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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사저 뒷산에는 호미 든 부처님이 있다

김훤주 2008. 2. 2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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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새 터전이 관광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새로 터전을 잡은 경남 김해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이 뜨고 있다고 합니다. 2월 25일 퇴임하던 당일은 물론이고 26일과 27일에도 평일이지만 2000-3000명씩 사람들이 몰렸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추세가 앞으로 얼마나 갈는지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봉하(峰下)마을에 온 이들이 뒷산 봉우리에 걸음해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리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쉽습니다.

저야 자연인 또는 변호사 또는 대통령 노무현 그 어느것과도 관계 없지만, 봉하 마을 위에 있는 봉화산(烽火山)과는 몇 차례 인연이 있었습니다. 높이가 140미터 가량 된다는 이 봉화산에는 진짜로 보기 드문 불상이 둘(사실은 셋) 있습니다.

하나는 약물병과 함께 호미를 움켜 쥔 관세음보살님이고, 다른 하나는 가로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구체 모습은 아래 기사들을 보시면 대충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여섯 해 전, 제가 문화생활부 기자 노릇을 할 때 <문화재와 역사 한 토막>이라는 푯말로 나란히 썼던 것들입니다.

호미 든 관음상 -서로 다른 모습들, 시대의 반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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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자료 사진

2002년 8월 3일 토요일치 기사입니다. 조금 어색한 데만 조금 손질을 했습니다. 내용은 다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는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을 문화재라고 한다. 하지만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 보니 문화재와 비(非)문화재를 가르는 잣대 또한 아주 뚜렷하지는 않다.

시대의 특징과 역량이나 변화 조짐을 한 데 모아 잘 보여주는 물건이 문화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는데, 100년 뒤에 볼 때 문화재라는 이름에 걸맞을 ‘현대 작품’이 하나 있다. 김해 진영 본산리 봉화산 꼭대기의 ‘호미 든 관음상’이 바로 그것이다.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은 보통, 치켜든 왼손에 보리수 가지를 쥐고 오른손으로 약물병을 들고 있기가 십상이다. 그런데 이 보살은 보리수 가지가 꽂힌 약병은 왼손에 맡긴 채 오른손으로는 엉뚱하게도 호미를 들었다.

관음상(사진 오른쪽)은 외환위기 직후인 99년 10월에 세워졌다. 24자 높이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는데 잔잔하게 웃는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고 눈길은 지그시 아래를 향하고 있다. 옆에는 “재가 불자들이 50년간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탐진치(貪嗔痴 욕심 성냄 어리석음)를 뽑고 보리심(菩提心)을 심어 진리를 캐고자 호미 든 관음불상을 두 번에 걸쳐 모시고 불기 2646년 부처님 오신날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두 번에 걸쳐 모셨다고?’ 조금 아래에 비슷한 모습으로 호미를 들고 있던 관음상이 원래 모셨던 것인가 보다. 정상 관음상의 절반인 12자 크기인데 속 빈 소리가 나는 것으로 미뤄 인조유리로 만들지 않았나 짐작된다. 밑에는 “1959년 암울 황폐한 시기에 불교학도 31명이 세운 것으로 40년 세월 동안 낡아지는 바람에 새로 불사를 하던 중 공사 감독 이수영씨에게 관음보살이 네 차례나 현몽해 ‘나를 없애지 말라’고 해서 99년 10월 31일 여기 모셨다”는 안내판이 박혀 있다.

6·25전쟁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시기, 불교 안으로 봐도 대처승과 비구승으로 나뉘어 찢겨 싸우던 때에 호미로 밭을 갈고 불심도 심어 이 땅에 ‘불국정토’를 이루겠다는 원력으로 세운 것이 바로 ‘호미 든 관음상’인 셈이다.

100년 뒤의 미술사가들은 이 얘기에 덧붙여 두 관음상을 견줘보면서 “먼저보다 뒤에 만든 관음상이 얼굴의 둥글기와 웃는 표정에서 훨씬 풍만하고 부드러우며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 것은 자신감, 호미를 늘어뜨려 쥔 것은 안정감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 틀림없다.

