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제주올레에 담긴 사람 자연 문화 역사 인생

김훤주 2014. 5.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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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제주올레 완주기

 

친구 성우제가 쓴 제주올레 완주기 <폭삭 속았수다>를 쉬엄쉬엄 읽었습니다. 설렁설렁 쉽게 읽히는 책이었습니다. 여행 관련 글이니 일부러 어렵게 쓰려 했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책입니다.

 

군데군데 드문드문 밑줄을 쳐 가면서 읽었습니다. 무슨 교훈이나 새로운 사실이 거기 스며 있기 때문은 물론 아니고요, 남다른 표현이나 감각이다 싶은 데에 손길이 머물렀습니다.

 

<폭삭 속았수다>는 제주도와 제주올레의 아름다움이나 특별함·멋짐 따위를 많이 다루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거기 사람과 문화와 역사도 건져 올리고 있었습니다. <폭삭 속았수다>를 읽으면서 눈길이 한 번이라도 더 갔던 글귀들을 풀어놓아 봅니다.

 

1. 숨어 있던 옛 이름들 살려낸 올레길

 

 

올레길이 생겨서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게 주인은 “사람이 많이 와서 장사가 잘된다” 같은 상투적인 말 대신 재미있는 답을 내놓았다.

“해안도로를 돌면서 숨어 있던 옛 이름들을 살려내서 좋다. 산물통·답다니탑 같은 정겨운 이름들을……” 그이는 한때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했다.(20쪽)

 

땅콩 막걸리 낮술 한잔을 걸치면서 해녀의 남편 및 해녀와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략) 우도에 사는 사람들과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해 ‘내가 알던 제주도’는 실제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우도는 제주도의 많은 것을 한데 모은 작은 섬인 동시에, 제주도 여행 오리엔테이션을 받기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6쪽)

 

곁을 지나는데 “음료수 한잔하고 가세요”라며 나를 부른다. 이런 호의는 거절하면 안 된다. 호의를 고맙게 받는 것이 베푸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갚으면 된다, 라고 나는 들었다.(45쪽)

 

터진목 모래밭은 새벽 바위를 감상하는 가장 달콤한 자리인 동시에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대표적인 지점이다. 이곳에서 성산읍 지역 양민 4백여 명이 학살을 당했다. 성산읍 4·3사건 유족회는 2012년 유적지를 만들어 그 넋을 담담하게 위로하고 있다.(53쪽)

 

2. 29년만에 혼자 하는 첫 외출을 제주올레로

 

그는 직장 생활 29년만에 혼자 하는 첫번째 외출이라고 했다. 한 달 예정으로 올레길을 모두 걸어볼 참이다. “한 직장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이렇게 잘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이는 아픈 속마음을 혼잣말하듯 털어놓았다.

 

“가만있으면 슬프잖아.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에 등록해서 학원도 두 달 다녔는데…… 나를 낮추는 게 어려워. 버리기가 힘든 거지. 어제 엔지니어로 일했다는 어떤 인생 선배를 만났는데, 2년 쉬다가 경비한대. 나도 금방은 안 될 것 같아, 낮추는 게.”(76~77쪽)

 

제주도 밭담만큼이나 아름답고도 긴 ‘선의 예술’이 지상에 또 있을까 싶다. 밭담의 최고 매력은 역시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소박함이다. 규격·표준화한 것 하나 없이 어느 담을 봐도 구불구불 제각기 다른 모양이다.

 

척박한 화산토에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누대에 걸쳐 돌을 쌓아올린 오랜 역사까지 담 안에 녹아 있으니 완벽한 예술품으로 손색이 없다.(83쪽)

 

3. 험한 것도 천천히 걸으면 할 수 있다

 

성우제. 잘 웃는다.

 

남편은 불편한 몸인데도 카메라를 걸치고 있다. 걷다가 야생화가 보이면 쉬면서 사진을 찍는다.

