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을 두고 언젠가는 한 번 얘기를 해야지 마음먹은지는 오래 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인물이 우리나라 여성의 대표가 될 수 있는지, 남자인 제가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입에 올릴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독일 마르크화입니다.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하.

유로화가 나오기 전 독일에서 가장 큰 돈이 1000마르크(얼추 80만원)였다고 합니다. 1000마르크 짜리 종이돈에는 그림 형제(야콥 그림 1785~1863, 빌헬름 그림 1786~1859)가 그려져 있었답니다. 여기에는 그림 형제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는 독일 사람의 정신이 당연히 들어 있겠지요.


그림 형제라 하면, 대부분 한국 사람에게는 '동화를 정리한 독일의 사람들' 정도로 여겨지겠지요. 맞습니다. 그이들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이야기 모음>으로 민담을 모아 가다듬어 펴낸 것도 물론 이들 형제로서 업적이지만 사실은 그런 정도로 그쳐지지가 않는 모양입니다.

형 야콥은 4000쪽이 넘는 <독일어 문법>을 썼답니다. 그러니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진답니다. 괴테가 이 문법 책을 보고 나서 자기가 쓴 작품들을 일러 '거대한 고백의 단편들일 따름'이라 했다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동생 빌헬름은 <도이치 영웅 전설>을 펴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니벨룽겐이나 지그프리트 등은 당대의 문인과 작곡가와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었겠지요. 게다가, 그리고 이들 형제의 공동 작업 가운데는 <…옛이야기 모음> 말고 <독일어 사전>도 있습니다.(아주 방대한 작업이라 A부터 F까지만 하고 죽었지만)

그림 형제를 공부하고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쓴 이양호를 따르면 이렇습니다. "독일 민족과 관련된 인문학의 거의 모두-신화, 전설, 옛이야기, 독일어 사전, 독일어 문법이 모두 이 형제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그야말로 이 형제로 말미암아 독일 민족의 주춧돌이 놓였고 기둥이 세워졌다."

민족의 창시자라고 할만합니다.(민족주의가 옳으냐 그르느냐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러니 사회주의자라 하더라도 시비 걸지 마시기를, 제발.)


형제는 '행동하는 지성'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괴팅겐 대학 교수로 있던 1837년, 임금은 입헌군주제를 깨고 옛날 절대군주제로 돌아간다고 선언했답니다. 폭압과 공포로 가득한 시대였겠지요. 하지만 그림 형제는 다른 교수 다섯 명과 함께 항의 문서를 발표했으며 주동한 형은 그로 말미암아 교단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실를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 가장 큰 돈인 5만원 짜리 종이돈이 다시 한 번 제게 떠올랐지요. 거기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고 미심쩍게 생각한지는 오래 됐지만, 이번에는 좀더 오래 좀더 곰곰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신사임당. 두 말 하면 잔소리입니다. 현모양처의 대표 선수지요.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습니다. 남편 이원수를 잘 거뒀을 뿐 아니라 자식 율곡 이이도 잘 키워냈습니다. 사람 사랑하는 마음도 아주 커서 매우 따뜻했다고도 합니다.(어릴 적 읽은 얘기입니다만.)


여기서 하고픈 말은 신사임당이 깜냥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랍니다. '현모양처'-슬기로운 어머니, 어진 아내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지 따져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성의 현모양처 됨이 자기 실현이라고 하기 어려운 측면이 크지 않느냐는 얘기입지요.

현실에서, 아마도, 현모양처는 아주 많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현모양처가 현모양처로 인정이 되려면 그 여성이 현모양처라는 사실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편은 원래 좀 처져 있다가 잘나져야 하고, 무엇보다 자식이 크게 성공을 해서 본받을만한 인물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모양처는 여성이 스스로를 잘 발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그것도 아들!)과 남편을 통해 현모양처는 실현될 따름입니다. 이를테면, 아들 율곡 이이가 못난이였다면, 신사임당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바보다 훨씬 대단했다 해도, 현모양처로 꼽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찍혀 나온 돈을 보는 표정이, 마치 신사임당을 검열하는 것 같습니다. 뉴시스 사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여기서도 관통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독일 1000마르크짜리 종이돈에는 독일 민족의 자존과 긍지가 서려 있습니다. 독일 민족을 인문으로 형성한 이들이 그림 형제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종이돈 5만원짜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한국 남성의 오만함? 아니면 또는 그리고 이 오만함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한국 여성의 무기력?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이 있는지 미심쩍고, 그런 여성운동이 없지 않고 있다면, 5만원짜리 종이돈에 들어가 있는 현모양처 신사임당은 바로 그 한국 여성운동의 쓰라리지도 않은 멍청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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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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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있는풍경 2009.11.23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아~!! 충분히.......

