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뜬금없이 든 생각
초록 또는 녹색이 생태계와 환경운동을 대표 상징하는 색일 수 있을까, 그렇게 여기는 것은 편견 또는 고정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든 적이 있습니다.
2009년 11월 12일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경남 환경 정책을 주제로 삼아 경남도 의회 경상남도 환경연구회라는 의원 연구 모임이 주관한 세미나 도중이었습니다.
주제 발표는 기후 변화 대응 저탄소 '녹색' 성장과 경남 산림 정책의 방향, 자원 재활용 정책 방안에 대해 전문 연구자들이 했고 저는 저탄소 '녹색' 성장을 두고 토론을 했습니다.
앞자리 토론석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아마 내가 미리 발표문을 작성해 놓았기 때문에 마음이 좀 풀렸던 때문인지 아무래도 엉뚱한 생각을 한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그날따라 메모까지 잘 돼 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성장'과 '보전'의 '조화'라든지, 아니면 '콘크리트'랑 '포클레인'에다 초록색 칠해 놓고 '녹색 성장'이라고 둘러치는 이명박에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 크겠습니다만. 겨울산 풍경. 이런데 어떻게 초록이랄 수 있을까. 게다가 저 엄청난 땅덩어리 안에는 초록이 거의 없을 텐데.
2. 왜 녹색이 생태 또는 환경의 상징색이지?
"'녹색 연합'이라는 생태환경 관련 운동단체도 있다. <녹색 평론>이라면 인간 중심 환경운동을 뛰어넘는 생태 보편의 값어치를 실현하자는 주장을 적극 펼치는 격월간지잖아? 게다가 덜떨어진 이명박조차도 녹생 성장을 외치는 마당이지. 녹색이 친환경이나 생태를 대표하고 있어.
그렇다면 생태계의 모든 속성에서 그린을 초록을 녹색을 뽑아낼 수 있어야 할 텐데 과연 될까? 초록으로 물든 풀이나 나무조차 얼마 안 가 시들어버리잖아. 그래 좋다. 풀이나 나무는 초록으로 인정하자.
그렇다면 풀이나 나무, 풀이나 나무에서 달리는 열매를 먹고 사는 짐승(사람도 포함)도 초록 그 자체는 아니지만 초록의 연장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짐승을 먹고 사는 짐승도, 그 생명의 뿌리가 풀이나 나무에 있으니 초록의 2차 연장이 되겠지.
그렇지만 생태계나 환경 전체를 놓고 보면 전혀 아니잖아. 그렇게 보면 초록조차도 일시 현상일 뿐이거든. 그것도 일부에만 국한되잖아. 생태계가 인간으로만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생명(=생물)로만 구성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생명이 으뜸 가는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생명이 으뜸 가는 가치인 것은 생명체에게만 그럴 뿐이지 비생명(=무생물)에게도 그렇게 적용할 수 있을까? 생명이 없다 해도 생명이 없는 것은 생명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는 없잖아.
생태계는 그러니까 생물과 무생물, 생명과 비생명으로 이뤄져 있고 생물과 생명은 어찌어찌 자꾸자꾸 넓혀 나가면 초록으로 집약이 될 수 있겠지만 무생물 비생명은 아무래도 도저히 초록으로 집약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3. 생태의 중심은 생명이 아니다
"햇빛 물 흙 공기 따위는 처음부터 비생명(무생물)이고 오히려 생명이 만들어지는 데 필수 바탕이다. 그리고 이것들 비중이 생태계에서 절대 적다고 할 수 없다. 이것들을 어떻게 초록=녹색이라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안 되지.
게다가 죽지 않는 생명(=생물)은 없거든. 말하자면 형체가 있는 모든 생명(=생물)은 언젠가는 때가 되면 무생물(=비생명)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지. 비생명(=무생물)은 처음부터 비생명(=무생물)이고 생명(=생물)은 끊임없이 비생명(=무생물)의 영역으로 넘어가니까, 생태계의 중심은 굳이 따지자면 비생명(=무생물)이 아닐까?
생명과 생물은 유한하고 한 때뿐이지만, 무생물 비생명은 무한하고 영원하네. 게다가 생물과 생명은 끊임없이 무생물(=비생명)과 생물(=생명)을 소비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지만-인간이 먹어치우는 먹을거리만 생각해도 엄청나잖아!
그러나 무생물(=비생명)은 그야말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은가! 저 말없이 버티는 흙이 저기 말없이 흘러드는 물을 빨아들인 위에 따뜻한 햇빛이 사뿐사뿐 내려쬐지 않으면 어떻게 생명이 생물이 살 수 있겠느냐 이 말이지."
4. 생명을 상징하는 초록을 버리자
"그렇다면 초록을 상징색으로 삼는 생태운동은, 결국 그 이전에 인간을 중심에 놓고 벌였던 '환경운동'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지 않을까? '환경(環境) = 비잉 둘러싼 경계'라는 말이 '가운데 있는 사람'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이 안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지.
생태운동을 하면서 녹색을 상징으로 삼아버리면 녹색이 중심이 되고 비녹색은 가장자리가 되잖아. 가장자리가 된다는 말은 중심에게 지배되고 규정을 받으며 가치 평가조차 중심에서 하게 된다는 얘기잖아.
중심에 있는 인간이나 생명에게 도움이 되니까 그대로 유지 보호돼야 하고, 중심에 있는 인간이나 생명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대로 유지 보호되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도움이 되는 쪽으로 변형 파괴돼야 한다는 식으로까지 나갈 수 있지.
그게 올바른 운동이 아님을 이제는 나 같은 덜떨어진 존재조차 알아차리거든. 인간이나 생물(=생명)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비생명(=무생물) 원래 모습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
오히려 비생명(=무생물) 원래 모습을 최대한 망가뜨리지 않는 조건에서 생명(=생물)이 빌붙어 살아가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래, 맞아! 자기가 원천이 아닌 이상 원천에 어떻게 잘 빌붙느냐가 관건이 아니겠어?"
5. 생태계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재색
"풀이나 나무의 초록색 이파리조차 언젠가는 시들잖아. 시들고 바스라지면 흙으로 돌아가지. 이것들 물을 머금지 않을 때는 잿빛과 같이 된다더군. 재는 모든 탈 수 있는 것들이 불에 타고 없어진 뒤에 남는 순수한 것들이잖아. 그렇다면 재색을 생태계 대표색으로 하면 되겠네. 하하.
더군다나 서양 기독교의 성직자나 수도자들, 동양 불교의 스님들이 제복처럼 입는 옷도 재색이잖아. 물들여진 입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근본으로 돌아간 것들의 색깔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지.
그러면 생태계 전체를 대표하는 색도 이것으로 삼으면 알맞겠군. 녹색연합은 당연히 재색연합으로 바꾸고, <녹색평론>도 <재색평론>으로 고쳐야 어울리겠지?"
생각은 이렇게 아주 그럴 듯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 돌아오니 난관에 부닥쳤습니다. '잿빛 전망'이니 뭐니, '회(灰=재)색 분자'니 어쩌니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재색이 이미지가 아주 안 좋은 것입니다.
게다가 이명박 좋아하는 콘크리트가 바로 '잿빛 나는 시멘트(=횟가루)와 모래의 범벅'이다 보니, 도저히 더이상 무어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하고 말았습니다.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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