눈길의 차이를 말할 때는, 관음상의 높이가 2배로 커진 것을 짚으면서 “참배객에 대한 배려에서 나왔겠지만, 개척할 것이 많고 황폐했던 50년대의 다급함과 나름대로 풍요를 이룬 90년대의 느긋함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덧붙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미술사가들이 통일신라 불상을 두고 전성기인 700년대는 풍만하고 여유 있고 균형이 잡힌 반면, 망해가는 800년대는 이지러지고 균형이 안 맞으며 야위었다는 식으로 ‘시대상 반영’을 말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봉화산 마애불 - 야트막한 야산에 가로누운 돌부처 

마찬가지 같은 해 6월 15일 토요일치 우리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원래 기사에 군더더기가 좀 있어 보여 좀 줄였습니다.(부끄럽지만, 취재가 부실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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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자료 사진

평범하지 않고 별나게 생긴 데서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는다. ‘왜 이럴까’ 하는 호기심은 상상력으로 이어지고 상상력은 호기심을 풀어주는 이야기를 만들어야만 작동을 멈춘다.

김해시 진영읍에 봉화산이 있다. 실제로는 들판 가운데 솟은 야트막한 야산인데, 중턱에 돌부처 하나가 가로누워 있다. 돌부처는 바위로 둘러싸여 있다. 아래 위 모두 집채보다 큰 바위가 급경사를 이루며 서 있고 둘레도 여러 바위들이 에워싸고 있다.

잘 생긴 미남 부처님이긴 하지만 퉁퉁한데다 비례균형이 안 맞아 고려 시대 부처로 짐작된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와불(臥佛)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위벽에 새겨져 있다가 떨어졌다고 본다. 왼손을 밑으로 내밀고 오른손은 배꼽에 갖다댄 석가모니 부처다. 처음에는 양옆에 협시보살을 거느린 본존불이었겠지만, 보살들은 땅에 묻혔는지 자취조차 없다.

마애불에는 전설이 있다. 구석진 곳에 바로 앉지도 못한 채 왜 이렇게 처박혀 있는지를 풀이해 주는 이야기다. 중국 당나라 황제에게 황후가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예쁘고 건강한 모습은 사라지고 메말라갔다. 한 청년이 밤마다 꿈에서 괴롭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명산대찰을 찾아 불공을 드렸는데 꿈에 스님이 나타나 황후를 괴롭히는 청년을 꾸짖고 남쪽 험한 산 속 바위틈에 넣어버렸다. <서유기>의 ‘손오공’과 닮은 꼴이다.

황제는 사람을 풀어 꿈에서 본 산과 바위를 찾도록 시켰다. 물론 중국에는 없었고 천신만고 끝에 신라 땅 김해 봉화산에서 청년을 닮은 석불(石佛)을 발견했는데 그 뒤로 황후는 되살아났고 청년은 지금도 바위 틈새에서 번뇌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돌부처가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까닭을 나름대로 풀이한 셈이지만 여기에는 사대주의가 서려 있다. 청년을 깎아내렸을 뿐 아니라 무대와 주인공을 모두 중국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지만, 상상력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아마 조선 시대 들어 형성됐을 이 전설을 기억하는 이가 이제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신 해방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얘기가 있다. 지금 나자빠져 있는 이 부처님이 벌떡 일어나면 통일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시대 상황과 정신이 어떠한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통일이 중요 과제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반갑고 사대주의를 떨친 점이 다행스럽다.

이밖에, 화포습지도 있습니다

2006년 뜨기 시작해 널리 알려진 화포습지도 봉화산 아래에서 비롯됩니다. 봉화산을 에돌아 너른 들판이 자랑거리인 한림면 소재지로 들어가면 멋진 이 습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발품을 팔지 않고는 이 멋짐을 절대 맛 볼 수 없습니다.

화포천 위쪽은 한 눈에도 아주 보기 좋습니다. 물줄기를 따라 낮게 엎드린 버들들이 있고 물길을 따라 물풀이 떠 있었다. 사람 손이 간 땅은 거뭇거뭇하지만 그렇지 않은 데는 갈대가 우거지게 들어서 있습니다. 새들이 한두 마리씩 날아오르고 습지 한가운데 깊숙한 데는 물이 고요히 고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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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천이 낙동강 본류랑 몸을 섞는 장면(경남도민일보 자료 사진)


 
낙동강 본류랑 화포천이 만나는 모정 배수장까지 한 바퀴 둘러보시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마산에서 기차 타고 밀양 쪽으로 가다 보면(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차창을 통해 화포습지를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를 취재하면서 만났던 김해 인제대학교 조경제 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는, "봄날 비온 다음에 찍은 사진을 동료들에게 보였더니 모두 깜짝 놀라더라. 그러면서 '김해에도 이런 멋진 데가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하더라." 하시기도 했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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