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봄비 온 다음 날 다솔사와 남강 모습

김훤주 2013. 4. 30.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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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네 번째 수요일은 비 온 다음날이었습니다. 전날 내린 봄비는 날씨까지 쌀쌀맞았게 만들었데, 이 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천 다솔사를 거쳐 진주 대곡면 한실마을 남강 강가로 생태·역사기행을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비 온 다음날이라는 사실은 여러 모로 좋게 작용했습니다. 다솔사에서는 그동안 묻어 있던 묵은 떼를 말끔하게 씻어낸 전날 비 덕분에 산뜻하고 깔끔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강 강가에서는 덮어썼던 먼지를 빗물에 흘려보낸 나물들을 한 가득 캘 수 있었습니다.

 

다솔사는 여러 모로 정감이 가는 절간입니다. 크지 않고 자그마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된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들머리에서부터 절간에까지 이르는 길이 아주 빼어난 덕분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들머리 숲길은 길지도 짧지도 않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대략 1km 안팎이 되는데, 보통 사람들 걷기에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입니다. 좌우로 적당하게 넘실거리는 이 길은 기울기도 적당해서 지나치게 가파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루하도록 평탄하지도 않습니다.

 

 

들머리 숲길 한 켠에 있는 '어금혈봉표'. 임금께서 혈(穴=무덤)을 여기 쓰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는 표지입니다. 조선 고종 시절 이리 했다는데, 여기 숲과 지형이 좋음을 일러주는 지표가 될 듯합니다.

 

이렇게 올라가면 대양루라는 건물이 처음 마주칩니다. 1500년 전인 500년대에 지어졌다지만, 지금 다솔사에서는 1700년대 세웠다는 이 대양루가 가장 나이가 많은 건물이랍니다. 가장 큰 법당인 적멸보궁이랑 마주보고 있습니다.

 

대양루를 보고 있노라면 그 변천이 떠오릅니다. 아마 옛날에는 이 대양루 아래로 사람들이 드나들도록 돼 있었을 테지요. 가장 큰 법당이랑 마주보고 있다는 위치로 봐서도 그러합니다. 조선시대 들어 불교를 깔보는 풍조가 세상에 넘쳐났다는 사정도 이런 짐작을 하게 합니다.

 

대양루.

당시는 절간 들머리 문을 아주 조그맣게 만들거나 아니면 야트막한 누각 아래로 길을 내었다고 합니다. 불교를 깔보고 스님을 하찮게 여기는 양반들이, 행세한답시고 말을 타고 끄덕거리면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왼편쪽으로 돌아들게 돼 있습니다. 여기 돌아드는 계단 둘레를 보면 불두화가 몇 그루 있습니다. 조금 있다 하얗게 꽃을 피우는 녀석들인데요, 꽃 모양이 부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아직은 꽃몽오리를 물고만 있었습니다.

 

계단 뒤편 위로 적멸보궁 현판이 보입니다.

 

 

제각각 따로 피어났다가도 질 때는 한꺼번에 확 떨어지고 마는데요. 세상만사 모든 일에서 사람들이 이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꽃입니다. 사랑을 하다가도 때가 되면 깨끗하게 털고 헤어질 수 있다면, 권력을 누리다가도 때가 되면 깨끗하게 털고 자리를 뜰 수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대양루가 예전에는 지금처럼 둘레 판자를 둘러쓰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식으로 바람벽을 쳐서 방을 들이면 들였지, 이렇게 널빤지로 벽을 가로막은 누각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아래는 갖은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가 됐고 위층은 사람도 들어가고 당장 쓰이는 물건을 간수해 두는 자리가 됐습니다.

 

다솔사는 임진왜란과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승병들의 거점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당시에는 여기 대양루에서 이를테면 작전회의 같은 것이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평소에는 적멸보궁 앞 뜨락과 함께, 부처님 말씀을 사람들이 들어모시는 그런 도량이었겠습니다만.

 

쌓인 낙엽 사이로 잎을 내민 마삭줄.

 

중수기념비. 조선 시대 세워졌는데요, 여기에는 절간 이름이 영악사靈岳寺라 돼 있습니다.

