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은 11월 24일~12월 18일 열일곱 차례 진행됐습니다. 경남도교육청이 지원한 이번 탐방은 자기 고장 둘러보기와 이웃 고장 둘러보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라 사랑은 아무래도 추상적이지요. 그런 나라에 구체성을 심어주는 단위가 고장입니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고장의 자연·역사·문화·인물을 알고 느끼는 가운데 일어나는 감흥이 나라 사랑 첫걸음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행정구역으로 나눌 필요는 없겠습니다. 경남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공통된 삶의 기반이 있고 또 거기서 동질감도 생기는 것이니까요. 이런 차이는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고장은 상대적으로 익숙합니다. 이웃 고장은 아무래도 조금 낯이 섭니다.
그래서 자기 고장 탐방에서는 충분히 가치롭고 아름다우면서도 덜 알려진 데를 찾았습니다. 이웃 고장 탐방은 이미 유명해져 있는지 여부를 떠나 해당 고장의 특징이 제대로 나타나는 장소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고장 탐방은 11월 24일 김해 경원고(율하유적공원~화포천~봉하마을~분성산성~김해향교), 27일 남해정보산업고(금산 보리암·부소암~남해향교~이순신영상관~이락사~남해유배문학관~정지석탑)와 하동고(하동읍성~쌍계사~범왕리푸조나무~세이암~조씨고가~최참판댁),
28일 창녕 영산고(관룡사·용선대~옥천사지~신씨고가·영산향교~창녕지석묘~망우정~술정리동삼층석탑)와 통영 동원고(서포루~통제영~문화동 벅수~삼덕항 일대~당포성지~박경리기념관)였습니다.
12월에는 2일 창원 마산고(창원향토자료전시관~동판저수지~웅천읍성~창동·오동동 근대역사유적)와 합천 삼가고(영암사지~뇌룡정·용암서원~삼가장터 삼일만세운동기념탑~월광사지삼층석탑~옥전고분군·합천박물관)(삼가고는 15일 두 모둠이 더 나섰습니다),
5일 고성 철성고(마암면석마~옥천사~학동마을 옛담장~상족암~고성박물관), 9일 밀양 밀성고(삼랑진역급수탑~작원관~수산제 수문~예림서원~월연대~밀양박물관), 12일 진주 진양고(청곡사~문산성당~진주역차량정비고~진주교회~진주상무사~옥봉경로당~형평운동기념탑~진주향교~진주성·국립진주박물관)였습니다.
◇수로왕 이전 사람들 - 김해
김해는 가락국과 수로왕·허왕후가 너무 많이 알려져 있어 안타깝게도 다른 역사·문화가 묻히고 맙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가 율하리 고인돌 유적입니다. 바로 옆 관동리 고대 항구 유적도 세계적으로 드문 유적이지만 눈에 담을 거리가 적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고인돌은 봉분이 두두룩한 가야 고분 이전 청동기 시대 것이랍니다. 율하리 유적공원에는 이런 고인돌이 크고 작은 그대로 널려 있습니다. 학생들은 고인돌이라 하면 커다란 덮개돌만 떠올립니다.
무덤 실제 내용물은 아래에 들었는데, 당시 어떻게 시신 따위를 묻고 무덤을 만들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가 율하리입니다. 학생들은 김해에 이런 데가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교과서로만 알았던 고인돌을 눈으로 보고 눈으로 만졌습니다.
봉하마을 가까운 화포천 습지생태공원도 거닐었는데, 수능시험을 마친 아이들이 해방감을 누리기 딱 알맞았습니다. 가까이 있지만 늘상 바라보기만 했던 분성산성에 올라서는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고쳐 쌓은 전통 산성이라는 사실도 새로이 알았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미 왜구를 무찔렀던 역사 - 남해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는 남해에서 벌어졌습니다. 명량해전. 1598년 11월 순천 왜적이 사천 왜적과 합쳐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해 관음포 앞바다로 나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기서 진린 도독의 명나라 수군과 함께 퇴로를 끊었고, 밤새 싸운 끝에 크게 이겼으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순신(李) 장군이 떨어진(落) 자리에 세운 사당(祀) 이락사에서는 숨진 이순신 장군이 처음 뭍으로 올라온 데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해질 녘 여기 서면 바다에 비치는 노을이 핏빛입니다.
