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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조선 세조와 박정희·전두환 치하-‘사림열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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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들은 조선 시대 이름난 선비들을 조금씩은 알고 또 그 말과 행동과 생각도 단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에 대해 세조가 단종의 임금 자리를 빼앗았음을 빗댄 내용으로만 알고 그 ‘조의제문’을 김종직 제자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넣은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발각되는 바람에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정도로 압니다. 


그 창작과 사초 편입이 얼마나 살 떨리는 일이었는지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저도 물론 그랬습니다.) 물론 사실 일반인이 이런 정도 알고 있고 또 말한다면 참 대단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림열전 2 순례자의 노래>는 이런 상식 또는 지식도 일구는 한편으로 당대 역사 속에서 그런 지식 또는 상식을 살필 수 있도록 지평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 선비들의 이런저런 행적을 두고 그 선비가 갖고 있는 성향이나 타고난 성품 때문으로 여기고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이를테면 생육신 김시습이 훈구대신 한명회 앞에서 거름더미 속으로 들어갔다든지 하는.) 



<사림열전 2 순례자의 노래>는 그런 선비들의 행적에 뼈대를 입혀주고 살점을 붙여주며 피도 돌게 하고 숨까지 불어넣습니다. 당대에서 이탈이 돼 있어 박제처럼 취급되던 사실들을 다시 당대 역사 속에서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생생하게 꿈틀대는 현실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김종직(1431~92)·김시습(1435∼93)·남효온(1454∼92)·정여창(1450∼1504)·김일손(1464~98)·김굉필(1454~1504) 여섯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임금은 이렇습니다. 권력의 중심, 핵심이지요. 세종(1418~50), 문종(1450~52), 단종(1452~55), 세조(1455~68), 예종(1468~69), 성종(1469~94), 연산군(1494~1506). 


문종·세조는 세종의 아들이고 세조가 쿠데타로 임금 자리를 뺏은 단종은 세종의 손자입니다. 그리고 예종은 세조의 아들, 성종은 세조의 손자,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치세는 달리 말하자면 대를 이은 쿠데타 정권이 되는 셈입니다. 


단종을 몰아내는 쿠데타에 가담해 권력을 누린 집단을 일러 훈구파라고 하지요. 그렇지 않고 벼슬살이에 나가지 않았던(못했던) 집단은 사림파라고 합니다.(물론 후대에 붙은 이름이겠습니다만) 쿠데타 정권=훈구파는 세조의 쿠데타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조의 쿠데타는 왕조 시대 그 계급사회에서도 정의가 아닌 불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선비(=사림士林)라면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림열전 2 순례자의 노래>는 거기 실린 여섯 인물이 어떤 처지에서 어떤 방식으로 비판을 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그런 비판은 대부분 기록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비판을 하려면 무엇을 담보로 잡혀야 했는지, 그에 걸맞은 담보를 잡힐 수 없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 또 그것을 가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림은 혁명을 할 수 없었나 봅니다. 조선 왕조 또는 세조를 엎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살아남아야 하기도 했었습니다. 살아남기와 비판하기 사이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5.16쿠데타의 장본인 박정희, 그리고 12.12쿠데타의 장본인 전두환과 그에 뒤이은 노태우 시절로 장면을 바꿔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절에 정의를 생각하고 시대를 고민하면서 살아내고 견뎌내야 했던 지식인들과, 1400년대 단종 폐위 이후 쿠데타 정권을 살아낸 김종직·김시습·남효온·정여창·김일손 등등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요. 


자기자신의 역량과 처지를 타산하면서 역사가 떠맡긴 책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합당할지 고민하고 그에 따라 살얼음 같은 현실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는 모습이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 읽고 나서, 드문드문 옮겨 적어봅니다. 

“한길을 같이 가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향한 투쟁과 미래를 위한 성찰에서는 뜻을 같이하였다. 더구나 서로의 갈라섬과 엇갈림조차도 거짓과 욕망을 잉태한 시대의 아픔을 마감하려는 나름의 선택이었다. 또한 이들의 도전과 좌절, 그들의 아픔과 죽음이 있었기에 다음 세대의 길이 열렸음도 자명하다.”(29쪽) 


김종직을 두고서는 이렇게들 적었습니다. “김종직이 권력집단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였고, 자신의 몫을 어디에서 찾았으며, 내일을 위하여 어떤 구실을 자임하였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 기량과 처신은 독특하였고, 문장과 언행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었다. 그래도 한마디 보탠다면, 자신이 의도하였던 아니건, 김종직은 공포와 쇠락의 시대에 대항하는 문학의 전형적 역할을 보여주었고, 학문권력을 뒤흔들어놓았으며, 어두운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려는 의식전환의 현장에 귀중한 씨앗을 뿌렸다는 사실이다.”(33쪽)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 김종직이 다섯 살 짜리 셋째아들을 잃고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애절하지요. 함양초교에 있습니다.