  2. Favicon of http://clnato.tistory.com nato74 2009.11.23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그런가요?
    이세상 모든 인간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고 가정의 중심은 어머니인데 그런 어머니의 표상을 5만원 지폐에 담은것이 여성운동의 패배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현모양처라는 배우자와 자식들을 내조하여 출세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낡은 이념이기에 현대문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과거의 것이 모두 낡고 비효율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라 치부하는 것이 진정한 여성운동이자 양성평등의 조건이라면 지금의 여성운동이 패배했다는 말씀은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9.11.24 0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과거의 것이 모두 낡고 비효율적이라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거든요. ^.^ 현모양처가 나쁘다는 얘기도 드리지 않았지요.
      다만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가 남성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고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조건도 남성으로 말미암아 갖춰진다는 얘기를 드렸을 따름입니다요.
      그러니까, 현모양처의 표상을 내세운 자체가 남성 오만의 상징이 되고, 현모양처의 표상을 내세우도록 내버려뒀다는 자체가여성운동의 패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 Favicon of http://blog.gorekun.com 고어핀드 2009.11.24 1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성의 포지션을 배우자와 자식들을 내조하는 것으로 한정짓는 게 남성주의의 특징이고, 현모양처는 아무리 잘 해봤자 그 안에서의 성공일 뿐입니다.

      저 또한 좀 더 진취적인 여성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9.11.24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어핀드님, ^.^ 제가 하고픈 얘기를 가장 알맞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하하.

  3. Favicon of http://agbird.egloos.com gimmesilver 2009.11.23 15: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자신이 잘되는 것만 대단하고 다른 이의 성공을 이끄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신사임당를 평가함에 있어서 남성 시각에서의 현모양처 기준일뿐이다라는 식으로 여성 인권 어쩌구를 운운하기 보다는 우수한 코치 혹은 멘토로써의 가치를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요?

  4. sme9399 2009.11.23 1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위의 글에 동감합니다. 여성을 참여시킨다는 취지는 좋았다 하더라도 여성의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덕한 인상은 좋을지라도 앞으로 미래에 진취적인 여성상으론 글쎄요..여성의 가치관과 사상 미래지향적인면도 함께부각될수 있었으면 좋았을걸 그랬습니다.물론 국가의 인재를 위해서 현모양처가 되어 뒷바라지를 잘하는것도 좋지만 능동적인 여성상도 얼마든지많았고 국가에 공헌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어머니에 아들까지..이나라에 모셔야할 위인들이 어디 한두분이신지요? 이런 사소해보이는 부분까지 좀 배려하고 고려하고 안배할수 있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네요..

  5. 냐옹 2009.11.23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라리 짱금이가 백배 낫죠.
    국제적으로 유명하죠, 진취적이죠, 역경을 딛고 성공했죠,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을 개척해나갔죠...

    물론 반영은 안되겠지만... 인물만 놓고보면 그렇다는겁니다. ㅋ

  6. 보라매 2009.11.24 0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 민족의 자존심과 긍지를 보일 수 있는 여성이 필요합니다.
    신사임당으론 부족합니다. 동감.

  7. 메모리즈 2009.11.24 04: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감사합니다.
    늘 불만이었던 내용이었죠.
    신사임당 현모양처 도식은 곧 출세지향 사회의 집안 버전일 뿐이니까요.
    수없이 많을 현모양처들을 욕보이는 짓이며
    수없이 많은 평범한 가장들과 아들들을 고개 숙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일 뿐이죠.