 

“우리 아저씨가 대단하다. 여기 와서 고생을 좀 했다. 어제는 무리를 해서 오늘 못 걸을 것 같더니 아침 6시에 일어나 나왔다. 걷다가 지루하면 내가 노래도 불러준다. 우리 아저씨 즐겁게 해주려고…… 이 얘기 저 얘기 많이 하고 지금은 재롱도 부린다.” 아내는 발랄하고 남편은 과묵하다.

 

남편이 입을 연다.

“먼저 가세요.”

말하기가 성가셔서 그런가 싶어 순간 긴장했다. 그게 아니라 내 걸음을 맞추자니 숨이 차서 그렇다고 했다. 남편은 말했다. “험한 길도 천천히 가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하면서…… 다리가 튼튼해지면 한라산에도 오르고 싶다.”(84~85쪽)

 

“3코스 걷다가 너무 지쳐서 오늘은 짧은 코스를 걸으려 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기운이 생겼다”고 그이는 말했다. 나도 그랬고, 올레길 걷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지치고 힘들어서 다음날 도저히 못 걸을 것 같다가도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새롭게 솟는다.(96쪽)

 

4. 민간의 자발성이 제주올레를 빛나게 한다

 

우리나라에 생겨난 수백 개의 걷는 길 가운데 제주올레길이 돋보이는 까닭은 원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주올레길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민간의 자발적인 의지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순전히 민간의 힘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이 주도한다고 하여 나쁠 것은 없으나, 민간 차원에서 출발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는 것에 비한다면 생동감이나 생명력은 확실하게 떨어진다.(171쪽)

 

올레 정신에서 어긋난다며 포클레인 한 번 쓰지 않고 삽과 곡괭이만으로 작업을 했으니, 길을 낸 사람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길을 걸어본 사람이면 안다. 때로는 그냥 걷기에도 힘에 부치는 길들을 그들은 찾거나 만들어냈다.(172쪽)

 

강정마을 앞바다로 가던 올레길은 담장에 막혀 마을로 돌아간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강정마을을 책마을로 꾸민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찾아보고 싶었다. 지나는 길에 눈에 띄지 않아서 “다음에 찾아보지, 뭐” 하다가 결국 가보지 못했다. 길은 한 번 지나가면 돌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179쪽)

 

그는 구체적인 속내를 이야기한다. 최근 회사에서 대규모 명예퇴직이 이루어졌다. 그는 그 방식 때문에 충격을 많이 받았다. 능력이 있건 없건 가리지 않고 몇 년생 이상을 모두 그만두게 했다는 것이다(몇 년생인지 들었으나 쓰지 말라는 부탁이 있었다).

 

“바로 내 앞에서 잘려나갔는데 능력 있는 선배들, 안타까운 선배들이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한들 미래가 없다. 충격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멘붕’이 올 법도 하다. 누구도 불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아주 ‘공평’한, 그러나 초강력 처방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를 대고 나이라는 숫자에 빨간 줄을 그은 다음 그 위를 털어낸다는 느낌이 든다. 혼자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바다를 보며 소리도 치르고 했다는 조씨는 느닷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다 털어놓아서 속이 시원한데, 처음 만나서 결례를 한 것 같다.” 그러고는 점심 값을 서둘러 낸다.

 

나는 그가 속을 시원하게 털어놓아서 오히려 고마웠다. 가까운 친구들끼리도 잘 나누지 못하는 한국 중년 남성의 슬픔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185~186쪽)

 

우선 흙길은 밟는 곳마다 다른 모양, 다른 느낌이지만 시멘트 길은 어느 곳을 밟아도 똑같은 느낌이다. 발에 와 닿는 길의 느낌이 프랜차이즈 커피점처럼 획일적이다. 똑같은 강도의 딱딱함이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발에 와 닿아 피로감이 더하다.(188쪽)

 

5. 세한도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소나무

 

“선배, 저 소나무 좀 봐요. 특이하지 않아요?”