“<조의제문>은 어느 한 구석에도 ‘항우는 세조이며 의제는 단종이다’는 암시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정축년 시월’ 즉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하직한 달에 지었음을 생각하면 의미는 판연히 달라진다. 


…… 풍자가 아니면 문학의 구실을 찾기 어려운 공포와 쇠락의 시절,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소재를 생동감 있게 구사하며 현실을 은유한 <조의제문>은 어느 작품보다 숨김과 들춤이 강렬한 최고의 비판문학인 것이다.” 


김종직을 모시는 예림서원. 밀양에 있는데요, 아주 그럴 듯합니다.


“신숙주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나갈 때도 ‘모친을 위하여 작은 고을 수령이 되니 닭갈비에 소 잡는 칼을 쓰는구나’ 하며 위로하였는데, 김종직의 ‘신상공(申相公)에 받들어 화답하다’는 이때의 답이었다. …… 주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오직 북두성이 높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숙주를 북두성에 비견한 것이다. 실제로 김종직은 신숙주의 경륜에 감탄하였었다.”(53~54쪽) 


“김종직은 제자들이 과거에 급제할 것을 갈망하였다. …… 김종직이 과거 합격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문벌이 빈약한 지방사족이 효도하고 출세하는 데 달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제자가 과거에 뜻이 없거나 포기하면 무척 서운해하였다.”(63~64쪽) 


“제자인 표연말도 김종직을 위한 ‘행장’에서 적었다. ‘조정에서 큰 의론을 세우지 못하고 큰 정책을 진술하지 못하였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일부 제자들은 스승이 시류에 안주하지 않는가, 의심을 품었고 일부는 직접 비판하였다. 


……김종직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건의하는 바가 없었을까? 이이가 전하는 일화가 있다. 김종직이 조용히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의 얼굴빛이 변하자 다시 간절하게 ‘만일 변이 있으면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말하니 그때 비로소 풀어졌다. 


만약 김종직이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말하였다면 세조의 공신과 그 후예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있던 시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독대에서나 가능하였을 발언이다. 그렇다면 김종직은 ‘아아, 아직 때가 아니구나’ 하며 더욱 몸을 사렸을 것인데, 이이가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니 아쉬울 뿐이다.”(78~79쪽) 


“김종직은 어두운 과거를 치유하려는 구체적 노력, 과감한 정책대안이나 정치구상, 자아확립을 위한 철학적 성찰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해박한 경학과 역사학을 오직 국가적 편찬사업이나 2000수가 넘는 시문에 발휘하였을 따름이다. 


……왜 행동이 없었고 성찰의 궤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이것은 개인적 능력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과 세대교체에 따라 다음 세대가 감당할 몫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김종직의 문인이 해냈다. 


……이런 점에서 김종직은 창업과 수성 단계의 국가적 성취가 사회적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하던 시기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기득권 세력과 비판적 도전세력을 가르는 경계선에 있었다. 그러나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있었다.”(92쪽) 


저는 김종직에 대한 이런 서술을 읽으면서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바로 오늘날 일인 듯이 아주 실감이 났습니다. 물론 이밖에 김시습·남효온·정여창·김일손·김굉필에 대한 기록과 서술도 나름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김종직을 이렇게 옮겨 적는 것만으로 끝내겠습니다. 대신에, 몸소 마음을 내어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합니다. 하나 더 일러드리자면, 이 여섯 인물 가운데 가장 끌리는 존재는 김일손이었습니다. 


머리도 아주 뛰어난 것 같았으며 사람을 사귀려고 넘나듦에서는 얽매임이 없었으며 일을 하는 데에서는 또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능지처참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였습니다. 호는 탁영(濯纓). 중국 굴원 어부사(漁父詞)에 나오는 표현인데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纓)을 씻고(濯), 흐리면 발(足)이나 씻으려니(濯) 합니다. 김일손은 결국 갓끈을 씻을 만큼 맑은 물은 만나지 못한 셈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맑은 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아침이슬. 이종범. 439쪽. 1만5000원.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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