 

대양루에 슬그머니 들어가 봅니다. 서늘한 기운이 슬금슬금 다가듭니다. 아직 날씨가 덜 따뜻한 탓이겠거니 여겼지만요, 어쩌면 여름에도 여기 들어서면 이런 서늘함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다른 절간 비슷한 공간들이 다들 그렇기 때문이지요.

 

슬슬 거닐며 한 쪽 구석을 보니 수명을 다했겠다 싶은 법고가 옆구리가 터진 채로 나와 앉아 있습니다. ‘그래 이제 당신도 이승을 떠나 열반에 들어야지’, 덕담 같잖은 덕담을 한 마디 던지고는 도로 나왔답니다.

 

옆구리터진 법고. 불교에서 법고는 세상 모든 가죽 갖춘 짐승들을 불러 일깨우는 구실을 한답니다.

 

다솔사에서 가장 큰 법당은 적멸보궁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1980년대 또는 90년대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여기 모셨는데요, 그러니까 그 전에는 여기가 대웅전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절간에는 대웅전 대신 적멸보궁이 있는데, 적멸보궁에는 대웅전과 달리 불상을 모시지 않는답니다. 왜냐, 부처 그 자체인 진신사리를 모시기 때문입니다. 부처 그 자체가 있으니까, 부처를 본떴을 뿐인 불상 따위는 필요하지 않는 것이지요.

 

적멸보궁 정문 아래에 붙어 있는 안내문. "스님 외 출입 금지" 따위 글귀만 봐 왔던 제 눈에는 나름 정겨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다솔사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누워 있는 와불(臥佛)입니다. 물론 독립된 불상이 아니고 장식처럼 돼 있기는 했지만, 일반 적멸보궁 통념에 비춰보면 선뜻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신앙 차원에서야 충분히 풍성하게 보장돼야 할 바겠습니다만.

 

적멸보궁 안으로 와불이 보입니다.

 

 

다솔사는 불교를 떠나서 더욱 이름나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일제 강점기 여기 머물면서 왜색 불교에 맞서 조선 불교 정화 혁신 운동의 거점으로 삼은 데가 다솔사입니다. 거기 안심료가 한용운 선생의 거처였다고 합니다.

 

안심료.

 

지금은 이렇게 간단하게 한 줄로 읊어도 그만이지만, 당시 운동을 벌이던 그이들 관점에서 보면 거기에 매우 애달프고 간절한 사연과 사정이 얼마나 많이 스며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바로 앞에까지 자동차를 몰고 올 수 있지만, 그 때는 또 얼마나 깊고 깊은 산 속이었겠습니까?

 

안심료 앞에 서 있는 편백인가 하는 나무에도 관련 역사가 있습니다. 만해가 누군가를 위해 심었다는 나무입니다. 안심료는 또 김동리의 명품 소설 <등신불>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당시 김동리의 형이 다솔사에 머물고 있었던 인연으로 이리 엮였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솔사에서는 이런 따위를 크게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세속의 이름남으로부터 초월한 듯한 모습인데, 한편으로 불교 신앙 체계 안에서 보면 그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해가 머물렀거나 말거나, 김동리가 <등신불>을 썼거나 말거나, 아무 관계없이 다솔사는 그냥 다솔사인 것이지요.

 

응진전. 극락전.

 

차밭에서 내려다본 다솔사 전경.

 

그런데, 적멸보궁과 응진전과 극락전을 지나 위쪽 만들어져 있는 차밭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안심료가 바깥에서 보이는 바와 달리 나름대로 크고 풍성함을 알았습니다. 안심료는 ‘ㄱ’자 모양으로 건물이 붙어 있는데, 바깥에서는 방문만 보일 뿐이어서 메마르고 작은 느낌을 줍니다.

 

안심료 안쪽 풍경.

 

하지만 ‘ㄱ’자 안쪽으로 마당이 있고 마당 한가운데 돌확이 있고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갖은 것들이 갖춰져 있는 모양을 봅니다. 덩달아 느낌이 풍성해집니다. 안쪽 풍경의 구체성이 제게는 입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솔사에서 돌아나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들머리 밥집입니다. 산채비빔밥도 좋았습니다. 손수 만든 두부 무침도 좋았습니다. 덜 맵게 무친 도토리묵도 좋았습니다. 누룩 맛이 짙게 비치는 토종 막걸리는 더욱 좋았습니다.