너른 들판, 마늘밭 사이로 난 들길을 걸으면서 이실장이 소나무 몇 그루를 가리킨다. 소나무가 뭍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잎이 무성하여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적송赤松과 달리 제주도 소나무는 숱이 적고 듬성듬성 빠진 쓸쓸한 모습이다. 바닷바람에 시달리지만 바닷바람에 잘 견디는 곰솔(해송海松)이다. 나무 색깔도 회백색이다.

 

이 소나무들이 왜 눈에 익었나 싶었더니, 추가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에 스산한 분위기의 곰솔과 닮았다. 지금 걷는 이 길은 추사가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대정읍 안성리 추사적거지에서 그리 멀지 않다.(277쪽)

 

6. 올레길에서 만나는 인심과 풍속

 

노씨에 따르면 ‘천 원의 행복’은 한경면 조수리 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소년소녀 가장 돕기 프로그램이다. 마을 입구에 농산물 무인 판매대를 설치하고, 이 동네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판매한다. 곡물·야채·과일 한 봉지에 천 원씩이다.

 

 

수익금은 모두 한경면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데 쓰인다. 판매대에 대한 호응이 꽤 뜨거운 것 같다. 4월 한 달 수익금은 54만3,210원. 어린 가장 다섯 명에게 매달 3만원씩 지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노씨는 ‘천 원의 행복’을 지난 1월에 시작했다고 했다. 올레길 곁에 있는 쉼팡은 ‘천 원의 행복’에서 파생된 일로 “우리 마을 곁을 지나는 올레객들에게 마을 인심을 전하는 곳”이라고 했다. 겨울에는 쉼팡에서도 귤을 판매한다.

 

5월 ‘천 원의 행복’ 판매대에는 배추 세 단, 감자 세 봉지, 감자 세 봉지가 나와 있다. 나는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겠지만 잡곡 한 봉지를 사서 배낭에 넣었다.

 

올레길로 돌아오는 길. 청년회에서 길옆에 화단을 만들었다. 꽃길을 걸으며 ‘천 원의 행복’을 만끽했다. 바쁜 농사철이어서 노씨와는 5분도 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이렇게 바쁜 사람들이 농산물 무인 판매대와 올레꾼 쉼팡을 어떻게 기획하고 운영하는지 그 정성이 놀랍고 아름답다.

 

마음이 맑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13코스는 제주 바다를 낀 화려한 풍경이 없는 대신 이렇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볼거리가 많다.(287~288쪽)

 

지금 벌초하는 곳은 “둘째 어머니 산소”라고 했다. 고씨에게는 어머니가 세 분이다. 그이의 아버지는 1928년생. 아버지 세대만 해도 제주도에서는 일부다처가 흔한 일로, 사회적으로 공인되었다.

 

바다를 향해 용암이 꿈틀꿈틀 뻗어내려가다 굳어버린 모습. 멀리 우도가 보입니다. '폭삭 속았수다'에 없는 사진입니다.

육지와는 반대로 제주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아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아들을 낳으면 “이 아이는 고기밥”이라고 여길 만큼 해상 사고가 잦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관의 지독한 수탈과 왜구의 노략질 등을 피해 뭍으로 도망간 제주도 남자만 만 명을 헤아렸다.

 

(중략) 급기야 조선 인조 7년(1629년)에는 출륙금지령까지 내렸다. 금지령은 2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기근에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더해져서 제주도 남자들은 탈출 러시를 이룬다. 4·3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도 엄청나게 컸다.

 

해상사고와 핍박, 수탈, 흉년 등으로 일찍 죽거나 생존을 위해 섬 바깥으로 도망쳐야 하는 운명. 태생적으로 그런 운명을 타고 나는 남자 아이를 집안 어른들이 선호할 리는 만무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 남자가 여자 여럿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여자와 함께 살아야 했다. 역사적·사회적 환경 탓이다.

