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지심도... 그 섬엔 온통 동백뿐이더라

김훤주 2010. 4. 2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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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경남 거제 지심도를 다녀와서 19일 '지심도엔 동백만 피어 있지는 않았다'를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동백나무와 동백꽃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섬이다 보니 그것말고 다른 것도 살고 있으며 또 다른 것들도 나름대로 빛나는 존재더라, 하는 뜻을 담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날 지심도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아니었습니다. 지심도를 규정하는 힘은, 누가 뭐라 해도 동백에 있었습니다. 지심도에 다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심도에는 동백밖에는 있지가 않았습니다.

동백나무 그늘, 어린 동백나무, 떨어져서도 빛나는 동백꽃, 매달려서도 좀은 쓸쓸한 동백꽃, 동백숲이 만들어낸 그늘, 동백숲이 만들어낸 그늘 사이사이 들여다보는 햇살, 동백에 동화된 사람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심도에도 동백 말고 다른 존재들도 살고 있기는 하지만, 동백이 없다고 한다면 지심도는 지심도라 할 수 없을 정도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새로 한 번 올려 봅니다. '다시 보니까 지심도에는 온통 동백뿐이더라', 입니다.

1. 지기 전에 이미 쓸쓸한 동백꽃

먼저 나무에 피어 있는 동백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르는 이들은 동백이 한꺼번에 확 피어나는 줄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동백은 송이마다 저 혼자 핀다. 동백 숲에 가도 가지에 매달린 꽃들을 벚꽃의 수없는 송이처럼 볼 수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피어 있는 동백이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한 기운을 뿜는 까닭이 여기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심도의 동백꽃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사람이 적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습니다만.




나무 아래에서 위로 보고 찍었습니다. 꽃송이가 제법 달렸습니다.





2. 동백꽃은 떨어져서 더욱 빛난다

동백꽃은 질 때도 무리짓지 않습니다. 하나씩 질 때 무슨 투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뚝 뚝 단박에 한꺼번에 떨어진답니다. 그러나 동백꽃은 떨어진 다음에도 곧바로 시들지 않고 오래 갑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무에 매달린 동백꽃은 얼마 되지 않지만, 바닥에 깔린 동백꽃은 수북할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동백꽃은 떨어져서 더욱 화사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3. 동백나무도 당연히 새끼를 친다

저는 동백 열매를 처음 봤을 때 나무 열매가 아니라 공작 제품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이들 갖고 놀던 유리 구슬처럼 커다란 녀석이, 꼭 장인의 손을 거쳐 깎여진 나무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 녀석이 동백이 꽃 지고 상처 아문 자리에서 여물어, 열매집을 벗어나와 땅에 떨어진 다음 이렇게 어린 동백나무로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었습니다.

이 녀석들이 얼마나 지나야 지금 어른 나무처럼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과정이 있기에 동백숲이 영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순환과 자람에서, 저는 망연히 서늘함을 느낍니다. 동백나무는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달라 세대를 이어가도 있는 힘껏 목숨을 거는 따위는 하지 않지만, 저런 순환과 자람에 인간을 대입하는 버릇이 제게 남아 있기 때문이랍니다.

숲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어린 동백나무 잎사귀를 간지럽힙니다.


3. 동백숲 상큼한 그늘과 속살대는 햇살

저는 어쨌거나 이런 동백숲은 첫 경험이었습니다. 소매물도나 다산 초당이 있는 대흥사 동백숲, 고창 선운사 동백숲을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기세좋게 뻗은 동백나무들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울창하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저기 저 끝까지 눈길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질러가는 눈길을 동백나무들이 얼기설기 편을 이뤄 가로막았습니다.

그늘은, 참 좋았습니다. 제가 이름을 모르는 새들이 여러 가지로 소리를 내는 가운데 어떤 동백나무는 서로에게 서로를 몸통을 맞대도록 기대어, 바람을 끼고서 끼익끼익 색다른 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햇볕이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햇볕이 뚫고 들어오지 못한 자리에 그늘이 만들어졌고 뚫고 들어온 자리에는 햇볕이 화살처럼 꽂혔습니다. 꽂힌 자리에서는 눈부신 햇빛이 팡 터져올랐습니다.

이 햇볕 화살을, 이리저리 흔드는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은 나무더러 소리를 내게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햇살이 흔들리니 동백숲 전체가 너울을 타듯 울렁거렸습니다.



4. 아득한 동백숲 오솔길

지심도 오솔길은 대부분 양 옆으로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습니다. 그렇게 우거져 있으니 동백꽃이 뚝, 뚝, 떨어져 발 아래 놓입니다. 그렇게 우거져 있으니 그늘이 짙습니다.

짙은 그늘을 밟으며, 목이 꺾어진 동백 꽃송이를 피해가는 발길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떨어져서 더 화사한 저 녀석들을 사람이 감히 으깨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다가도 한 번 슬며시 앞을 바라보거나 뒤를 돌아다보면 아득한 기운이 오솔길 굽이치는 저쪽 너머에서 스멀스멀 밀려옵니다.

아득한 기운이 아늑함으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삶에서 그 아득함과 공감되는 부분을 하나 떠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아득한 무엇'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5. 지심도의 길, 사람의 길

길은 사람이 다닐 때 완성됩니다. 저는 그것을 그 날 지심도에서 좀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기 사진에 보이는 식구들이 뛰었다면 뛰는대로 길이 완성될 것이고, 지금처럼 걷는다면 걷는대로 완성될 것입니다.

사람이 뛰거나 걸으면 길도 그에 걸맞게 반응할 것 같은 느낌이 지심도 오솔길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덤덤한 표정으로, 너 뛰느냐 또는 너 걷느냐 이러면서 가만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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