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고려대는 이미 죽었다?

김훤주 2008. 2. 2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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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대학 동창입니다. 물론, 당선자와 동창이라 해서 전혀 기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거짓말쟁이가 저보다 스무 해 가량 먼저 입학한 동창이고 대통령 당선까지 됐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억수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제가 82년에 들어간 이 대학교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러시아에서 귀화한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 오슬로대학교 교수가 말한 대로 고려대는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


고려대에서 보낸 4년이 제 삶을 규정했고 지금도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철학을 배웠고 문학을 공부했으며 역사와 인문을 더듬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포부를 키웠고 한 여자를 만나 사랑했으며 마침내 결혼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운동을 시작해 지금껏 하고 있으며 나뿐 아니라 남까지도 위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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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가 창작과 비평에 실은 글입니다.


제게 고려대학교는 이처럼 단순한 학교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제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만들어지려고 꿈틀대던 태자리 그 이상이었습니다. 박노자 씨가 ‘창작과 비평’ 2007년 가을호 ‘한국 대학 사회의 슬픈 단상들-화려한 건물, 마비된 양식’에서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박 씨는 여기에서 ‘1991년에 3개월간 언어 실습 일환으로 있었던 고려대’를 추억합니다.

“교실에서의 …… 강의와 수업부터 안암돌 뒷골목에서의 막걸리 폭음까지, 지하 ‘운동권’ 모임에서의 견문부터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일까지, 지적 도전 ‘대듦’ 그 자체로 느껴졌던 고려대”였습니다. 박 씨는 또 “‘평생 가난한 노동자와 부대끼면서 살고 싶다.’던 여자선배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나는 16년 전 고려대에서 ‘생명’ 그 자체를 봤다. 목마르고, 늘 뭔가 찾고 있고, 때로는 절망과 좌절을 하고, 때로는 배제와 적대의 극단까지 가는, 자연이 낳은 그대로의 생명이었다.”고 적었습니다.

또 저하고 비슷하게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어찌 보면 그 때 그 경험이 ‘만들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려대학교는 저항의 거점이었습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레지스땅스를 하라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공동체의 그 기억만큼은 간직하려 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후배 학생들이 그리 하리라 여기며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제는, 제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라고, 현재형에서 과거형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려대는 죽었습니다. 법 잘 어기고 돈 잘 버는 삼성왕국 이건희한테 철학박사 학위를 주면서 한 번 죽었습니다. 사소한 일로 빌미삼아, 돈벌레 철학박사 만들기를 반대한 학생들을 출교하면서 한 번 더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려대학교에 목숨이 붙어 있는 까닭을 저는 학생들에게서 찾았습니다. 청신한 기풍이 넘치는 후배들이 있는 이상 고려대학교는 앞날이 있다,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겼습니다. 청년들이니까, 이런저런 꿈과 이상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겼습니다. 학생들이니까, 모든 선험 진리라는 것들을 의심하고 따져볼 것이다 이렇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마저 접어야 할 때가 오고야 말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배 학생들의 청신한 기풍을 느끼지 못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 착각이거나 오인이기를 바랍니다. 고려대학교에서 저항의 가장 큰 상징은 4.18의거입니다. 고대생들이 1960년 4.19 전날 거리시위를 벌이다가 정치깡패들한테 테러를 당했습니다. 4.18의거는 4.19혁명이 일어나는 단초가 된 사건입니다. 고려대 교정에 4.18기념비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기념비에는 조지훈 시인이 쓴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라는 제목 아래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압제의 사슬을 끊고/분노의 불길을 터트린/아! 1960년 4월 18일!/천지를 뒤흔든 정의의/함성을 새겨/그날의 분화구 여기에/돌을 세운다.”고 쓰여 있습니다.


네이버 대학 사진 콘테스트를 봤습니다.( http://photo.naver.com/mission/university/ ) 며칠 전 우연히 찾아들어가졌습니다. 고려대 사진들도 잔뜩 올라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그럴 듯한 건물 사진이었습니다. 물론, ‘정문, 후문, 학교 상징물(탑), 본관, 학생회관, 도서관, 그  외 건물, 운동장/체육시설, 식당, 연구실/강의실, 동아리, 데이트 코스, 조경시설, 기타’로 구분해 받아, 건물이 ‘우대’를 받도록 돼 있는 사정도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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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주년 기념 삼성관이네요. 대학 사진 콘테스트에 올라 있는 사진 하나를 갖고 왔습니다. 원본출처 : http://photo.naver.com/view/2008021421531757880


어쨌거나 ‘실망’, ‘절망’이었습니다. 사진은 LG-포스코관, 동원글로벌센터, 백주년 기념관, 라이시움(무슨 뜻인지요?), 삼성관, 이명박 라운지, 인촌기념관 따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돈으로 찌든, 자본에 팔린, 겉보기에 화려찬란한 사진들이었습니다. 김성수는 1932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교장으로 들어앉았다고는 하지만, 반민중 친일 행위를 많이 했으므로 기릴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명박 라운지 사진은 더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명박 교우님(경영 61, 서울시장)의 고귀한 뜻과 정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명박 교우님은 현대건설 사장과 제 14 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셨습니다.” ‘고귀’라는 낱말이, 이토록이나 ‘천박하게도’ 쓰일 수 있음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이처럼 화려한 건물들을 자랑스레 올려놓은 사진들은 많았지만, 교정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4.18의거 기념비는 단 한 장도 없었습니다. 행여나 싶어 두 번 세 번 훑어봤지만, 어깨를 겯고 교복을 입은 채 울부짖듯이 외치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긴 그 기념비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올린 사진들을 보면, 저항은 물론이고 저항의 기억조차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진을 찍어 올린 대부분은 학생일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본에 포섭됐다는 의심을 저는 이번에 하게 됐습니다. 학생들 의식이 근본에서부터 자본에 잡아먹혔다는 혐의를 저는 이번에 두게 됐습니다. 학교 당국은 죽었지만, 교수의 대부분은 죽었지만, 그래도 학교는 살아 있고 그 까닭은 후배 학생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저의 믿음도 이번에 타살됐습니다.


박노자 씨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암골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참 아픈 이야기지만”, “‘모든 특권들이 양심과 양식을 마비시킨다.’는 말은 옳을 수밖에 없다.”-재벌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른바 명문 고려대의 특권에 학생들조차 완전 감염됐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박 씨는 “‘대듦의 정신’이 증발하는 날에는…… 죽고 만다.”고 붙였습니다.

교수도 맛이 가고 학교 행정 당국까지 맛이 가도 학생이 살아 있으면 학교는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배 학생들조차 돈맛에 사로잡혀 포로 신세가 돼 버렸다면 학교에 앞날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착각이기를 한 번 더 바랍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저는 1963년 8월 경남 창녕에서 났습니다. 함양과 창녕과 부산과 대구와 서울을 돌며 자랐고 1986년 경남 마산과 창원에 발 붙였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는 1999년 들어왔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한 뒤에는 노동조합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일삼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발바닥만큼은 뜨거웠던, '직업적' 실업자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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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러시아 태생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지 13년이 다 돼가는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의 박노자 교수. 저자가 한국의 대학, 종교, 군대, 인종주의 등 한국사회에서 금기되거나 기피됐던 이야기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언론과 지배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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