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수질환경센터 센터장

 

 

스승과 제자 사이 아름다움이 여기 있었습니다.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양운진 이사장과 이상용 수질환경센터 센터장. 수질환경센터는 한국생태환경연구소의 부설 기관이며 이상용 센터장은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상임 이사이기도 합니다.

 

연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실천을 통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학문과 운동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 활동이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 둘이 같이 활동하는 단체인 한국생태환경연구소가 지난해는 환경부 수생태(도랑)복원 컨테스트 대상을 받았고 올해는 한국생태환경연구소와 수질환경센터가 공동으로 SBS물환경대상(교육연구 분야)을 받은 것입니다.

 

 

스승이 자랑스럽게 앞세우는 제자

 

마산창원환경운동연합 초대 의장을 지낸 양운진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경남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로 있었지만 이제 명예퇴직을 하고 물러나 있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지역사회 원로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이사장이나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 이사장 같이 둘레에서 요구하거나 자기가 필요하다 싶은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질환경센터 이상용 센터장이 큰 상을 받았거든. SBS에서 물환경대상. 너거 신문에 좀 크게 다뤄줄 수 없나?” 조금은 취한 듯한 목소리였지요. 아무래도 기분이 아주 좋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더랬습니다.

 

경기도 오산천에서 수질 생태 조사를 하는 장면.

 

알아봤더니 자기가 이사장으로 있는 단체가 대상을 받았으니 본인이 상을 받았다고 해도 괜찮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용 센터장이 상을 받았다고 한 데에는 나름 까닭이 있지 싶었습니다. 그이가 전반을 총괄 진행해 왔기 때문인 것이었습니다.

 

산청에서 태동하고 마산에서 태어나

 

1965년 7월 7일 생인 이상용 센터장은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가 고향입니다. 지리산 둘레길 5구간 종점, 물 좋은 동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어나지는 않았고 태동기(胎動期)를 여기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어난 데는 마산이랍니다. 그러니까 마산은 살아온 고향이 됩니다. 이상용 센터장이 기억하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마산은 대단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었습니다.

 

회원천이 흐르는 앵두밭골, 그러니까 앵기밭골에서 자랐습니다. 물놀이하고 가재 잡고 얼음 지치고 물고기 잡고 그렇게 놀았다고 합니다. 우물도 살아 있었고요. 이런 마산의 추억이 이상용 센터장에게는 강렬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청 수철마을의 추억은 더욱 강렬했습니다. 더 크고 더 많은 추억을 그이는 수철마을에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큰집 본가와 외가가 모두 거기에 있으니까, 방학을 비롯해 틈만 나면 거기서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산에서 나무도 하고 도랑에 들어가 물놀이도 했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도랑 살리기 운동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곳곳에 있지만 강도 아니고 하천도 아니고 지천도 지류도 아니어서 나라로부터 아무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있는 도랑입니다. 하천법과 소하천 정비법 두 가지가 있는데, 도랑은 어느 법률도 다루지 않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상용 센터장은 오래 전부터 도랑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도랑은 실핏줄이기 때문이랍니다. 낙동강·한강·영산강·금강·섬진강 같은 커다란 강줄기가 동맥이고 밀양강·함안천·석교천·황강·남강 같은 물줄기가 굵은 핏줄이라면 도랑은 실핏줄에 해당됩니다.

 

실핏줄이 깨끗하지 않으면 굵은 핏줄과 동맥이 절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게다가 물을 더럽히는 일들은 대부분 동맥이나 굵은 핏줄에서가 아니라 실핏줄에서 벌어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굵은 데에만 눈길을 둡니다.

 

 

이런 현실에서 이상용 센터장은 2007년 고향 수철마을에서 마을 앞 도랑을 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지없이 깨끗하지만 그 때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고 냄새도 많이 났습니다. 여기저기 쓰레기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도랑을 돌보지 않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수철 마을 사람들은 도랑이 깨끗해지면서 마을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찾는 마을이 됐고 깨끗해진 도랑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마을이 됐다고 합니다. 한 주일에 한 차례 꼬박꼬박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청소도 합니다.

