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신사임당 지폐는 여성운동의 패배다

김훤주 2009. 11. 2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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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을 두고 언젠가는 한 번 얘기를 해야지 마음먹은지는 오래 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인물이 우리나라 여성의 대표가 될 수 있는지, 남자인 제가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입에 올릴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독일 마르크화입니다.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하.

유로화가 나오기 전 독일에서 가장 큰 돈이 1000마르크(얼추 80만원)였다고 합니다. 1000마르크 짜리 종이돈에는 그림 형제(야콥 그림 1785~1863, 빌헬름 그림 1786~1859)가 그려져 있었답니다. 여기에는 그림 형제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는 독일 사람의 정신이 당연히 들어 있겠지요.


그림 형제라 하면, 대부분 한국 사람에게는 '동화를 정리한 독일의 사람들' 정도로 여겨지겠지요. 맞습니다. 그이들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이야기 모음>으로 민담을 모아 가다듬어 펴낸 것도 물론 이들 형제로서 업적이지만 사실은 그런 정도로 그쳐지지가 않는 모양입니다.

형 야콥은 4000쪽이 넘는 <독일어 문법>을 썼답니다. 그러니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진답니다. 괴테가 이 문법 책을 보고 나서 자기가 쓴 작품들을 일러 '거대한 고백의 단편들일 따름'이라 했다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동생 빌헬름은 <도이치 영웅 전설>을 펴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니벨룽겐이나 지그프리트 등은 당대의 문인과 작곡가와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었겠지요. 게다가, 그리고 이들 형제의 공동 작업 가운데는 <…옛이야기 모음> 말고 <독일어 사전>도 있습니다.(아주 방대한 작업이라 A부터 F까지만 하고 죽었지만)

그림 형제를 공부하고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쓴 이양호를 따르면 이렇습니다. "독일 민족과 관련된 인문학의 거의 모두-신화, 전설, 옛이야기, 독일어 사전, 독일어 문법이 모두 이 형제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그야말로 이 형제로 말미암아 독일 민족의 주춧돌이 놓였고 기둥이 세워졌다."

민족의 창시자라고 할만합니다.(민족주의가 옳으냐 그르느냐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러니 사회주의자라 하더라도 시비 걸지 마시기를, 제발.)


형제는 '행동하는 지성'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괴팅겐 대학 교수로 있던 1837년, 임금은 입헌군주제를 깨고 옛날 절대군주제로 돌아간다고 선언했답니다. 폭압과 공포로 가득한 시대였겠지요. 하지만 그림 형제는 다른 교수 다섯 명과 함께 항의 문서를 발표했으며 주동한 형은 그로 말미암아 교단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실를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 가장 큰 돈인 5만원 짜리 종이돈이 다시 한 번 제게 떠올랐지요. 거기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고 미심쩍게 생각한지는 오래 됐지만, 이번에는 좀더 오래 좀더 곰곰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신사임당. 두 말 하면 잔소리입니다. 현모양처의 대표 선수지요.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습니다. 남편 이원수를 잘 거뒀을 뿐 아니라 자식 율곡 이이도 잘 키워냈습니다. 사람 사랑하는 마음도 아주 커서 매우 따뜻했다고도 합니다.(어릴 적 읽은 얘기입니다만.)


여기서 하고픈 말은 신사임당이 깜냥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랍니다. '현모양처'-슬기로운 어머니, 어진 아내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지 따져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성의 현모양처 됨이 자기 실현이라고 하기 어려운 측면이 크지 않느냐는 얘기입지요.

현실에서, 아마도, 현모양처는 아주 많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현모양처가 현모양처로 인정이 되려면 그 여성이 현모양처라는 사실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편은 원래 좀 처져 있다가 잘나져야 하고, 무엇보다 자식이 크게 성공을 해서 본받을만한 인물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모양처는 여성이 스스로를 잘 발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그것도 아들!)과 남편을 통해 현모양처는 실현될 따름입니다. 이를테면, 아들 율곡 이이가 못난이였다면, 신사임당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바보다 훨씬 대단했다 해도, 현모양처로 꼽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찍혀 나온 돈을 보는 표정이, 마치 신사임당을 검열하는 것 같습니다. 뉴시스 사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여기서도 관통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독일 1000마르크짜리 종이돈에는 독일 민족의 자존과 긍지가 서려 있습니다. 독일 민족을 인문으로 형성한 이들이 그림 형제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종이돈 5만원짜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한국 남성의 오만함? 아니면 또는 그리고 이 오만함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한국 여성의 무기력?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이 있는지 미심쩍고, 그런 여성운동이 없지 않고 있다면, 5만원짜리 종이돈에 들어가 있는 현모양처 신사임당은 바로 그 한국 여성운동의 쓰라리지도 않은 멍청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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