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나무의 힘 대중의 힘 아줌마의 힘

김훤주 2008. 7. 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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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무의 힘

서너 해 전만 해도 저는, 이른 봄철에 나무가 있는 힘껏 물을 빨아들이는 것만 생명력의 작용이라 여기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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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물을 지나치게 빨아올린 나무의 가지.

꽃이나 잎의 싹을 틔워 밖으로 피어나아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요. 저는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마흔 둘인가 셋인가가 되는 해 가을철 어느 날 문득, 밖으로 피어나(게 하)는 힘만 생명력이라 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가을이면 활엽수들은 겨울을 앞두고 달고 있던 잎사귀들을 죄다 떨굽니다. 잎을 제 몸에 달아두려면 신진대사를 그에 걸맞게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신진대사를 많이 한다는 것은 물 또한 그만큼 많이 머금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추운 겨울에 그렇게 하고 있다가는 얼어 터져 죽어나자빠지기 십상이겠지요.

저는 이 대목에서,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고는 조금만 물을 머금는 그것도 다름 아닌 생명력으로부터 말미암은 바로구나 여기게 됐습니다.

자기를 밖으로 피어나게 하는 작용뿐만 아니라 안으로 갈무리해 넣는 일 또한, 생명 유지를 위한 생명체의 작용이라는, 조그맣고 때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2. 대중의 힘

저는 이번에 사람들한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5일 저녁 창원 용호동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였습니다.

사회 보던 사람이 스물두 번째 창원 촛불집회라고 되풀이 말했는데 이날 9시 넘어 행사를 마치고 나서 앞에서 이끌던 이들이 창원KBS까지 행진을 하자고 했습니다.

행진을 시작할 때 대열은 상당히 길었습니다. 제가 몸이 몹시 힘들었던지라 일일이 헤어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400명은 웃돌았습니다.

코스가 이상했습니다. ㅁ자 모양이라 치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위 중간까지 곧장 가면 되는데 왼쪽 위에서 아래로 갔다가 다시 거기에서 오른쪽 아래를 거쳐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끄는 이들이 욕심을 좀 부린 모양입니다. 전에도 창원KBS까지 행진을 한 적이 한 번 있는데 그 때는 ㅁ자의 왼쪽 위에서 오른쪽 위 중간까지 바로 질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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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들고 이날 촛불집회에 참가한 우리 지부. 김주완 선배 사진.

저는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좀 모여 놓으니 중심가를 가로세로 지르면서 시위(示威)를 하고 싶은가보구나. 좀 피곤하게 생겼군.’

그런데,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중간쯤에 이르러 둘러보니 대열이 형편없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사람이 적었고, 뒤에는 아예 없다시피 했습니다.

오른쪽 위 꼭지점에서 다시 왼쪽으로 중간쯤 가야 창원KBS가 나오는데, 이 목적지에 모여서 보니 채 100명도 되지 않는 정도로 제 눈에 비쳤습니다.

전에는 이럴 때 마무리가 초라해진 데 대해서만 아쉬워했습니다. 이날은 좀 달랐습니다. 행진을 앞에서 이끈 이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예전과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이런 느낌은, 언제나 문득 또는 갑자기 찾아오는데, 그것은 바로 “아하, 이것도 바로 대중의 힘, 대중의 능력이구나.”였습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나름대로 장했던 행진 대열을, 잠깐 숨 돌리고 돌아보는 그야말로 ‘순식간’(瞬息間)에, 아주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힘, 능력 말입니다.

3. 촛불‘들’ 의 힘

처음 예상한 거리보다 길어지니까 도중에 흩어졌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전에 한 번 목적지로 삼은 적이 있다는 상남동 분수광장을 지나면서 대열이 더욱 크게 줄었습니다.

저도 대중 자체이긴 합니다만, 대중에게 버림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대중의 정서를 제대로 알아내는 능력을 갖춰야 함을 이번에 눈치를 채고 말았습니다.

대열을 성대하게 만드는 주체도 대중이고 행진을 초라하게 만들 수 있는 주체도 대중이다, 앞선 이를 따르는 힘도 대중에게 있고 앞선 이를 버리는 힘도 대중에게 있다…….

촛불집회를 이끄는 이들이 있어서, 그이들이 다음에도 이번처럼 대중을 충분히 중시하지 못한다면 좀더 확실한 방법으로 버림받지 않을까 여겨졌습니다.

4. 아줌마의 힘

대열에는 또 다른 대중도 있었습니다. 제게 상당히 큰 충격을 줬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서너 살짜리 아이를 업고(때로는 걸리기도 했겠지요) 그 먼 길을 함께 걸은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습니다. 업은 아이 엉덩이 즈음에서 힘겹게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이, 곧 풀어질 것처럼 헐거워져 있었습니다.

안쓰러웠습니다. 저토록 버티어내는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누가 됐든 저런 아주머니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촛불은 쉬 꺼지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해산해서 돌아갈 때 무심한 듯이 눈길을 던졌습니다. 아이를 걸려서 건널목을 건너는데, 아이는 별로 지치지 않은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어깨가 축 늘어진 품이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얼굴은 밝았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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