  8. 증초제 2009.11.24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그런생각도 할수있겠군요.
    5만원권에대해서 아무생각도없었는데, 이런 시각으로보니 신선하네요.
    휜주님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여성의 참여가 아무래도 적었던 현대사회 전에는 능동적인 여성이 별로없었으니 신사임당도 나쁘진않다고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9.11.24 1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차라리 여성 초상을 도안으로 쓰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요. ^.^

  9. Favicon of http://viya69.egloos.co.kr viya0416 2009.11.24 0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목과 후반은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지만, 전반의 마르크화와 그림형제에 관련된 이야기는 신선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신사임당이 아닌, 화폐의 인물로 어떤 여성이 선정되더라도, 반박주장은 당연히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10. Favicon of http:// 후반은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지만, 전반의 마르크화와 그림형제에 viya0416 2009.11.24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라져야할 남자

  11. 조금후에 2009.11.24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여성인물이 새겨진 지폐가 나온다고 해서 기대가 많았는데

    신사임당이어서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분이 덜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인권 후진국인 우리나라서 화폐에 새겨질 여성이라면

    더 미래지향적이고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 여성이 선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훌륭함과는 다른 이야기 입니다

    이 시대의 여성은 훌륭한 어머니이자 또 훌륭한 개인이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남성이 훌륭한 아버지이자 훌륭한 개인이 되어야 되는 것과 같지요

    신사임당의 모습을 보고 기생 운운했던 경박함은 또 떠올리기 조차 싫군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은 아래로 치부하던

    아무튼 좋은 글 감사히 읽었고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9.11.24 1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당~~. 완결성으로 본다면 절대 좋은 글이 못 되는데도 칭찬을 주시는군요.

      그리고, "어머니의 훌륭함과는 다른 이야기"라는 판단, 아주 돋보이십니다.

  12. Favicon of http://withover.com 위드 2009.11.24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현모양처가 위인이라... 5만원권에서 어떤 국가적 정신을 찾아야 하는건지 모르겠네요.

  13. 갈고 2009.11.25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 우리나라가 여성인권 후진국이지.. 단순 통계지표만 보고 얘기하는건가_-

    여성 요직진출율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표는 OECD 내 상위권에 랭크되어있는걸로 알고있는데.

    우리나라의 여성 요직진출율은 분명 지금까지 남성들이 행해오던 관습 또한 있지만,

    큰 자리에서 책임을 지는 것을 어려워하는 여자들의 특성 또한 한몫하지 않는가..?


    스스로 변할 생각은 못하고 뺏을 생각부터하니 상대적 박탈감만 커져가는거지..

  14. Jiha Moon 2010.04.02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신사임당의 5만원권은 지켜본 일 중에 한국에서 한 가장 제일 자랑스러운 일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과 문화의 힘을 별로 믿지 않으시는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또한, 신사임당이 어떻게 이런식으로만(정치적으로) 조명되는지 안타깝습니다. 인타넷에서 우연히 신사임당의 자료를 보다가 들어왔는데 신사임당을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 존경하는 입장에서 읽기에 너무나 실망스럽네요.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10.04.02 2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대를 하셔도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지하 문님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지하 문님께서 저처럼 생각하셔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15. 1 2011.10.07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임당이 어떤 예술적, 문화적 업적이 있다는건지 모르것네..

    지폐에 나올 정도면 그림잘그렸다, 시 잘썼다 수준으론 어림도 없는건 아시죠?

  16. 페미인가 2020.05.28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웃기는 소리를 정성스럽게 써놓으셨네요 왜이렇게 불편에 찌든 삶을 사시는건가요? 독일의 마르크스 지폐 하나와 비교하면서 말이죠.. 평균적으로 따져야하는거 아닙니까? 모든나라의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이 혁명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건가요? 그냥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설득하고 싶어서 "독일? 혁명 신사임당? 여성인권운동? 아니네.. " 이런식으로 붙인거 아니신가요..? 그렇게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살다보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거고 여자라서 그랬다 ㅜ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지폐에다가 비교하시는 분은 좀 더 악화됐다고 보이는 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20.11.04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해석은 어디서나 자유롭게 하시면 됩니다~~
      저는 다만 우리나라 여성 가운데 신사임당보다 유명하거나 기릴 만한 인물이 많은데 왜 이렇게 됐을까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봤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