 

이렇게 거닐고 놀고 먹고 마신 다음 일행은 남강댐 상류 남강 원형을 볼 수 있는 진주 대곡면 한실~마전마을로 가서 강둑을 걸었습니다. 물론 그냥 걷기만 했겠습니까? 쏟아지는 햇살 아래 여기저기 쪼그리고 앉아 봄이 안겨주는 이런저런 나물들을 선물로 거둬들였습니다.

 

차르르 차르르 강물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좋았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햇살이 따가웠는데, 그래도 저는 많이 타지는 않았습니다.(또 좀 탄다고 무슨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지요.) 게다가 강가답게 사람이 시원하게 불었습니다.

 

어떤 데는 꽃핀 유채도 나와 있었습니다.

 

강둑에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았고요 조금 떨어진 아스팔트 찻길에도 자동차는 거의 없었습니다. 덕분에 여기서 뜯은 나물들은 공해와는 아무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이날 참여한 대부분 사람들은 넘치도록 나물을 캤습니다.

 

일행 가운데 이 둘은 거의 나물은 캐지 않은 줄로 저는 압니다. ^^

 

물론 저도 캐기는 했지만, 제 몫으로 챙기지는 않았답니다. 함께했던 일행들에게 다 나눠드렸습니다. 저는 이게 ‘남는 장사’인 줄을 잘 압니다. 나중에 그이들 나물로 반찬을 만들고 쑥으로 떡을 만들면 그게 제게도 돌아오기 마련이거든요.

 

이렇게저렇게 다니면서 보는 강변은 이제 새 싹으로 푸르렀습니다. 그러나 온통 푸르리라고 여기면 착각입니다. 지난해 말라죽은 가지나 풀대들이 한편으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해 스러진 풀섶을 이불 삼아 새싹이 돋고 있습니다.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 같은 쓰레기도 있습니다. 지난해 말라죽은 풀대 밑에서는 매우 연해 빠진 초록들이 키를 키우고 있을 테고요, 찢긴 비닐을 움켜잡은 막대들은 아직도 뻘흙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생물과 무생물, 태어남과 스러짐이 맞물리고 쓰레기조차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생태계인 모양입니다. 이것들은 아름답기도 하고 아름답지 않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풍경.

이날 저는 강변 수풀을 헤치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새들을 무척 많이 봤습니다. 물론 제가 이름을 아는 녀석은 별로 없었습니다. 왜가리 백로 꿩 제비 이런 정도일 텐데요, 이런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녀석들이 곳곳에서 날아올랐습니다.

 

 

종류가 여럿이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셈인데요, 그러면 여기 일대에 새들 먹이가 많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일대 생태계는 여전히 풍성한 편이라는 얘기도 됩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튼튼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날 어느 누구는 노루 또는 고라니가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는데, 이 또한 이쪽 생태계의 풍성함을 일러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라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녀석도 사람 못지 않게 놀랐으리라 저는 짐작합니다.

 

마지막에는 미나리를 뜯었습니다. 밭이 아니라 강가에 절로 자라는 미나리를 왕창 꺾었습니다. 저는 신바람이 나서 나물칼로 싹둑싹둑 베었습니다. 좀 많이 장만이 된 모양인지, 이날 동행한 이들이 다들 조금씩이나마 나눠가질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봄비에 씻긴 다솔사 정갈한 풍경을 눈에 담고, 토종 음식으로 점심 때 배를 채우고, 선선한 강바람을 받으며 남강 원형을 강둑을 걸으며 몸으로 누리고, 싱싱한 나물과 미나리를 나름 풍성하게 챙겼습니다.

 

강둑을 걸어가는 일행들. 불룩하게 배가 부른 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지원을 받아서,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가 주최하고,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주관하는 2013년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두 번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생태·역사기행은 5월에도 이어집니다. 5월 15일 수요일, 산청 단성면에 있는 성철스님 생가·겁외사와 옛집으로 이름난 남사마을, 그리고 고즈넉하고 아담한 절터 단속사지를 함께 둘러봅니다. 점심도 푸짐하게 나오는데요, 그럴 듯한 해설도 곁들여집니다.

 

참가비는 3만원이고, 상담이나 문의는 055-250-0125 또는 010-8481-0126으로 하시면 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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