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를 아시나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3·4월혁명의 대표적인 열사가 바로 김주열입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모습.
그는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3월 15일 마산시청 앞 시위에 앞장서다 경찰이 쏜 미제 직격최루탄에 눈과 두개골이 관통당해 처참하게 숨졌습니다. 전북 남원시 출신의 김주열은 당시 마산상고에 갓 합격한 17세의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경찰은 김주열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그날 밤 그의 시신에 돌을 매달아 마산앞바다에 수장시켰습니다. 이렇게 김주열이 행방불명되자 남원에서 아들을 찾으러 마산에 온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온통 마산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우리 아들 주열이를 찾아달라"고 절규했습니다.
하늘도 분개한 탓일까요? 마침내 4월 11일 오전 11시 김주열의 처참한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에 떠올랐습니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은 마치 권투하는 자세로 두 팔을 든 채 오른쪽 주먹을 쥐고 있었습니다.
김주열의 시신 주위로 마산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시신이 도립병원으로 옮겨지는동안 군중은 더욱 불어났습니다. 참혹한 시신을 본 시민들은 목숨을 건 2차 봉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4월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산시민의 봉기를 시작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승만은 김주열의 죽음으로 촉발된 국민의 거대한 저항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4월 26일 하야할 수밖에 없었고, 부통령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게 됩니다.
이처럼 정권의 무너뜨린 최초의 민주항쟁이 1960년 3·4월혁명이었고, 그 혁명의 영웅이자 최초의 민주열사가 김주열이었던 것입니다. 1960년 국회조사단 앞에서 행방불명된 아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김주열 열사 영정. 김주열 열사의 입학동기이기도 한 김영만 위원장.
그러나 김주열 열사는 당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경찰에 의해 사실상 강제 매장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산의 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 안치되어 있던 김주열의 시신은 4월 13일 밤 뒷문으로 몰래 난입한 경찰에 의해 탈취당했습니다. 이렇게 빼돌려진 열사의 시신은 밤새 남원으로 옮겨져 14일 오전 고향집에 도착하게 됩니다.
경찰은 어머니 권찬주 여사에게 시체인수증을 들이밀며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합니다. 권찬주 여사는 어금니를 악물고 경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서울로 운구하여 경무대(대통령 이승만의 관저)나 이기붕 집으로 갖다주라."
그러나 결국 김주열의 시신은 무장경찰이 에워싼 가운데 강제매장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처참하게 숨진 것도 모자라 27일간 깊은 바닷속에 잠겨있던 김주열은 장례식도 없이 땅속에 뭍혀버린 것입니다.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김주열의 장례식은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박정희 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군사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50년이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김주열의 장례식을 늦게나마 치러줄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50주기가 되는 올해 들어 민간단체인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마산대표 백남해 신부, 남원대표 박영철)가 나섰습니다. 당시 치르지 못한 장례식을 50주기를 맞아 마산에서 범국민장으로 치르자는 것이었습니다. 각계각층 인사들이 나서 범국민장 준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마산의 시민운동 원로인 김영만 선생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 그리고 민족민주열사추모연대 박중기 의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김주열 열사와 마산상고 입학동기이기도 한 김영만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주열이 없었다면 마산 3·15 시민봉기가 4·19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3·15때 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마산시민들이 용공분자로 몰려 엄청난 보복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산시민들이 앞장서서 꼭 김주열의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김주열은 남원의 아들로 태어나, 3·15의거를 통해 마산의 아들이 되었고, 4월혁명을 통해 국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은 그의 시신이 떠올라 4월혁명이 시작된 4월 11일로 정해졌습니다.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셈입니다. 오전 11시 시신인양지인 마산 중앙부두에서 장례를 치른 열사의 운구는 마산도립병원(마산의료원)과 3·15의거탑, 남성동파출소, 창동, 북마산파출소, 마산상고(용마고등학교)를 거쳐 행진한 후 고향인 남원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마산시는 물론 경남도나 정부 등 어느 한 군데서도 재정지원이 한 푼도 없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은 김태호 도지사는 추모사도 해줄 수 없다고 한답니다.
결국 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7일 오후 6시 창원 성산종합복지관에서 범국민장 기금마련을 위한 일일주점을 열기로 했습니다. 뜻있는 많은 시민들의 동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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