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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이 습지와 무슨 상관이지?

김훤주 2013. 10. 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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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대표이사 고재윤)과 경남도민일보가 공동 주관하는 ‘언론과 함께하는 습지 생태·문화 기행’ 두 번째는 경북 안동 하회마을로 걸음을 했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 문화가 남긴 이런저런 산물들도 습지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남은행·농협경남본부·STX그룹은 지역에 뿌리를 내린 기업으로서 지역 사회 이바지를 목적으로 자금 출연을 비롯한 여러 방법으로 람사르재단을 거들고 있습니다. 람사르환경재단은 이들 기업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이런 습지 생태·문화 기행을 마련하고 11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직원 자녀를 초청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참가 청소년들이 습지를 좀 더 많이 좀 더 잘 알게 하는 한편 람사르재단 홍보도 겸하는 하회마을 기행은 8일 둘러싼 풍경이 멋진 병산서원(屛山書院) 탐방으로 시작했습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이날 아침 8시 30분 경남도청을 출발해 11시 20분 병산서원에 가 닿았습니다. 


병산서원 만대루.


1. 습지는 심미 기능도 중요하다 


알려진 대로 습지는 동물과 식물의 터전이며 물 속 유기물질을 없애 정화해주는 구실도 한답니다. 물을 모아두는 저수지 노릇과, 빗물을 땅으로 스며들게 하는 통로 구실도 합니다. 습지에서 물이 식물을 통해 대기로 증발돼 나가면서 여름에는 그만큼 온도를 내리는 효과도 냅니다. 


습지는 생명의 ‘자궁’이며 생태계의 ‘보고’라는 기림을 받으면서 여러 생물이 다양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습지가 지닌 값어치의 전부는 아니랍니다. 


입교당에서 보는 만대루와 그 너머 풍경.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풍경을 누리고 사나워지거나 더러워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깨끗하게 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습지는 철새를 비롯한 동물들의 쉼터일 뿐 아니라 사람이 와서 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마구 쏟아지는 광고·정보의 난폭함, 세상살이에서 오는 이런저런 의무와 책임과 당위로부터 벗어나 잠깐이나마 정신을 다듬을 수 있는 데가 바로 습지입니다. 일행은 이번 하회마을 기행을 통해 습지가 주는 그런 즐거움을 나름대로 누렸습니다. 


2. 자연 풍광을 액자처럼 담아내는 만대루 


병산서원에서 으뜸은 만대루(挽對樓)입니다. 만대루는 말하자면 대강당인데 병산서원에서 가장 크게 값어치를 인정받는 건물입니다. 기둥이나 들보 따위에서 나무를 자연 그대로 썼으며 꾸민 경우도 최소한에서 멈췄습니다. 


만대루에서 볼 수 있는 낙동강과 모래사장.


모두 일곱 칸인데 그 한 칸 한 칸에 눈 앞 풍경을 액자처럼 구분해 담을 수 있습니다. 맞은편 병산의 짙푸름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의 푸름이 조화롭고, 너르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거기를 거니는 사람들 움직임이 느긋합니다. 


만대루 위쪽 입교당은 그런 만대루와 둘레 자연 풍광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일러줍니다. 여기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와 입교당 사이를 둘러싸고 있는 동재·서재 기와도 한눈에 들어와 건물 전체를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둘러싸고 있음을 절로 알 수 있습니다. 


입교당 마루에 앉았습니다.


함께하는 아이들은 이런 건물 구경도 즐겼지만 배롱나무에 더 많이 눈길을 주기도 했습니다. 표면이 매끄러워 원숭이도 올라가다가 떨어질 정도라는 말에 손바닥을 대고 문질러 보는 아이도 있었는데, 정말 미끄럽다며 짓는 신기해하는 표정이 귀여웠답니다. 


