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박형권 첫 시집 <우두커니>을 읽으며...

김훤주 2009. 12. 28. 11:58
반응형

장모 앞에서 마누라 젖꼭지를 빤 시인

박형권의 첫 시집 <우두커니>. 들머리 첫 작품에서 눈이 커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펼쳐든 표제작 '우두커니'에서는 오히려 감흥이 적습니다.

"고사리는 산에서 밭으로 옮겨 심으면
삼 년 지나야 새순을 낸다
마흔여덟에 일흔을 바라보는 어머니 똥구멍을 물고
산밭에 따라갔다가 들은 말이다
어머니 손 안 간 흙이 없고 풀 없어서
손님처럼 서 있다가
'적응하느라 그렇겠지요' 한 마디 뱉은 것이 실수였다
아이다
옛날 흙을 못 닞어서 그런 기다
잊는다?
삼 년 전 그 흙이 고사리를 놓지 못하고
자기 살점 묻혀 떠나보낸 것
산 흙이 밭 흙과 만나 교통할 때까지 밭 흙에서 어색했던 일
반쯤이나 잊는데 삼 년이 걸린단다".('흙의 이민' 부분)

처음 읽을 때는 고사리 이야기로 착각했는데, 제목 '흙의 이민'에 눈길을 두고 씹다 보니 흙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눈 밝은 독자들은 바로 알아차리겠지만). 고사리를 놓지 못해 원래 흙을 떠난 산 흙이 밭 흙과 교통하는 데에, 옛날 섞여 살았던 산 흙을 반쯤만 잊는 데도 삼 년이 걸린다는 얘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 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우두커니' 부분)

박형권.


읽다 보니 읽는 자세가 '우두커니'가 됐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볼 수 없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봄으로써 가만히 서서 어루만지는 보람, 마음 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뒤에 가만히 서서 어루만지는 보람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시를 읽는 보람의 끝은 즐거움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시들은 어떻습니까.

"'웰빙 천 원 매장' 앞에서
먼 과거에서 온 봄비인 듯 그녀 쪽의 소식이 궁금하였지
다만 스쳐가야 할 마흔여덟 어스름 녘
홀연히 나타난 퇴기 옥화
원본 없는 필사본 그리움 같은 그녀
……
천 원에 자기를 한 트럭 실어가라고 농을 걸어왔지
문득
달을 희롱했던 농월정(弄月亭)이 생각났지
……
그 밤이 어제 같은데
거문고는 간 데 없고
내가 늦은 저녁처럼 살아 있듯이
놀에 걸린 빨래처럼 그녀 또한 펄럭였지".('퇴기(退妓) 옥화를 만나다' 부분)


"엄마 젖을 걷어찼다
……
식성이 까다로운 놈이구나 혐의를 두었는데
아내의 젖꼭지가 물새알처럼 유방에 푹 파묻혀 있는 것이 그때 생각났다
젖은 물려야겠고
참 막막하였다
결국 장모님이 소식을 접하여 치마폭을 부여잡고 달려와서는
자네가 쎄기 빨아라 하셨다
쎄기 쎄기 빨았더니 아들이 먹어야 할
엄마가 내 입에 흥건하였다
드디어 물새알이 돌출하고 알이 새가 되어 날아오르려는 찰나
딸 키워 남 줬다 그러시기에
장모님 젖꼭지도 빨아드릴까요 하였다
에라 이 숭한 놈아
아비가 그런 핀잔 듣는 것도 모르고 아들은 행복하게 맛있게 엄마를 녹여 먹고 있었다
장모님도 아내도 아들도 나도
그날 하루는 물새알이 되어
바다로 일 나간 오래된 엄마를 동그랗게 기다렸다".('장모님 앞에서 마누라 젖꼭지를 빨았다' 부분)

문학평론가 고봉준은 책말미 해설 '흙의 상상력과 파도의 수사학'에서 "(박형권의) 시를 감싸고 있는에로틱한 이미지와 남성적인 시풍은 도시적 감수성과 개인의 내면 토로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난감함을 제공할 듯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육체의 즐거움을 정신의 즐거움으로 도약시키는 비법을 지닌 이의 목소리이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이런 녀석은 어떻는지요. 국민학교 시절 함께 놀던, 같은 학년 같은 반 다니던, 그러나 세 살 많던 여자아이 생각이 나서 까무라칠 뻔했습니다. '철수와 영희'는 우리 7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주인공들이지 않았느냐 말이지요.

"나무가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바람이 슬쩍 스치고 지나갔지
영희가 아껴 쓰는
샴푸 냄새 싱싱하게 지나갔지
집에 돌아와 손발 씻고
다리 뻗고 누우려 할 때
자꾸 그 바람이 코끝에서 맴돌지
그렇다면 우리는
땅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를
누구에 빗대었는지 알지
뱃일에 밭일에 장가도 못 간 철수 아니겠어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는
철수의 코는
십 리 밖에 팔랑팔랑 걸어오는 영희 냄새를 잘도 알아차리지
영희의 잎 냄새
영희의 가지 냄새
이건 영희의 꽃봉오리 냄새!
그쯤에서 욱신욱신 뾰루지가 익고 철수는 산처럼 누워 봄을 앓기 시작하지
영희가 문병 오려나 방문을 열면
코피처럼
산밭 유채꽃이 펑!
거제 학동 동백꽃이 펑!
여수 영취산의 진달래가 펑! 펑! 펑! 터져 나오지
단지 영희가
새처럼 갸웃하고 지나갔을 뿐인데"
('향기' 전문)

박형권(48)은, 경남 마산 덕동 바닷가 조개밭에서 물일을 하며 살고 있답니다.  실천문학. 159쪽. 8000원

김훤주

우두커니 - 10점
박형권 지음/실천문학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