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우리나라선 불가능한 책-관저의 100시간

김훤주 2016. 3. 4. 10:02
반응형

‘관저의 100시간-후쿠시마 원전 사고, 재난에 대처하는 컨트롤 타워의 실상을 파헤친다’는 한 해 전인 2015년 3월 5일 우리말로 옮겨져 나온 책입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기무라 히데아키 기자가 2012년 6월 펴냈습니다.


관저는 일본 총리가 집무하는 공간을 말하고 100시간은 ‘거대지진이 발생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부터 정부와 도쿄전력의 사고대책통합본부가 생긴 직후인 15일 저녁까지’를 이릅니다. 당시 관저 주인은 ‘간 나오토’였습니다. 


읽다 보면 ‘관방부’ ‘관방장관’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아마 우리나라 대통령 중심 체제로 끼워맞추면 ‘대통령 비서실’ 또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비슷하지 싶습니다. 


뉴시스 사진.


여기 기록을 보면 사실로 믿기지 않습니다. 

“상황은 어때요?” 하고 묻는 데 대한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다시 얘기합니다. “뭐라도 확인되면 알려줘요.” 대답은 잘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보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휴대전화가 잘 연결되지 않았다는 하소연도 나옵니다. “휴대전화가 도통 안 터졌어요.” “회선이 폭주 상태였습니다.” 했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치안 대책상 위기관리센터에서는 ‘당연히’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게 돼 있었답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행정부 관료가 타령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유선화 시스템이 있어서 휴대전화를 회선 코드에 꽂으면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를 자기 자리의 전화로 연결시킬 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솟아나는 연기 또는 수증기. 뉴시스 사진.


원자력보안원장은 어처구니 없게도 원자력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간 총리는 데라사카(보안원장)에게 거듭 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들을 수는 없었다. 총리가 물었다. “자네, 기술에 대해 알고 말하는 건가?” 도쿄 대학 출신인 데라사카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경제학부 출신이라서…… 그래도 기본적인 내용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대화를 듣고 기록한 비서관의 메모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총리는 “자네 기술 모르지?”라고 지적한 뒤 “기술을 아는 놈으로 불러.”라고 지시함. 그 이후 (데라사카 원장이) 총리를 면담한 기억은 거의 없음. 


데라사카는 오후 7시 3분에 출범한 원자력재해대책본부의 사무국장이었다. 사무국장은 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요직이다. 이는 사무국을 맡은 보안원과 본부장인 총리 이하 관저 사이의 의사소통이 사태 발생 초기부터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뉴시스 사진.


‘관저의 100시간-후쿠시마 원전 사고, 재난에 대처하는 컨트롤 타워의 실상을 파헤친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핵발전소 폭발은 원자로를 못 쓰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녹아내린 틈새로 전문가와 관료들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드문드문, 조금만 옮겨봅니다.


사고 일곱 시간 뒤에도 도면이 없었다 


마다라메(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제일 중요한 원전 도면이 없었다. “원전 도면을 보관하는 일은 보안원 소관 아니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마다라메는 그 때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도면이 없으면 원전의 어디가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 정보가 없었다. 마다라메는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으려 노력했다. 후쿠시마제1원전에 몇 번이나 가본 경험이 있었다. 마다라메는 다케쿠로(도쿄전력 기술명예직 고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장을 그려내려 안간힘을 썼다. 


사무국 노릇을 해야 할 보안원은 “완전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위기관리와 관련해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은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다. 물론 이들의 의사결정은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 그런데 전문가라는 이들이 초기 단계에는 텔레비전 방송과 기억에 의지해 대책을 찾았던 것이다. 


필자(기무라)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텔레비전과 기억만으로 초기 대응책을 모색했다는 게 국민들 입장에서는 섬뜩한 일인데요.” 그(마다라메)의 대답은 이랬다. “정말 섬뜩한 일이지요.” 


뉴시스 사진.