사당 들어가는 대문에 그려진 태극무늬와 태극괘도 인상깊었습니다. 태극무늬는 흔하지만 태극괘는 보기 쉽지는 않은데 여기는 기둥을 받치는 돌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태극무늬와 태극괘가 그려져 있는 사당 들머리에는 이런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여기 병산서원은 낙동강물이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동남쪽 상류인데 이 물줄기는 둥글게 흘러가다가 하회마을 빠져나가는 북서쪽 하류 부용대에서 한 번 더 뒤틀면서 반대편으로 둥글게 휘어집니다. 공중에 떠서 보면 낙동강 물줄기 이쪽저쪽으로 만들어진 태극이 아주 뚜렷하겠습니다. 


병산서원은 만대루가 멋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렇듯 습지와 물을 끼고 있기에 전국에 이름을 낼 수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공식 기념 사진.


3. 양진당·충효당과 만송정 마을숲 


이어서 버스를 타고 하회마을 장터에 이르러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양진당(養眞堂)과 충효당(忠孝堂)에 들렀습니다. 양진당은 풍산 류(柳)씨 대종택입니다. 풍산 류씨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가 13세기 들어올 때 처음 자리잡은 자리에 지어진 건물이라 합니다. 


맞은편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랍니다. 서애가 살던 집은 아니고 서애는 이 집이 지어지기 전에 있던 집에서 지냈답니다. 서애는 숨지기 이태 전인 1605년 9월 하회마을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바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607년 5월 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충효당 만지송 그늘 아래에서.


이곳 하회에 양진당과 충효당 같은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이 들어와 마을을 이룰 수 있었던 원인도 모두 물과 습지에 있습니다. 물이 가까이 있고 물기를 머금은 습지가 농사 소출이 많도록 받침해 줬기 때문이지요. 


충효당을 나온 다음에는 제방을 따라 걸었습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벚나무 덕분에 그늘이 시원했습니다. 매미는 열심히 울어대는데, 찢어지는 듯한 도심 매미 울음소리와는 달리 넌출넌출 출렁대는 리듬이 있었습니다. 


그늘이 끝나는 즈음에 놓인 그네에 몇몇 아이들은 매달리고, 어떤 아이들은 만송정 마을숲으로 걸어들어가 솔그늘을 즐기는 축도 있었습니다. 


솔숲을 즐기는 일행.


4. 습지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부용대 


그 앞에 나룻배는 건너편 부용대로 건너갈 이들을 손짓해 불렀습니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 나룻배에 올랐습니다. 탄 사람이 많은 때문인지 배는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부용대는 하회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마주보이는 절벽 일대를 이릅니다. 부용대는 병산서원과 마찬가지로 습지의 심미·심리적 기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를 잘 알려주는 장소입니다. 화천서당·옥연정·겸암정·상봉정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부용대 맞은편 모래밭에서.


낙동강이 휘감아 흐르고 모래사장이 너르게 펼쳐져 있는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동강 으뜸 전망대라 할 수 있습니다.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합니다. 하회마을을 일러 풍수지리에서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물 위에 떠 있는 연꽃 모양이라 합니다. 


옛날에는 노를 저었겠지만 지금은 모터를 움직입니다.


일행은 옥연정을 거쳐 부용대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꼭대기에 이르니 하회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기가 지나온 경로를 짚어보고 어떤 아이는 아래로 나뭇가지를 떨어뜨려 보기도 했습니다. 둘레 산천 경관을 통째로 누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부용대.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머무르며 <징비록(懲毖錄)>을 쓴 장소랍니다. 임진왜란의 원인·전황과 세상 물정 따위를 자세히 기록한 책이지요.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지난 일을 징계(懲)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毖)’ 했는데 바로 이것이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옥연정사 앞 능파대.


서애는 이순신과 권율 등을 조정이 중용하도록 했고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처벌받게 됐을 때 목숨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임진왜란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권율의 중용과 <징비록> 집필 둘 가운데 하나만 했어도 장한데 서애는 둘 모두를 해냈습니다. 


부용대 쪽 모래밭에서.


조금 이른 오후 3시에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으나 추석을 앞두고 막히는 길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경남도청에 도착해서 보니 오후 7시였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차례에는 이번 기행 참가 학생들이 쓴 소감을 소개하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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