 

도랑을 깨끗하게 하려다 보니 농사도 달라졌답니다. 게다가 마을에서 나가 사는 사람들도 쉬는 날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옵니다. 물놀이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도랑이 깨끗해졌기 때문이지요.

 

어느 새 더러워져 있었던 마산 앞바다

 

1983년 겨울 들머리 대입 학력고사(요즘으로 치면 수학능력시험)를 마친 이상용 고3 학생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마산 바닷가 일대(마산만)를 거닐게 됐습니다.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세상 모르고 공부만 하게 돼 있는 동안, 그 좋았던 마산 바다가 엄청나게 망가지고 더러워져 있는 모양을 바로 이 때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한 것입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마산 바닷가 횟집에서 회를 사주기도 해서 여전히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더러워져 있구나, 이런 바다를 내가 살려봐야겠다,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신설된 부산대학교 환경공학과에 지망을 했는데 첫 해인 1984년에는 떨어졌답니다. 재수 끝에 이듬해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합격했습니다. 대학 1학년 학생 이상용은 환경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제 첫 운동은 이랬습니다. 당시 낙동강 하굿둑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물길을 막으니까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대학 들어간 그 해에 선배들이랑 실태 조사를 나갔어요. 사진을 찍고 나오는데, 현장에서 작업하는 사람들한테 카메라를 빼앗겼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사진이 없으니까 당시 눈에 담았던 모습들을 죄다 그림으로 그려 갖고 학생들한테 알렸습니다. 이렇게 시작이 됐습니다. 하하.”

 

학생 이상용은 운동을 하느라 ‘1년 굽어 먹는 바람에’ 졸업이 한 해 늦춰지기도 했고 부산대 공과대학 학생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1992년 4학년이 돼서는 여름방학 때부터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지금 부산환경운동연합)에서 상근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1월에 정식 월급을 받았는데 8만원이었어요. 당시 자취비가 8만원 정도였으니까 생활이 안 됐지요. 부산대 앞에 자취하는 친구들 가운데 ‘사회 변혁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한 달에 10만원씩 모아 후원해 줬습니다.”

 

“제가 활동력이 컸어요. 공대 학생회 사무국장을 할 때였는데, 모두 전동타자기 쓰고 있었어요. 컴퓨터는 없었지요. 제가 생각하기를 ‘학생회 명색이 그래도 공과대학’인데 컴퓨터를 장만해야 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여러 군데 찾아다닌 끝에 컴퓨터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 뒤 각급 학생회에서 전동타자기를 컴퓨터로 업그레이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요.

 

학생 시절 벌였던 그런 활동들이 그 뒤로도 제게 기획·조직 등등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이 됐습니다.”

 

운동도 좋지만 누군가는 공부를 해야

 

그러다 1994년 마산·창원으로 오게 됐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이 밝힌 경위는 이렇습니다.

 

 

“한 해 전부터 마창공추협(마창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지금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과 관계하고 있었지요. 한 달에 한 번 실무자들 환경 관련 공부를 가르치러 왔거든요.

 

그러다 1993년 12월 수돗물 악취 사건이 터졌고 94년 1월 1일 대책 활동에 바로 투입됐습니다. 당시 양운진 교수가 의장이고 전교조로 해직돼 있던 이인식 선생님(지금 우포늪 따오기 복원위원장)이 사무국장, 저는 사무차장을 맡았지요.”

 

“아침 8시에 나서면 자정 이전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민관 합동 수질 조사를 최초로 마산시랑 한 일도 기억이 납니다. 환경 분야에서 민간이 정부를 감시한 첫 사례였어요. 민관 협력의 단초이기도 했고요.

 

한편 내부 개혁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회원 800명 가운데 500명을 정리했어요. 300명 수준에서 다시 조직을 시작해 그 해에 1000명을 채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의장이던 양운진 교수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운동도 좋지만 누군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양 교수는 시민장학금을 모았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을 대학원에 진학시키기 위한 종잣돈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습니다. 첫 학기는 그렇게 다닐 수 있었으나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양 교수가 다시 나서서 박재규 총장 동의를 얻어 경남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했습니다.