 

육지에서는 첩을 비하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본부인을 큰각시, 작은부인을 조근각시라고 부른다. 조근각시를 첩으로 하대하여 차별하는 풍조가 없고 큰각시·조근각시가 함께 살기도 했다.

 

뭍에서와는 달리 제주도에서는 둘째 어머니 산소라고 하여 벌초를 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남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사연을 알고 나면 “제주도는 삼다도”라고 가볍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람과 돌은 제주도의 척박한 자연환경을 말하고, 여자가 많다는 것은 제주도의 오랜 아픔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고창억 씨의 친모는 셋째 어머니. 큰어머니는 생존해 계시고, 둘째 어머니와 친어머니는 작고했다. 고씨는 친모에게서 난 8형제의 막내. 세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14남매이다. 고씨가 1968년생이니 시대를 감안하면 형제가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다.(293~294쪽)

 

 

5월 제주 농촌은 어디를 가든 마늘종을 쳐내느라 바쁘다. 말 걸기가 미안해서 그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만 하고 지나간다.(298쪽)

 

6. 올레길에서 만나는 인심과 풍속 2

 

이사무장의 집은 지금 4대가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는 올해 아흔둘이신데 오늘도 아래층에 운동을 하러 오셨다.”

 

집 대문은 하나지만 건물들은 각각 독립되어 있다. 대문의 왼쪽 바깥채에는 부모님, 가운데 안채에는 할머니, 그리고 바깥채를 또 하나 새로 지어 이미순 씨 부부와 자녀들이 산다. 제주도 전통적 가족 형태인 ‘따로 또 같이’의 전형이다.

 

“4대가 안거리(안채)·밖거리(바깥채)에 살면서 밥을 따로 해먹는 것을 육지에서는 이래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육지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풍습이다. 구순 할머니께서도 밥을 직접 지어 드신다. 제주도에서는 어른이고 자식이고 이렇게 독립심이 강하다.”

 

“살림을 따로 하니 시집살이는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사무장은 웃기만 했다. 서류를 떼러 왔다가 이야기를 듣던 한 주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안하는 건 아니죠.”(315~316쪽)

 

 

저가 항공 이야기를 하다가 그이는 갑자기 ‘이재수의 난’을 아느냐고 묻는다. 저가 항공인 제주항공이 애경그룹 계열사인데, 애경그룹이 제주항공을 운영하게 된 배경이 있다고 했다.

 

애경그룹 창업자 장영신 회장의 시댁 선조가 장두 이재수를 통인(관노)으로 데리고 있었던 대정군수 채구석이라는 얘기다. 군수로서 백성 편에 서서 난을 수스하려고 애를 썼던 채구석은 제주도민들의 민심을 얻은 관장이었다.

 

도민들은 채구석 군수의 우선 석방을 조건으로 내걸고 프랑스가 요구한 배상금을 물겠다고 자원하고 그 약속을 이행했다. 제주도와 애경그룹 간에 그런 인연이 있고, 그 연이 제주항공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320쪽)

 

7. 제주도 기부금 내는 문화의 뿌리는 무엇일까?

 

올레길은 밭길을 따라 이어진다. 양배추를 한 트럭 가득 실어가는 광경이 보인다. 제주도 밭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든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백전백색百田百色이다. 지금은 수확을 마치고 텅 비어 있는데도 밭마다 제각기 흙 색깔을 달리하며 이곳만의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밭담의 곡선은 더 유연하고, 하늘과 오름이 밭과 잘 어울린다.(322쪽)

 

 

지금도 마을에 기부금 내는 문화가 살아 있는지, 기부금을 낼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중략) 4·3사건 때 마을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이는 선선히 대답해준다. 일이 벌어질 당시 그이는 여덟 살이었다.