일점선도(一点仙島) 남해에서 귀양살이했던 이들의 유배문학을 갈무리한 남해유배문학관을 들른 다음 마지막으로 정지석탑을 찾았습니다. 탐방에 나선 남해정보고가 자리잡은 고현면 탑동에 있지만 석탑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고려 명장 정지장군이 1383년 관음포 앞바다에서 화포를 실전에 처음 적용해 왜구 2500명 가량을 바다에 장사지내는 대승(관음포대첩)을 거뒀고요 남해 사람들은 고맙다는 마음으로 정지석탑을 세웠습니다. 자연석 위에 5층으로 올린 수더분함에 당시 백성들 심정이 잘 표현돼 있다고 하겠습니다.
◇새 명소 하동읍성과 최치원 전설 - 하동
졸업하면 대부분 고장을 떠날 아이들을 위해 하동 멋진 데를 한 번 더 돌아봐도 좋지만, 굳이 하동읍성을 찾은 데는 여태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정이 작용했습니다.
아직 발굴도 끝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틀림없이 새로운 명소가 되지 싶었습니다. 다른 보통 읍성과 달리 산꼭대기에 있는데, 성곽은 풍경과 잘 어울리면서 허물어지지도 않았고, 안팎에 남아 있는 살림집과 밭도 보기 좋습니다.
신라 슈퍼스타 고운 최치원 관련 전설이 하동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최치원이 문장을 지은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때문일까요? 양보면 운암영당 최치원 영정 때문일까요? 아무래도 지리산이 깊고 크고 아름답기 때문이겠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최치원은 지리산이 아니라 가야산 해인사에서 삶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하동에는 최치원이 지리산 신선이 되기 전에 속세서 들은 모든 얘기를 털어내려고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도 있고 맞은편에는 최치원이 꽂은 지팡이에서 싹이 자랐다는 푸조나무도 한 그루 자라나 있습니다.
최치원은 자기 깜냥에 걸맞게 포부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당나라서는 외국인이었기에, 신라서는 왕족이 아닌 육두품이었기에 불우했던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당대에 모든 것을 이룩해야 좋은 삶일까요? 만약 당대에 포부를 마음껏 폈다면, 최치원이 오늘날까지 고상한 이름으로 남았을까요?
좋은 일이 언제나 좋기만 할 수는 없고 나쁜 것이 끝까지 나쁘게만 작용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슬퍼도 말고 쉽게 기뻐도 말라, 삶에 요긴한 항상심(恒常心)을 최치원이 일러주는 것은 아닐까요.
◇신돈의 옛 터전 - 창녕
신돈은 창녕 출신 역사 인물 가운데 가장 유명합니다. 문제적 인물 신돈을 두고 한쪽은 요승이라 단정했고 다른 쪽에서는 성인으로 칭송했습니다. 고려 공민왕 시절 개혁기관 전민변정도감을 만들어 권문세족이 빼앗은 백성들 토지(田)와 양민 신분(民)을 원래대로 돌리려고 애썼기 때문이랍니다.
권문세족은 미워했고 일반 백성은 떠받들었습니다. 뒷날 신돈이 공민왕 신임을 잃고 쫓겨나 처형을 당하자 권문세족은 신돈이 나고 자란 절간 창녕 옥천사까지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화왕산 관룡사 올라가는 들머리 오른편 옥천사지는 흩어지고 깨어진 채로 널부러진 조각들 투성이입니다.
석탑·석등·주춧돌·축대 등등 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징이나 망치 자국은 뚜렷하고 연자멧돌조차 한쪽에 쳐박혀 있습니다. 욕심이 집착을 낳고 집착은 증오를 낳으며 그 증오가 이렇게 철저한 파괴를 만들었습니다. 600년 전 폐허를 둘러보다 말고 한 아이가 문득, "무서워요"라고 말했습니다.
