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시내버스로 누리는 악양 들판과 마을들

김훤주 2011. 9.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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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가을입니다. 추석이 지났어도 며칠 전까지는 더위가 여전했건만 나뭇잎은 짙은 초록을 벗어나 노랗거나 발갛게 바뀌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자라는 벼도 이삭이 패고 나락이 여물어 갈수록 고개를 더 숙입니다. 어디서는 벌써 가을걷이를 했다는 소식도 들려옵지요.

올 들어 유달리 잦았던 비도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짱짱한 햇살 덕분에 날씨가 우중충해 자라지 못했던 야채랑 곡물들이 실하게 자랍니다. 사람들 손길도 덩달아 바빠져 쉴 틈이 없어졌습니다.

9월 6일 아침 일찍 농촌 들판으로 나섰습니다. 하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악양면 노전 마을로 가는 오전 7시 40분발 버스를 탔습니다.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섬진강은 언제나 마음을 부드럽고 넉넉하게 만든답니다. 손님을 서넛밖에 태우지 않은 버스는 소설 <토지>의 최참판 댁으로 이름난 평사리 들판 들머리에서 섬진강과 헤어집니다.

섬진강을 떠나보낸 버스는 악양천 따라 오르면서 오히려 손님이 늘었습니다. 악양면 사무소가 있는 정서 마을을 지난 다음 악양 가장 북쪽 등촌리 중기마을까지 버스는 들어갑니다. 종점에 앞서 8시 5분 즈음에 상중대마을 들머리서 내렸습니다. 정류장에는 '노전'이라 적혔지만 노전마을은 정류장 바로 옆 무덤이 있는 비탈을 타고 올라가야 나옵니다.

노전마을에 들어가 오른쪽 위로 걸었습니다. 나락들은 제법 알이 여물었고 드문드문 자리잡은 토란 밭 이파리에는 제법 굵은 물방울이 구릅니다. 위쪽 끄트머리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틀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봉숭아.

호박.

토란대.


시골 농가의 전형이 펼쳐집니다. 야트막한 담벼락에는 오이랑 호박이랑 수세미 같은 것들이 자랍니다. 앞에는 봉숭아가 갖가지 색깔로 꽃을 피웠고 너머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따위들이 아직 덜 여문 열매들을 넘치도록 매달았습니. 슬레이트 지붕 위 굴뚝은 전국농민회총연맹의 '민족통일농업실현' 포대를 뒤집어썼습니다.

길가 감나무와 호박이 어우러진 푸른 그늘 아래에는 까만 고양이가 전혀 긴장하지 않고 가만히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쳐다봅니다. 살짝 웃어주고는 층층이 다락을 이룬 들판으로 눈길을 던지면 거기에 갖은 것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수수, 노각, 취나물, 머위, 토란, 콩, 들깨, 무, 고사리, 아주까리, 도라지, 더덕, 수세미, 오이, 호박, 옥수수, 참깨, 박, 열무, 상추……. 게다가 감나무, 차나무, 배나무, 자두나무, 뽕나무도 있습니다. 이리 많은 농작물을 한꺼번에 보기도 어려운 노릇이겠습니다.


노전마을 아래쪽 끄트머리에는 명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십일천송'이랍니다. 멀리서 보면 꼭 한 그루 소나무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열한 그루가 한 데 어울려 있습니다. 옛날 임금이 받치던 일산(日傘)처럼 모양이 장합니다. 크거나 작은, 굵거나 가는 나무들이 크게 떨어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달라붙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다른 데서는 이런 소나무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십일천송의 아랫도리들.


십일천송 아래로는 흙길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을 지나 내려가다 오른쪽 하얀 건물이 나오는 지점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잡아들면 상신마을로 이어집니다. 이 마을에는 돌담길이 꽤 남아 있습니다. 바닥은 콘크리트지만, 감나무나 대추나무 그늘 아래로 돌담길을 걸으면 느낌이 새삼스럽습니다.

노전마을과 상신마을은 다르면서도 비슷했습니다. 노전마을은 돌담이 적은데 농촌스러운 맛은 더합니다. 길가와 마당에 심긴 풀과 나무가 그리 만드는 모양입니다. 상신마을은 번듯한 새 건물이 몇몇 들어섰기 때문인지 그와 맛이 다릅니다.

다만 집과 밭이 한데 어울려 있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둘러싼 돌담 때문에 제주도 시골같다는 느낌도 드는데, 제주도는 한 가지 작물만 심기지만 여기는 여러 작물이 심겨 공생하는 점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상신마을을 지나 1·6일 악양장이 서는 정서마을에 들러 악양천변 취간림(翠澗林)에 들었습니다. 취간림이라면 곱고 짙은 푸른색을 띠는 산골 물가에 자리잡은 수풀이라는 뜻이 됩니다. 나락 익는 들판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니 과연 그랬습니다.

왼쪽이 취간림.


숲 속에 들어가니 잘 익은 돌감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크지 않아 배불릴 정도는 못됐지만 그래도 서넛 따 먹으니 시장기는 조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지리산 항일 투사 기념탑이 놓여 있는 여기 팔경루에서 발품을 잠시 쉬었다가 악양교를 건넌 다음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 들판으로 나섭니다. 요즘은 벼만 심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어떤 데는 다른 것을 심으려고 경운기가 들어가 있기도 했습니다.

또 콩이나 토란 따위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들판은 온통 넉넉하게 출렁거립니다. 덩달아 들판을 전후좌우로 끼고 걷는 사람 마음도 풍성해집니다.

길은 이런 들판에서도 사통팔달 가로 세로 지르며 내달립니다. 바람은 따가운 햇살을 잘게 부수며 불어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이리저리 거니는 들판길은 결국 평사리 최참판 댁으로 이어집니다. 소작인들 살았던 세트장을 지나 최참판 댁 별당과 안채와 중랑채와 행랑채를 다시 지납니다. 마지막 사랑채에 들러 들판을 눈에 담았습니다.

저기 아래 동정호와 부부송은 평소 같으면 자기 자태만 뽐내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들판 누런 빛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서 자기 역할을 찾는 듯합니다.

가을이 오거들랑, 단풍 놀이 즐길 생각에 앞서서, 곡식들 무르익어가는 들판에 나가 몸으로 마음으로 먼저 맞아들이고 볼 일입니다. 낮 12시 5분 못 미쳐서, 화개를 출발해 악양을 거쳐 하동 읍내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평사리 아래 봉대리 정류장에서 받아 탔습니다.

점심은 읍내 장터 보리통(055-883-8939)에서 청국장을 먹었는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빔밥을 주문한 옆 자리 손님들에게 나온 채소가 좀더 탐이 났을 따름이랍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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