 

이 동네도 초토화된 130여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마을이 모두 불타고 우리는 해안가로 피난 갔었다. 산으로 도망갔다가 죽은 사람도 많고. 한국전쟁 이후 올라왔더니 동네가 잿더미였다. 산에서 벤 나무를 등에 지고 와서 집을 지었다. 굶주림과 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양씨는 “협조심이 있어서”라고 했지만 기부금 문화에 대한 실마리를 본 듯했다.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버린 고향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일본에서든 육지에서든 이 마을 출신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불행을 겪어본 일이 없는 육지 사람들에 비해 고향에 대한 애정의 강도도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을 터이다.(339~340쪽)

 

젊은 사람들 많이 살러 오지. 먹고사는 건 자기 하기 나름이여. 몸으로 일하겠다고 해봐. 일거리는 쌨어. 내 이름? 뭐 비싼 거라고 숨긴대? 임병애여. 나 첨에 여기서 기절할 뻔했잖아. 자기 아들 며느리 같이 살면서 밥은 따로 해먹더라니까. 한집에서도 같이 안해먹어.

 

육지에서 보면 그런 몰상식이 어디 있어?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게 합리적이야. 시어머니들이 그러더라고. 며느리들하고 살면 배가 고프대. 옛날에는 식량이 없잖아. 젊은 애들이 일을 많이 하니까 많이 먹고 노인들은 적게 먹는데, 더 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래서 따로 먹기 시작했대.(354~355쪽)

 

들길에서 올레길을 걷는 40대 부부를 만났다. 남편이 공무원이다. 10년 전 발령을 받아 부산에서 제주도로 왔다. 부인은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3년만 살다 가려 했는데 살다 보니 좋아서 그냥 눌러앉았다”고 남편은 말했다.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그이의 답변이 재미있다. “외국말 안해도 되는 외국 같지 않습니까?”(355쪽)

 

8. 올레길이 열어보여주는 제주도 역사 명소

 

참깨씨를 뿌려놓고 꽝꽝나무로 만든 이 선비를 끌고 다니며 알맞추 흙으로 묻어주고 있는 김두생씨. 290쪽.

 

제주도에 자주 왔으면서도 관덕정 광장을 알고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올레길은 평소 몰라서 볼 수 없었던 제주도의 다양하고 중요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주도의 관광 명소는 많이 보았으나 제주도의 역사적 명소를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361쪽)

 

동문시장 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었다. (중략) 물어물어 오현단을 찾았다. “제주도에 유배되었거나 관인으로 내려와 민폐 제거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조선 시대 다섯 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라고 했다.

 

비석들이 소박하게 서 있는 모습, 김상헌, 송시열 같은 알 만한 분들의 이름이 보인다. 서울에서 만난 제주도 출신 남자들 대부분은 오현고 출신이었다. ‘오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362~363쪽)

 

불탑사 안에 있는 석탑은 세계에서 유일한 현무암 석탑이자 제주도에서 유일한 불탑이다. 기황후가 아들 낳기를 소원하며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탑을 제작한 석공은 고려 사람일 터이며 탑의 재로 및 양식 또한 이 땅의 것이다. 오층석탑은 날렵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오층석탑이 조성되어 있는 정원이 좋다. 감귤나무·배롱나무·동백나무·대나무가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언제부터인가 ‘잘생긴’ 탑을 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새소리·바람 소리가 들린다. 탑을 바라보며 정원 안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394쪽)

 

“나는 1969년 12월 중순에 배를 타서 이듬해 1월 3일 일본에 도착했다. 큰 배의 한구석에 10여 명이 함께 탔었다.” 그때까지도 한국이 살기가 어려웠던 만큼 밀항이 많았다. 그는 닥치는대로 일했다.

 

공장에도 다니고 ‘노가다’도 하면서 돈을 모았으나 ‘합법적인 신분’을 만들어 준다는 브로커에 속아 10년 동안 번 돈을 몽땅 털리고 말았다. 요코하마 불법 체류자 수용소에서 5년을 보냈다. 나중에 불러들였던 아내도 따로 수용되어 아이 둘을 수용소에서 키웠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며 벌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그이는 “너무 억울해서” 약속을 깨고 도망을 갔다. 3년 후인 1990년에나 고향 땅을 밟았다. 20년 만이다.