발전차 수배까지 해야 했던 총리 


원자로 내부는 수증기가 차올라 압력이 치솟았다. 여기에 펌프로 물을 주입하려면 강력한 동력이 필요했다. “발전차가 있으면 냉각 기능은 복구됩니다.” 총리까지 발전차를 찾는 데 직접 나서서 집무실 큰 책상에 진을 치고 앉아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시모무라 심의관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일개 말단 직원이 할 일을 한 나라의 수장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나라꼴이 이게 뭔가 싶어서 오싹했습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시모무라가 쓴 ‘오싹했다’는 표현은 간 총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관료 조직을 향한 말이었다. 


발전차는 왔는데 케이블이 없다 


발전차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발전차에서 원전까지 연결할 케이블이 부족했다. 애써 조달한 발전차가 무용지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어떡하지?” 총리는 보안원·안전위원회·도쿄전력의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총리와 눈을 맞추지 못한 채 묵묵부답이었다. 


참지 못한 시모무라가 입을 뗐다. “발전기를 보내면 그걸 원전에 연결해야 된다는 얘기 정도는 미리 했어야죠.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다음, 그 다음을 전문가들이 예상해 줘야 해요. 뭐가 필요한지 아랫사람에게 확인하든지. 제발 무슨 말을 좀 해주세요.” 전문가들은 침묵을 지켰다. 


케이블이 왔는데 커넥터가 안 맞는다 


(관저) 5층에 있던 이토 위기관리감은 보안원인지 도쿄전력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발전차는 어떻게 됐어요? 후쿠시마 원전에 안 갔나요?” “가 있습니다. 도착하긴 했는데 발전차의 케이블 접속 부분이 맞지 않아 접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생해서 불렀는데 쓰지를 못하고 있어요.” “한 대도?” “한 대도 못 쓰고 있습니다.” “도쿄전력은 전기 회사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것 아니오?” 


책 나중 부분에는 이와 관련해 이런 얘기가 적혀 있습니다. 총리가 원자력 전문가인 대학 동기 시마다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입니다. 이른바 전문가라는 이들이, 도쿄전력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정신이 녹아내렸는지(MELT DOWN)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직류 배터리 전원을 후쿠시마 제2원전에서 옮겨왔기 때문에 커넥터가 맞지 않아 연결에 실패한 이야기도 나왔다. “어차피 플러스·마이너스뿐이니 커넥터를 떼어내고 연결하면 됐을 텐데…….” 시마다는 탄식했다. 


“40년이나 사용하면 온갖 문제가 생겨. 사실 설계 수명이 지나 폐쇄해야 하는데 ‘아직 쓸 수 있다’, ‘괜찮다.’ 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 아니겠나. 그게 첫 번째 문제일지도 모르지. 서둘러 폐쇄하는 방향이 옳아.” 


뉴시스 사진.


멘탈 멜트다운의 전형 도쿄전력 부사장 


마중을 나온 도쿄전력의 무토 사카에 부사장, 이케다 현지대책본부장이 버스에 동승했다. 총리는 전방 창가 자리에, 그 옆자리에는 무토가 앉았다. 총리는 무토에게 물었다. “벤트(원자로 압력을 낮추기 위한 작업)는 왜 못하고 있나?” “서두르란 말이야!” “됐으니까 서둘러!” 


뒷좌석에 앉은 데라타 총리보좌관이 놀랄 정도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무토가 뭐라고 대답했다. 데라타는 “워낙 작은 소리여서 속삭이는 소리밖에 못 들었어요.”라고 했다. 간 총리도 당시 무토의 대답을 “모기 소리였지.”라고 회상한 바 있다. “벤트를 안 하면 나라가 위험한 때에 당사자인 도쿄전력이 미적지근한 소리를 했으니 큰 소리를 낼 만하지.” 


총리가 아직 상공에 있던 오전 6시 50분, 가이에다는 원자로등규제법에 따라 1호기와 2호기의 벤트를 실시하라고 요구하는 명령을 내렸다. 벤트를 왜 못했을까? 관저에는 그 이유가 보고되지 않았다. 