◇ 전쟁의 바다 노동의 바다 - 통영
통제영은 1603년 임진왜란이 끝난 지 5년 뒤 지금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처참한 전쟁을 더이상 뒤풀이않겠노라 다짐한 결과였겠습니다. 세병관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청 건물 오른쪽에 십이공방이 있습니다.
주전소 터도 있는데요 그 값어치는 한 번 가늠해볼만합니다. 독자적 화폐발행권한이 통제사한테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바,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엽전 제작 유적입니다.
삼덕항 일대는 전쟁의 바다와 노동의 바다가 겹치는 장소랍니다. 고려 최영 장군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도 여기서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당포성은 군항을 감싸는 성곽이었고요. 삼덕항 돌벅수는 노동의 바다가 만들어낸 기도 대상입니다.
바닷일은 들일과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힘이 많이 듭니다. 때로는 목숨까지 걷어가는 바다를 두고 사람들은 무사귀환과 만선풍어를 위해 빌어야 했습니다.
통영은 또 예술의 고장입니다. 십이공방과 통영 예술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태어난 문학가가 박경리 선생입니다. 소설 <토지>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이는 그이 소설 곳곳에서 통영을 형상화하는 성과도 남겼습니다.
전시관과 그이 무덤을 두루 둘러본 다음 '도전! 골든벨' 형식으로 통영을 되새기는 데 안성맞춤인 자리가 박경리기념관이었습니다.
◇그윽한 동판저수지와 근대 유적 - 창원
통합 창원시 옛 마산과 옛 창원 또한 유서깊은 고장이지만 아쉽게도 역사·문화를 손으로 눈으로 누릴만한 데는 많지 않습니다. 창원은 공업도시로 이름이 높아 자연생태조차 볼품없으리라는 선입견도 작용합니다.
주남저수지가 있는데요, 이 또한 주남만 알려졌을 뿐 그 일부 동판저수지는 모르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동판은 그윽하고 살짝 돌아앉은 맛이 있습니다. 엿보는 재미라고나 할까요. 아이들은 둑길을 걸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지구에 3만 마리 정도 있고 5000마리 가량이 한반도를 찾으며 주남 일대에 1000마리쯤 온다는 우아한 겨울철새 고니도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고요.
통합 창원시는 군사도시였습니다. 여몽연합군도 여기서 발진해 거제·통영 사이 바다를 거쳐 일본으로 갔고 조선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군도 출발지가 여기였습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지역 수군·육군 사령부가 진해(제포진성)와 마산(합포성)에 있기도 했습니다. 제포진성 북쪽에는 웅천읍성이 남아 있습니다. 일부가 복원된 읍성에 올라 학생들은 색다른 눈맛을 즐겼습니다.
◇멋진 영암사지와 아름다운 월광사지 - 합천
합천은 해인사가 유명하지만 그 못지않은 망한절터가 둘 있습니다. 황매산 모산재 아래 영암사지와 합천읍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목 왼편 산기슭 월광사지입니다. 영암사지는 밝고 환한 폐사지입니다. 요즘 들어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학생들은 대부분 찾은 적이 없는 곳이랍니다.
튼튼하게 쌓은 축대와 듬직한 삼층석탑, 색다른 금당 자리 두 곳과 빗돌을 떠받쳤을 거북 두 마리를 눈에 담으며 풍경이 주는 넉넉함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영암사지에 돌로 만든 유적이 많은 까닭은 모산재가 그 재료가 되는 바위산이기 때문이겠지요.
월광사지는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가 망국한을 품은 채 거닐었던 장소라 합니다. 지금 남은 동서삼층석탑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통일신라 말기 작품이지만, 들판과 개울과 산기슭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그런 전설을 충분히 품음직해 보입니다.