 

‘미래를 위해 뜻있는 사람을 공부시켜 키우고 있는데 학자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부총장과 총장에게 요청했는데 파격적으로 들어준 것입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이런 아름다운 인연으로 여러 군데에 빚지고 있습니다.

 

“마창환경련에서 대학원으로 파견하는 형식이었어요. 상근비도 받았지요. 회원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환경련에서 요청하는 수질 조사 같은 것도 했습니다. 1996년에는 공단이 있는 창원 지하수에 발암 물질인 트리클로로에틸렌(TCE)가 스며든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보도된 신문을 보면 제가 ‘마창환경연합 연구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수질 관련 전문 연구 기관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97년 4월 17일 창립식을 했습니다. 마창환경연합 부설로 ‘수질환경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마창환경련 부설이지만 여건 때문에 연구실은 대학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남대학교 환경문제연구소와 시설·공간 등을 공유하는 협약을 했습니다.(이렇게 지내다 2010년 2월 한국생태환경연구소가 창립되면서 그 부설 기구가 됐으며 2013년 12월까지 경남대에 공간을 두고 있다가 학교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활동도 영향력 있으려면 여럿이 어울려야

 

이상용 센터장은 수질환경센터와 더불어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혼자서 한 것은 아니고 여럿이 한데 어울려 했습니다. 그리고 여럿이 한데 어울리게 하는 데에는 어김없이 이상용 센터장이 있었습니다. 대충 훑어보면 이렇습니다. ‘최초’를 꾸밈말로 붙여도 손색이 없는 것들입니다.

 

 

낙동강 본류 수계 전체 수질 조사, 마산만 살리기 운동, 경남물포럼 조직, <생명의 물> 발간, 경남물엑스포 개최, 경남 도심 하천 살리기 운동, 낙동강 유역 네트워크 조직, 그리고 도랑 살리기 운동 등등.

 

이 가운데 특히 도랑 살리기 운동은 2007년 처음 제기된 이래 날이 갈수록 그 너비가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경남 곳곳에서는 민간 단체와 자치단체가 도랑 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경남에만 그치지 않고 경기·충청 등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최근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물 또는 수질과 직결된 분야에 집중해 왔다면, 2010년부터는 이를 포함해 ‘저탄소’ 전반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속가능한 활동’을 ‘독자적으로’ 벌이려고 ‘저탄소 녹색 미래 사회를 위한 협약’을 2010년에 했고 2013년 다시 협약했습니다. 대상은 경남대학교와 한국폴리텍7대학·대우백화점 그리고 한국생태환경연구소(부설 수질환경센터)입니다.

 

저탄소 목적에 동의하는 단체가 모여 저마다 가진 바를 내놓고 저탄소와 녹색 미래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식이랍니다. 이처럼 이상용 센터장은 혼자서 활동하기 보다는 여럿이 어울려 함께하기를 더 좋아한답니다. 그렇게 해야 영향력이 더 커지고 더 오래 지속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양운진 교수한테 고마워하면서 양 교수가 지역사회에서 했던 역할을 대신해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양 교수는 마산이 아닌 제주 출신이면서도 경남에서 물 운동을 먼저 시작한 사람입니다.

 

 

“양운진 선생님은 지역 사회를 위해 의식 있게 활동을 하셨습니다. 지역 문제로 머물지 않고 전국 문제로 개선 활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활동을 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셨던 역할을 제가 이어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높은 연봉으로 채용해 주겠다는 유혹도 종종 받지만, 지금 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인터뷰 말미에서는 아내 자랑도 곁들였습니다.

 

“서른다섯이던 99년에 결혼했습니다. 여름인가 가을에 만났는데 해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환경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꿈이 있다’고요.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꿈을 꾸는 사람이 있나? 다들 현실만 이야기하는데…’ 아내가 학교 선생님입니다. 돈을 적게 벌어도 가정이 꾸려지고 하니까, 고마울 수밖에요.”

 

이렇게 보면 이상용 센터장은 복 받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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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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