오전 7시 19분, 총리 일행이 탄 대형버스가 현지대책본부가 설치된 면진중요동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던 총리는 한순간 숨을 죽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무토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안달이 난 총리는 “어서 설명 안 하고 뭐 하나?”라고 재촉했다. 무토는 대답도 하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폭발 한 시간 뒤에도 ‘들은 바 없다’ 


총리는 집무실로 부른 도쿄전력의 다케쿠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다케쿠로는 말했다. “들은 바 없습니다. 본사에 물어보겠습니다.” 다케쿠로는 도쿄전력 본사 측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아보았다. 통화가 끝나자 다케쿠로는 “본사에 전화해 봤습니다만,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없다고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그 때였다. 오후 4시 49분 닛폰TV가 전국 방송으로 폭발 영상을 내보냈다. (지역 채널인) 후쿠시마 중앙TV가 잡아낸 영상이 (중앙 채널인) 닛폰TV 계열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으로 방송된 것이었다. 우연히 채널이 닛폰TV로 맞춰져 있던 집무실 텔레비전에 그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보시는 영상은 3시 36분경의 후쿠시마 제1원전의 모습입니다. 음…… 수증기로 생각되는 물질이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왔습니다.(방송 멘트) 


“전국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폭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정작 관저가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던 거예요. 이렇게 순서가 뒤바뀔 수 있나…….” 


뉴시스 사진.


폭발 직전인데도 이문 따지는 원자력 사람들 


간 총리의 대학 동기 가운데는 히비노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호쿠리쿠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의 부총장이 당시 직책이었습니다. 원자력 전문가는 아니고 컴퓨터 전문가였습니다. 히비노는 총리에게 원자로 냉각을 위해 바닷물(해수)를 집어넣는 방안을 권유합니다만, 이른바 전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을 하지 못합니다. 


간 총리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구키타 위원장 대리, 히라오카 보안원 차장, 도쿄전력의 가와마타를 집무실로 호출했다. 먼저 원자로에 해수를 주입해 냉각시키는 방법에 관해 논의했다. 세 사람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리스크는 없습니다. 나트륨 이온이 존재한다고 새로운 핵반응이 촉진되거나 예기치 못한 반응이 일어날 우려는 전혀 없습니다.” 히비노가 물었다. “그렇다면 (해수 주입은) 원자로를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것만이 유일한 리스크군요.” 세 사람은 다른 의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가와마타에게 왜 지금 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온도와 압력이 올라갔을 때 벤트를 실시해야 많은 에너지를 밖으로 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써야 합니다.” 전문가가 그렇게 설명하니 어딘지 꺼림칙한 면도 있었지만 반론도 못하고 납득했다. 


(히비노 다음에 총리가 불러 만난 총리의 대학 동기) 시마다(원자력 전문가)는 “도쿄전력 입장에서는 해수 주입을 결심하기가 어려울 거야. 해수 주입은 원자로 폐로를 의미하니 경영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나? 총리가 결심해야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네.”라고 답했다. 


뉴시스 사진.


‘폭발 안 한다’ 엉터리 예측한 전문가 


<총리의 지시로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다라메 원자력안전위원장이 플랜트 구조를 설명할 때였습니다. 총리가 “여기 수소는 없는가?”, “폭발할 기체는 없는가?” 등을 물었습니다. 마다라메 위원장이 “그런 일은 없습니다.”, “수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11일 저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폭발은 일어났다. 


‘관저의 100시간’에는 이밖에도 하늘이 놀라고 땅이 꿈쩍거릴 그런 일들이 많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 내용은 몸소 한 번 읽어봐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어설프게 옮기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생생할 것 같거든요. 


이런 취재를 대통령과 청와대가 허용할까?


저는 이번에 ‘관저의 100시간’을 보면서 다른 두 가지가 더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을 펴내는 일이 가능할는지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도 핵발전소가 폭발하면 일본과 같은 꼴을 겪을 수밖에 없는지 하는 것입니다. 


책을 펴낸 이는 일본 <아사히신문>의 기무라 히데아키 기자임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기무라 기자는 2011년 10월 중순 이와 관련된 취재를 시작해 <아사히신문> 조간 ‘프로메테우스의 덫’이라는 꼭지에서 연재를 이어갔습니다. 