개울 건너는 다리에서 멀찍이 바라보면 월광사 터는 더욱 멋집니다. 아이들은 오가면서 "이렇게 멋진 데가 합천에 또 있었네요!" 합습니다.
◇농토 한가운데 남은 돌말 - 고성
소는 남쪽 농경 문화를 대표하고 말은 북쪽 유목문화를 대표합니다. 바다와 맞붙은 남녘에 남은 기마문화 자취가 마암면 석마입니다. 한반도 남부 일대가 옛적 농경과 유목 두 문화가 버무려진 현장임을 말해줍니다.
물론 지금 있는 이 돌말이 만들어진 지는 오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원을 따져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그런 보기 드문 자취가 여기 고성에 남아 있답니다.
고성은 가야시대를 통틀어 김해 가락국, 함안 아라가야와 더불어 오랫동안 강국이었습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소(小)가야'라 했지만, 이또한 뜻으로 새기면 '쇠(金)' 또는 '세다'가 됩니다. '쇠'와 '세다'는 속성이 '굳고(固)' '단단하다'입니다.
2012년 문을 연 고성박물관은 이런 사연을 제대로 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온전하게 제대로 남은 유물인 새무늬청동기도 자세히 볼 수 있다.
◇오래 된 교통요충지 - 밀양
임진왜란 초기 하루나마 제대로 버틴 격전지가 밀양 작원관지 일대입니다. '작(鵲)'은 양산~밀양을 잇는 까치비리를 일컫고 원(院)은 숙소, 관(關)은 검문소라 보면 됩니다. 낙동강 물길을 빼면 까치비리가 유일한 북상 경로였습니다. 다른 데는 온통 험준한 산악으로 막혀 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작원관지가 밀양이 교통요충임을 일러주는 조선시대 자취라면 삼랑진역급수탑은 일제강점기 유물입니다. 기차는 1970년대 디젤엔진 나올 때까지 석탄을 때서 끓인 수증기로 움직였는데요 군데군데 멈춰 물을 보충해줘야 했습니다. 경부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삼랑진역은 적지였습니다.
삼랑진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밀양강은 곳곳에 명승을 만들었습니다. 으뜸은 당연히 영남루가 되겠고 버금은 월연대 일대입니다. 한밤중 보름달(月)이 뜨면 연못(淵) 같은 여기 밀양강 줄기에 담긴다고 합니다.
첫눈이 채 녹지 않았을 때 아이들과 더불어 찾았습니다. 아이들은 일대 밀양강과 들어앉은 정자, 백송(白松) 등을 눈에 담은 뒤 눈싸움으로 즐거운 한 때를 보냈습니다.
◇'최초'가 많은 고장 - 진주
진주는 오랫동안 경남 으뜸 고을이었지요. 들판이 널러 물산이 풍부했기에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귀하고 천함을 떠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았고 사람살이에 필요한 것들이 가장 먼저 들어오거나 생겨났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공립 중·고교인 향교가 다른 지역서는 빨라야 조선 초기 생겼지만 진주향교는 훨씬 앞선 고려 초기에 생겼습니다. 오래된 절간은 한 때나마 찌그러지는 신세를 대부분 겪지만, 1000년 역사 진주 청곡사는 줄곧 짱짱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 또한 우리나라 전체에서도 가장 이른 편이어서 문산성당·진주교회 같은 건물이나 역사를 남겼습니다. 진주교회는 기미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 시작을 알렸던 종탑이 아직 있고요, 또 백정이 다른 신분 사람들과 최초 동석한 공공 장소라는 역사성도 있습니다.
진주역차량정비고도 풍부한 물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은 삼랑진역에서 시작되는 경전선이 전라도까지 이어지지만 1923년부터 1968년까지 45년 동안은 진주가 종점이었습니다. 진주 서쪽에는 실어나를 물산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겠고요, 그래서 정비 시설이 종점인 여기에 들어섰습니다. 아이들은 잔설이 스러지고 있는 정비고 앞뜰에서 뛰놀며 사진을 찍고 추억을 쌓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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