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전남 장흥에 있는 보림사를 다녀왔습니다. 절간이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따뜻한 느낌을 안겨줬습니다. 자리잡은 가지산이 품은 기운도 부드럽고 여유로웠습니다.

 

아마도 전라도 산악 지형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이 아닌가 싶었는데요, 삐죽삐죽 치솟는 대신 산마루를 차분하면서도 정연하게 흘러내리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쪽저쪽 둘러본 바 보림사는 특징이 자유분방이었습니다. 격식에 매이지 않고 무엇이든 필요한대로 필요한 만큼 하는 파격(破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게 아닌데……" 이렇게 읊조릴 만한 대목에서도, 그냥 능청스럽게 "아무려면 어때서" 대꾸하는 식이었습니다.

 

절간 들머리부터 그랬습니다. 정식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이 외호문(外護門)이었는데 저는 어디서도 이런 이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바깥으로부터 지키는 문쯤이 되겠는데 그런 '지킴' 때문인지 빙 둘러쳐진 담장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외호문 위쪽에 달려 있는 용머리.

 

보통 절간이 갖추는 일주문·불이문과는 달랐습니다. 일주문·불이문은 절간 영역을 생각 속에서 개념으로 구분짓는 문들이라 하겠는데, 여기 외호문은 절간 안과 밖을 실제로 나누는 그런 문인가 봅니다.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사천문도 이름이 남달랐습니다. 보통은 사천왕문이라 하거나 아니면 줄여 일러도 천왕문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왕'자를 빼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왕'자를 과감하게 빼버리고는 사천문이라 붙였습니다.

 

이름만 봐 갖고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름입니다. 그런데 들어가면 사천왕상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515년 조성된,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입니다.

 

사천문에서 바라보이는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또 보니 보림사 마당에는 당간지주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하나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대적광전 앞에 있고요, 다른 하나는 2층 높이로 지어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보전 앞에 있습니다.

 

여기 당간지주는 법회 따위를 위해 탱화를 내거는 데 쓰이므로 당간지주가 두 군데 있다는 것은 법회 장소가 하나로 고정돼 있지 않고 두 군데라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보림사가 원래는 규모가 큰 절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절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줄 저는 압니다.

 

 

이와 같은 파격이랄까 자유분방함의 절정은 정작 명부전에 있었었습니다. 거기 바람벽을 보면 처음에는 죽어 저승에 간 사람이 염라대왕 앞에서 업경대(業鏡臺 지난 날 무슨 죄악과 잘못을 저질렀는지 비춰보는 거울)를 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렇게 죽은 사람이 죄과에 따라 겪어야 하는 숱한 지옥들이 열 장면 나옵니다. 혀를 뽑아 쟁기로 가는 지옥, 얼음지옥 불꽃지옥 독사지옥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가는 지옥 등등이 그림 속에 펼쳐져 있습니다. 아울러 육십갑자에 따라 해당되는 지옥이 무엇인지도 적어놓았는데요 퍽 실감이 나는 그림입니다.

 

명부전 바람벽에 그려진 그림을 둘러보는 사람들.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는 부처님과 함께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직행하는 사람들 그림이 등장합니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은 아시는대로 사바세계에서 곧바로 극락정토로 나아가는 지혜의 배입니다. 갖은 지옥을 겪지 않고 극락으로 바로 가려거든 살아 생전에 이렇게 선업(善業)을 쌓아야 한다고 이르는 셈입니다.

 

명부전,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공간이며 또 또 죽은 이들을 돌보는 지방보살을 모시는 전각인 여기 이 보림사 명부전은 오래된 건물이 아니고 바람벽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격식을 따지고 품격을 따지고 했다면 그려지지 않았을 그림들입니다.

 

 

보통 절간 전각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한살이라든지 아니면 어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나름 고상한 내용들이 그려집니다만, 여기는 그런 따지고 재고가 없이 사람이 죄 짓고(업을 쌓고=업장을 지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림사가 통일신라시대 보조국사 체징이 세운 선종 절간이고(그래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파 으뜸 절간이 됐고) 거기서 무애(無碍)한 선불교의 전통이 여지껏 흘러내린 덕분이지 싶습니다.(교종에 선종을 견줘 보면 그런 특징이 누구에게나 뚜렷하게 보입니다.)

 

사진 앞쪽 기와지붕이 약수터.

이렇게 보면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은 약수터도 파격입니다. 다른 데서는 이렇게 하는 대신 구석진 자리에 두기 십상인데 보림사는 아예 한복판에 마련했습니다. 아마도 걸맞은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이밖에 보림사에서 볼거리는 파손이 거의 없이 원형을 제대로 갖춘 석탑입니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데요, 크기도 우람하지는 않고 아름다운 정도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기단·몸통은 물론 상륜부까지 거의 제대로 남았다는 점에서 국보 대접을 받는 통일신라시대 돌탑 한 쌍이랍니다.

 

상륜부가 제대로 남아 있습니다.

 

(대웅보전 앞에는 탑이 없고 대적광전 앞에만 탑이 있는 것도 어쩌면 파격일 수 있겠군요. 대부분 절간이 다른 데는 몰라도 대웅전 앞에는 어지간하면 반드시 탑을 세워두거든요.)

 

또 하나, 대웅보전 뒤편 오른쪽에 놓여 있는 보조국사창성탑·탑비도 좋았고 또 대단했습니다. 먼저 창성탑비는 귀부(거북 모양 탑 받침) 물갈퀴가 매우 힘차게 보여 생기가 넘쳐 흘렀습니다(이수-그러니까 탑머리 조각 화려섬세함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위에 있는 창성탑(부도탑이라 하면 되겠는데)은 다른 무엇보다 그 커다란 규모가 보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보조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한 존경 또는 애정을 창성탑 덩치로 표현을 했나 봅니다.

 

 

여기 창성탑은 또다른 미덕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창성탑 있는 자리에서는 대웅보전 뒤꼭지가 바라보이는데요 그 너머 가지산 펼쳐지는 산자락 맵시까지 통째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름 아주 멋집니다.

 

창성탑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

 

그런데 제가 사는 경상도에서 보자면, 보림사 하나만 보고 가기는 장흥 가는 길이 너무 멉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기로는 토요일에 맞춰 가서 앞뒤로 토요시장(전국에 널리 알려진 장흥 명물입니다)에 들러 갖은 장흥 명물을 사는 한편으로 보림사에 들르면 어떨까 싶습니다.(참조 : 섬세한 감각으로 빛나는 장흥토요시장 http://2kim.idomin.com/2596)

 

그리고 보림사 둘레에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난대성 나무들로 이뤄진 '보림사산림욕장'도 마련돼 있으니 함께 누리면 좋을 것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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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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