아울러 단행본 출판을 위한 글을 “바탕에는 사고를 일으킨 전력자본과 이를 허락한 정치와 행정, 전문가들, 그리고 내가 몸담은 저널리즘에 대한 강렬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음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고 마무리한 날짜는 2012년 6월 16일입니다. 


2011년 3월 11일 사고가 터지고 나서 여섯 달이 갓 지난 시점에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섯 달 안팎이 지나 신문 연재가 끝났습니다. 이어지는 단행본 출판은 거의 비슷한 시기인 이듬해 6월이었습니다. 후쿠시마 참사로부터 1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구실로 펜을 들어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전할 수 없다. 분노를 세상에 알리고 오래 남기는 것은 냉철한 펜이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나는 해보려 한다. 이 책은 한 저널리스크가 터벅터벅 발로 이루어낸 사고조사 검증보고서다. 논평과 추측은 배제했다. 나는 오로지 팩트로 말하겠다. 


이 대목에서 저는 온몸이 저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을 엄두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어쩌면 저널리즘 자체가 조중동이나 종편(이를 두고 저널리즘이라 할 수 있는지도 미심쩍기는 하지만) 같은 일부에서 방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국가 기밀 유출이라거나 사생활 침해라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나 국론 분열을 조장한다거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다거나 하는 논리를 자기네 매체를 통해 퍼뜨리면서 가로막을 개연성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 걸림돌은 우리나라에 굳세찬 저널리스트가 한 명만 있어도 충분히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지진 발생 직후부터 간 나오토 총리가 관저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 결단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는 작업에 어떤 보도기관도 손대려 하지 않았다. ……관저에 대해 아무도 쓰지 않으면 내가 쓰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마음 먹는 저널리스트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자를 조직의 힘으로 뒷받침해주는 보도매체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하다하다 못하면 시민사회가 모금-펀딩을 해서라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행정조직과 정치권력의 장벽을 넘거나 부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취재의 으뜸 걸림돌은 바로 대통령과 청와대입니다. 대통령은 얼굴 보기조차 봉건 왕조시대 임금보다 더하고 청와대는 찾아가기가 그런 임금의 구중궁궐보다 더합니다. 


관저에 대해 쓴다면 최고 권력자였던 간 전 총리를 취재하는 것은 필수다. 관저의 초동 대응을 쓴다면 ‘관저의 주인’이자 원전 사고 대응을 지휘한 그를 빼놓고 기사 자체가 성립될 리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 이어진 사태들에서 대통령과 청와대가 어떻게 굴었는지를 보건대, 이런 짐작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대응한 간 나오토 총리와 달리, (박근혜 대통령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취재에 나서지 못하는(또는 안하는) 다른 이유가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관료와 전문가는 일본과 다를까?



두 번째 생각-우리나라도 핵발전소가 폭발하면 일본과 같은 꼴을 겪을 수밖에 없는지 여부에 대한 해답은 뜻밖으로 손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관저의 100시간 ‘한국어판 추천사’ 끄트머리에 있었습니다. 


“만약 불행히도 일본에서 다시 원전 사고가 발생한다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방사능이 위험물질인 한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 이 문장에서 ‘다시’를 지우고 ‘일본’ 대신 ‘한국’을 넣으면 바로 모범 답안이 될 것 같습니다. 


“인간 사회는 절대 원전 사고에 대응할 수 없다. 그저 농락당할 뿐이라는 교훈은, 앞서 체르노빌 사고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세계 각국은 이번 사고가 자신을 향한 경고일 수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은 채 냉담했다. 사고를 통해 일본 원전 관계자들의 수준이 낮다는 사실은 드러났다. 하지만 과연 다른 나라였다면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하나 더 얘기해 놓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번역입니다. 정문주라는 사람이 우리글로 옮겼는데요, 글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으나 일본 원문 내용에는 아주 충실한 것 같습니다. 짐작건대 그이가 윤문(潤文)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매끄럽게 윤문하고픈 마음을 꾹꾹 눌렀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팩트의 전달에는 옮기는 이의 윤문보다는 원작자의 투박함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오역으로 여겨질 만한 대목도 보이지 않고 오자·탈자가 난 부분도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