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안보강사들과 140대 5로 맞짱뜬 학자

김훤주 2009. 10. 24.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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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0대 5로 맞짱뜬 까닭

2008년은, 우리 역사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진 해라고 해야 마땅하답니다. 이명박 정부와 이른바 '뉴라이트'가 역사 왜곡 파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지요. 케케묵은 '올드라이트'보다 오히려 못한 덜 떨어진 뉴라이트가 앞장서 바람을 잡고,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물론 국방부 장관에 더해 국토해양부 장관, 국무총리까지 나섰습니다.

이들이 들개처럼 물고 늘어진 대상은, '근현대사' 교과서였습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까지 몸소 나서서 "너희는 포위됐다, 손 들고 투항하라!"고 외쳐 댔겠지요. "그 출판사는 정부가 두렵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부는 교과서를 쓴 필자들 동의는 아예 얻지도 않고 무시한 채 정부에게 약자일 수밖에 없는 출판사를 윽박질렀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수정하게 만들었습니다.(그러나 올 들어 법원은 '필자들 동의가 없이는 수정된 교과서를 배포하면 안 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이명박 정권 행동대로 나섰습니다. 기억나시죠? 지금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고, 따라서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각계 전문가' 140명남짓을 강사로 삼고 고등학교마다 학생을 모아서 근현대사 '특강'을 열라고 다그쳤던 일 말씀입니다.
 
이를 두고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말했습니다. "이른바 각계 전문가 면면을 보니 근현대사 전문가는 한 명도 없고, 역사학자도 고대사 전공 한둘뿐이었다. 대학에서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이만 해도 수백 명은 될 텐데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최소한 양식이 있다면 교육의 전문성만큼은 존중해 줘야 할 것 아닌가."

한홍구가 본 그들은, '예비군 훈련장의 안보 강사'이거나 '전두환·노태우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공작 정치를 하던 퇴물'이거나 '레크리에이션 강사' 따위였습니다. 당장 학교에서 현대사 교육을 해야 하는 역사 교사들이, 숫자에서는 밀리지만, '맞짱'을 뜰 수밖에 없다고 결정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2. 그이들이 맞짱뜬 내용을 무엇일까

이렇게 급히 '차출된' 대표선수가 바로 앞에 든 한홍구 교수와 정태헌 한국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연세대학교 석좌 교수를 지낸 이만열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영철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해서 다섯입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는 이들이 강의에서 풀어내놓은 얘기들을 활자로 담았습니다.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만열 위원장은 역사의 태산 같은 무게를 느끼게 해주고 정태헌 선생은 제각각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를 뚜렷하게 짚었고 한홍구 선생은 뉴라이트와 정면대결을 벌였다. 서중석 선생은 해방 국면, 정부 수립을 깊이 분석했고 정영철 선생은 북한 현대사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2008년 12월 열린 근현대사 특강.


다섯 대표선수가 파악한 현대사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쯤 될 것 같습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우리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아니, 친일파를 청산 못 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친일파에게 역청산을 당했다."

그리고 하나 더. "제헌헌법은 비록 우파들이 만들었지만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 이후 국가 권력이 친일파들에게 장악되면서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운영되는 나라로 변질됐다. 민주화의 과정은 친일파 탓에 왜곡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그 기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제헌헌법에서 찾아야겠다-을 바로잡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3. 대담하고 대단한 이명박 정권의 상상력

그러면서 이승만이 친일 청산과 관련 있다는 정부 주장도 불러내어 조집니다. 이렇게요.

"정부는 교과서 집필 기준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이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고 적어야 한다고까지 못박았다. 제헌헌법에 근거해 구성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와해됐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황당한 일이다.

아마 이승만이 살아온다 해도 몹시 낯뜨거워할 것이다. 이승만이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일 뿐이다."

다섯 대표선수가 이명박 정부의 역사 왜곡 파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습니다. 아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 해야겠지요. 역사를 상상으로 채우고도 전혀 이상해하지도 않고 나아가 국민에게 믿으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니까요.

"이명박 정부나 뉴라이트들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의 역사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 편의에 따라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내용을 역사라고 가르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정부가 자행한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탄압은 조선 시대 연산군이 저지른 무오사화 이래 최대의 사화(史禍)로 기록될 것이다."

저는 이런 규정에 크게 동의합니다. 그러면서 여쭤봅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힘이 셀까요?, 아니면 '있었으면 좋겠다는 역사'가 힘이 셀까요? 140명이 힘이 셀까요? 아니면 여기 이 다섯 사람이 힘이 셀까요?

김훤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 10점
서중석 외 지음/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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