 대나무 바지랑대였다. 아마도 10m는 되어 보였는데 끝이 갈라진 바지랑대로 사람들 머리를 툭툭 때렸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 곧바로 그보다 더한 전두환이 집권해 있던 시기여서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렇게 내리치는 대나무 바지랑대를 제대로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없는 듯이 그대로 맞으면서 주저앉았다. 나도 그렇게 내려치는 대나무 바지랑대의 매질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지금도 내 머리 속에는 그 때 그 장면이 아주 그로테스크한 그림으로 고정되어 남아 있다.
영화 군함도에서 사람 줄세우는 폭력
이번에 영화 <군함도>에서 나는 그 원형을 보았다. 기차를 타는 장면이었는지 아니면 배를 타는 장면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조선 사람들이 흐트러져 있으니까 일본 군인들이 두들겨 패서 줄을 세우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1982년 내가 경험했던 그 그로테스크한 폭행의 뿌리를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보는 느낌이었다. 전두환 정권과 그 선배 되는 박정희 정권이 바로 저 일제강점기 일본 군인들의 행우지를 보고 배운 것이었구나!
군함도 입소 초입 일제의 폭력
또 하나. 조선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서 시모노세키에 한가득 내렸다. 그렇게 내린 조선 사람들을 다시 실은 배가 군함도에 닿았을 때였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 군인들에게 끄집어내려졌다. 일본 군인들은 끄집어내려진 조선 사람들을 차별없이 공평하게 제대로 두들겨팼다.
전두환 정권은 나를 실역미필자(實役未畢者)로 처리하였다. 1984년 병무청 신체검사에서는 현역 입영=실역 대상으로 판정받았다. 그러다 사소한 일로 1985년 7월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1986년 1월 징역 2년6개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서울형사지법에서 선고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군대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실역미필자 신세가 되었다. 실역 미필자는 3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식이었다. 일요일은 출근하지 않았고 반공일인 토요일은 4시간만 하고 일찍 퇴근을 하였다.
1986년 가을 서울 관악산 아래 있는 51사단이었다. 실역미필자는 국가보안법 위반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인범도 강간범도 강도범도 사기범도 있었다. 이런 험한 사람들을 훈련시키다 보니 그렇게 험하게 했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나는 그 훈련 첫 날을 잊지 못한다. 51사단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조교들은 우리더러 쪼그려 앉으라 했다. 그렇게 앉아서는 오리걸음으로 기어올라라 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면 조교들이 우르르 달려와 우격다짐을 했다.
일제와 군부독재의 소름끼치는 닮은꼴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오르막길이었고 24살 어린 나이였는데도 나는 버거웠다. 한참을 가다 보니 자세가 헐거워졌고 조교는 몽둥이로 머리를 두드렸다. 나는 얻어터질까봐 바짝 쫄았다. 실제로 오리걸음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두드려 패는 장면이 여기저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영화 <군함도>에서도 대부분 사람들이 그와 같은 몽둥이질에 노출되어 있다. 소지섭 선수가 나서서 용감하게 대드는 장면도 있었다. 이미 보아서 아는 그대로 소지섭 선수 대들었다가 무참하게 개피를 보았다.
51사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패느냐고 대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좀 더 매질을 당했다. 한 번만 더 대들면 퇴소 조치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했다.(나는 아니었지만 다들 집안 생계를 책임지는 대부분 생활인이었다. 이번에 퇴소당해 다음에 다시 오면 생활에 타격이 커지는 조건이었다.)
앞으로 계속될 폭압적인 상황을 고분고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초창기 그런 다짜고짜 무차별 폭행이 필요했다. 나는 군함도에서 두들겨 패서 줄을 세우는 장면, 군함도 탄광 입소 초입에 무차별 폭행으로 다잡는 장면을 보았다. 내가 겪었던 전두환 정권 시절이랑 다르지 않았다.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1945년 일제 강점에서 우리가 해방되었다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까지도 실은 일제 강점기였다. 왕보다 왕당파가 더 무섭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일제보다 친일파가 더 무섭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영화 <군함도>가 적어도 나에게는 한국 사회의 군사독재정권까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폭압 통치와 대한민국 군부독재정권의 강압 통치는 똑같이 끔찍했다. 그 닮은꼴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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