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당신은 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계십니까?

김훤주 2010. 5. 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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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끊을 사람은 읽지 말아야 할 책

임범 : 1962년생. 이십대엔 술을 많이 마셨고 삼십대엔 폭음했고 사십대에 술을 즐기다가 지금은 애주가가 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자 그만두고 반 백수로 지내면서 글을 연재하기 시작할 때 내 생각이 그랬다. 술에 담긴 여러 기호들을, 영화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피자.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가 아니라, 취향과 기호의 주관적 세계를 공유하는 온전한 잡문을 쓰자.

그랬는데, 글을 쓰면서 스스로 놀랐다.
그렇게 즐겨 마시던 술에 대해, 이렇게 몰랐다니, 수년간 살을 섞어온 여자의 가족 관계, 혈액형 따위를 모르고 있었던 것과 같은 미안함과 궁금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나뿐이 아니었다. 내 주변의 술꾼 대다수가 술에 무지했다."

1장 스피릿, 2장 위스키, 3장 폭탄주, 4장 맥주, 5장 기타 재제주, 6장 칵테일. 임범은 이리 여섯 장으로 나눈 다음 영화와 술을 함께 버무린 글 스물다섯 꼭지를 <술꾼의 품격>에 담았습니다.

"미국에 금주령이 내려져 있던 1920년대 중후반 미국 몬태나주의 시골 마을. 이십대 초중반의 남자 형제가 밀주 집에서 만났다. 늦게 온 형 노먼이 카운터에 앉으며 술을 시킨다. '보일러 메이커 둘!'

바텐더가 300ml 되는 잔에 가득 담긴 맥주와 함께, 우리식 스트레이트 잔보다 조금 큰 숏글라스에 위스키를 가득 채워서 두 개씩 내놓는다.

노먼은 숏글라스를 맥주잔에 던지듯 집어넣는다. 맥주 거품이 올라오면서 넘쳐흐르는 잔을 들고 '원 샷' 한 뒤 빈 잔 속에 든 숏글라스를 입에 한 번 물었다가 내뱉는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동생에게 말한다. '나, 사랑에 빠졌다.'


<흐르는 강물처럼>(로버트 레드퍼드 감독, 1992년)은 소설가 노먼 매클린(1902~1990)이 실제 가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젊을 때 별명이 전도사였던 노먼은 폭음을 할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그가 과격하게 단숨에 들이켜는 보일러메이커는, 그의 마음 속에 처음 피어난 사랑의 가슴 벅참을 동생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체로 적격이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쓰이는 보일러메이커가, 한국에서 폭탄주가 되면 달라진답니다.

"이 영화에서 어쩌다 기분이 정말 좋을 때, 흥에 겨워 한 잔 마시는 술로 나오는 보일러메이커, 즉 폭탄주가 한국 영화로 넘어오면 만용과 광란과 낭비의 상징처럼 등장하게 된다."

"2000년에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가 나왔다. 주인공은 국문학 박사면서 강의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백수다. …… 주인공보다 선수 쳐서 학장에게 돈 싸들고 갔던 한 친구가 나올 때, 룸살롱에서 머리 하얀 학장이, 맥주에 양주를 타서 잔을 돌려 회오리를 일게 하는 폭탄주의 일종인 '회오리주'를 만든다.

이 친구는 술을 못하는 이였다. 학장이 주는 회오리주를 다 받아 마시고는 취해서 지하철 철로쪽으로 머리를 내놓고 오바이트하다가 지하철에 치여 죽었다.

다음은 주인공 차례. 학장이 회오리주를 만드는 모습이 똑같이 그로테스크하게 리플레이된다. 먼젓번에는 웃겼지만, 이번엔 조금 공포스럽다. 주인공도 지하철에서 똑같은 포즈로 오바이트를 한다. 하지만 술이 조금 더 셌던 탓에 그는 살아서 교수가 된다.

여기서 회오리주, 폭탄주는 뇌물 거래가 성사됐음을 알리는 징표다. 맥주잔 속에 양주와 맥주가 섞여 돌면서 일으키는 거품의 회오리가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대가로 주어지는 찰나적인 쾌락을 은유하듯."

한국인들이 폭탄주를 죽어라고 마셔대는 까닭이 무얼까요? 임범의 설명입니다.

"회식은 좌석 이동이 쉽지 않다. 여럿이 말하기보다 상사가 웅변하기 십상이다. 이런 자리는 어차피 과음을 필요로 하는데, 잔술을 주고받는 것보다 폭탄주를 돌릴 때 이점이 있을 수 있다. 잔술을 주고받으면 상사가 많이 마시게 되는데 폭탄주는 공평하게 돌아가니까 상사의 입장에서 덜 마실 수 있다.

또 폭탄주는 제조하느라 돌리느라 마시고 난 뒤에 박수 치느라 시간을 끌기 때문에 얘기할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부하들의 입장에서 폭탄주는 자기 차례가 됐을 때 싫어도 먹게 하는 술의 '강권'은 있지만, 상사 혼자 떠드는 '강변'이 줄어드니 술 맛은 좋아질 수 있다.

……여전히 상명하복과 일치단결을 필요로 하는 한국의 조직문화 속에서 폭탄주는 조직 구성원들이 바뀐 여건에 맞춰 스스로 불러들인 음주 방식인지도 모른다."

폭탄주를 맛있게 만들어 마시는 방법도 일러줍니다. 물론 저같은 인간은 이런 데 전혀 상관하지 자기 마음대로 섞어 마시지만 그렇지 않은 이라면 한 번 따라해 볼만도 하겠다 싶습니다.

"폭탄주의 맛을 살리려면 맥주의 거품이 충분히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릿한 냄새가 난다. 거품을 일게 하기 위해 회오리를 만들고, 얼음을 넣어 젓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양주를 적당량 넣은 양주잔을, 맥주를 채운 맥주잔에 떨어뜨리되 양주잔이 떨어지면서 맥주잔의 측면을 살짝 건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유거품처럼 고운 거품이 정말 폭탄 터지듯 풍성하게 올라온다. 그렇게 만든 폭탄주에선 비린내는커녕 우유 맛이 난다. 그리고 또 하나. 폭탄주는 말이 그리울 때보다, 말에 지쳤을 때 마시는 게 좋다."

어러면서 폭탄주-보일러메이커의 '탄생 설화'까지 임범은 다루고 있습니다.(나중에 책 <술꾼의 품격>을 읽는 재미를 떨어뜨릴까봐 소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게다가 더 나아가 폭탄주에다 영화를 섞어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자기 나름으로 일러줍니다. 이런 글쓰기가 폭탄주에 대해서만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맥주나 양주 따위 모든것에 대해 다 이렇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읽다보면 '그렇게나 마시고도 이렇게나 몰랐다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나 어떤 지식 따위를 익히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답니다. 글쓴이 임범이 술을 마시는 데는 술에 관한 지식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럴 따름입니다. 술을 끊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악화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떠신지요? 술꾼 여러분. 값싼 술을 마신다 해도 어쩌면 하루 저녁 술값에서 반의반만 아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 번 읽어보시면 술 맛이 더욱 좋아질 것기도 합니다만.


김훤주

술꾼의 품격 - 10점
임범 지음/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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