 

“예전에는 한국이 못살 때고 일거리도 없고 해서 나처럼 많이들 건너갔었다. 요즘에야 일본에서 고생하는 만큼만 일하면 여기서도 다 부자 되는 거지.” 1944년생. 성은 백씨라고 했다. 옛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상한 마음을 조금 달랜 듯 인사를 할 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폭삭 속았수다'에 없는 사진입니다.

 

나는 좋은 커피에 누구보다 집착하는 커피 마니아지만 봉지 커피를 최고로 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커피 한잔을 함께하면서 뜻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바로 그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커피이다.(396~397쪽)

 

북촌리 포구에는 단순하고 나지막한 옛 등대가 하나 서 있다. 고기잡이 나간 배가 불을 보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1915년 동네 사람들이 돌을 쌓아 만든 등명대(도대불)이다. 등명대 위에 건립비를 세우고 건립 연도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특이하다고 하는데, 건립비의 귀퉁이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4·3사건 때 총탄을 맞은 흔적이라고 했다.(414쪽)

 

9. 걷기 여행은 몸을 불편하게 만든다

 

일반 여행이 몸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하는가 쪽으로 진화해왔다면, 도보 여행은 몸을 어떻게 하면 더 불편하게 만드나 하는 쪽에 관심을 갖게 된다. 걷기 여행은 편하게 빨리 이동하며 보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일부러 멀리하면서,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고 받아들이게 한다.

 

몸을 불편하게 하는 여행은 곧 몸을 위한 여행이다. 숲속에 들어서면 모든 감각이 저절로 열리고 민감하게 작동한다. 새소리, 바람 한 점이 내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 동복리에서 김녕리로 넘어가는 늦은 오후의 숲길, 한적한 이곳에서 도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홀로 즐긴다.(417~418쪽)

 

(캐나다) 브루스트레일은 멤버십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1년 회비는 50달러(약 5만2천 원)이다. 회비를 내면 헝겊으로 만든 브루스트레일 마크를 보내준다. 회원들은 헝겊을 모자나 배낭에 붙이고 다닌다. 브루스트레일을 걷는 중에 “회원 등록을 했느냐?”고 물어오는 회원들이 종종 있다.

 

트레일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회원이 되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고 그들은 강력하게 권한다. 이런 말을 두어 번 듣고도 회원 등록을 하지 않는다면 강심장이다.

 

50년 역사를 헤아리는 브루스트레일과 2007년에 길을 열어 2012년 완성된 제주올레의 멤버십 제도를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올레길을 걸으면서 아쉬운 광경을 더러 목격했는데, 올레길은 그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 모두의 재산이라는 인식이 아직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올레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길을 사랑하고 관리하는 주인이 되어 후원자에게 주는 ‘날개 달린 조랑말’ 마크를 달지 않은 사람들에게 “회원이 되시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문화가 제주올레에도 머지않아 자리잡게 될 것이다.(439~440쪽)

 

 

바닷길을 걸으면서 수십 개의 테왁을 띄우고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또 본다. 올레길을 걸어오는 동안 해녀가 혼자 작업하는 광경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

 

물론 각자 일하는 만큼 수익을 얻지만 집단에서 떨어져나와 개별적으로 물질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속에서 하는 일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사람들의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정신은 이렇게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442~443쪽)

 

두 발로 걸어서 완주를 했다는 뿌듯함도 있지만 내 몸과 마음속에 많은 것을 담아 간다는 기쁨이 더 컸다. 몸과 마음은 좋은 에너지로 출렁거리는 느낌이었다. 내 생애에 이렇게 행복한 나날이 또 올까 싶었다.(447쪽)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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