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게으른 학자들이 수도권에 몰리는 까닭

김훤주 2009. 10. 5.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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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천에 깔린 자라풀이 '희귀식물'이라니

자라풀이라고 있습니다. 잎이 자라 모양으로 생겼고 꽃은 대체로 하얗게 피는, 물 위에서 사는 풀입니다. 환경부는 이 자라풀을 자연환경보전법에 따라 1993년 특정야생식물로 분류했습니다. 1998년 법률을 고치면서('특정'을 '멸종위기'와 '보호'로 구분) 모니터링 등을 하는 대상에서 뺐습니다. 대신 산림청이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에 따라 2006년 희귀식물 217가지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라풀이, 중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지 모르지만 제가 사는 남부 지역에서는 흔하디 흔한 물풀입니다. 물론 특정야생식물이나 희귀식물로 지정한다 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지정하는 본래 취지에는 전혀 걸맞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조사가 무엇보다 관건인데, 지정할 때도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정한 뒤에도 모니터링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사전에 제대로 조사가 됐다면 남부 광범한 지역에 아주 흔하게 자란라는 사실이 확인돼 보호 대상으로 꼽히지 않았을 테고, 사후라도 모니터링을 똑바로 했다면 계속 보호 대상으로 머물지는 않으리라는 얘기입니다.(그래도 보호하겠다는데 왜 딴죽거리느냐는 식으로 잘못 받아들여지지 않기 바랍니다. 이런 기준으로 하면 갈대나 환삼덩굴은 물론 강아지풀, 토끼풀조차 보호 대상 목록에 올라야 합니다.)

창녕 소벌에서 가장 많이 찍히는 풍경. 경남도민일보 유은상 기자 사진.


소벌(우포늪)이 있는 창녕 한 환경운동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호종을 선정하는 사람들이 한강 유역 대학이나 기관에 있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중부나 북부에 잘 없어서, 자기들 눈에 안 띈다고 말입니다." 이런 지적에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는 학자들은 어떻게 대꾸할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조사 관찰은 정부가 하지 않습니다. 대학이나 전문 연구 기관이 정부 따위에서 용역을 받아 보호야생식물 선정 또는 희귀식물 선정 관련 조사·연구를 합니다. 용역은 대부분 서울 또는 수도권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 갑니다. 제대로 조사 관찰하지 않는 게으름은 바로 이들의 것입니다. 남부 지역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도 자기네 터잡은 수도권 일대만 훑어보고는 이리 딱지를 붙입니다.

2. 천성산 습지는 특정 인물에게만 보여준다?

경남 양산에는 천성산이 있습니다. 내원사 산감(山監) 지율 스님의 고속철도 터널 관통 반대 운동으로도 널리 알려진 명산입니다. 북쪽 울산으로는 정족산이 이어집니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대학이나 전문 연구기관에 있는 학자들에게 3억6000만원에 용역을 줘서 93~94년 진행한 환경영향 평가에는 여기에 아무 늪도 없고 보호할 생물도 있지 않다고 나옵니다.

천성산 화엄벌.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산지늪이 있습니다. 1995년 정족산 무제치늪이 발견된 이래 정우규라는 중등학교 선생님이 들어서 1999년에는 화엄늪과 밀밭늪이 잇달아 발견이 됩니다. 이들 늪은 보호 가치를 인정받아 습지보전지역으로 지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우규 선생은 지금 울산환경운동연합 공동 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조사 연구는 대학 강단에 서거나 전문 연구 기관에 종사하는 학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나 이이들은 정부 기관의 용역이 없으면 움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용역을 받더라도 독자적인 조사 연구 활동은커녕 용역을 준 기관의 입맛에 맞춰 결과물을 내놓을 뿐입니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의 천성산 일대 환경영향평가가 대표적입니다.

정우규 선생 같은 이는 용역으로 돈을 받지도 않습니다. 대학 따위에 종사하는, 이른바 전문 학자로 쳐주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운동단체나 개인 돈을 들이고 팀을 꾸려서 이렇게 산 들 강을 돌아다니면서 엄청난 발견을 하고 있습니다. 2001년에는 안적늪과 대성늪 등 천성산에서만 13개 산지 습지를 이들이 발견합니다.

이들은 또 천성산 습지 둘레에서 줄기에 가시 대신 털이 나 있는 털두릅나무, 벌개미취에 흰 꽃이 피는 흰벌개미취 등 한 번도 알려진 적 없는 새로운 식물도 찾아냈습니다. 정우규 일행이 2002년에는 울산 울주군 웅촌면 못산늪을 찾아내면서 멸종위기식물인 순채가 떼지어 자라고 있음도 확인했습니다. 2004년에도 울산 동대산에서 뻔지늪을 발견합니다.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전국 교사들의 모임 소속 한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습지들이 꼭꼭 숨어 있다가 정우규 선생만 지나가면 나타난다",입니다. 물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학이나 전문 연구 기관에 소속된 공인된 학자들이 연구실에만 쳐박혀 있으면서 제대로 돌아다니지 않은 탓이 더 크겠지요.

3. <어린 왕자>에 나오는 지리학자의 게으름

이쯤 되면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작품 <어린 왕자>가 절로 생각이 납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작품인데 읽다 보면 지리학자가 나온답니다. 어린 왕자가 자기랑 다투던 꽃을 두고 별을 떠나 여섯 번째 들른 별에서 만납니다.


어린 왕자는 이 지리학자에게 흥미를 느끼고 바다가 있는지 산이 있는지 도시와 강과 사막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지리학자는 "나는 알지 못한단다."라고밖에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어린 왕자는 실망합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이 지리학자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라서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지리학자는 책상을 떠나는 법이 없는 거야."라고까지 얘기하는 지리학자입니다.

지리학자가 할일은 "서재에서 탐험가를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그 탐험담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그이는 말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그 자체로서 세상을 뒤집어 보여주는 커다란 우화(寓話)이지만, 우리가 슬픈 까닭은 이런 일이 소설이나 동화에서만 생기지 않고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난다는 데 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왕자를 읽어보기라도 했을까?

<어린 왕자>에서 게으른 지리학자는 자기 별을 떠날 줄 모릅니다. 현실에서 게으른 학자들은 주로 수도권에 머물러 벗어날 줄 모릅니다. 이른바 일반 사회에서 알아주는 대학이나 전문 연구 기관이 거기 몰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들에게 입맛대로 용역을 줄 수 있는 정부 행정 기관 따위가 거기 쏠려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끊임없이 찾아다닙니다. 여섯 번째 별에서 만난 지리학자에게 묶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정신과 마음과 신체가 자유로운 이들은 서울이나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있습니다. 정우규 선생은 울산에 있으며, 환경운동을 하면서 자라풀이 희귀식물이 아님을 아는 이들은 남쪽에 널려 있습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멸종위기종으로 알려진 긴꼬리투구새우가 사실은 널리 퍼져 있으며, 학자들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서식지가 남부 지역 일부 못자리 논'이라 한 것이 큰 잘못임을 밝혀낸 변영호 선생님도 경남 거제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는 학자들은 <어린 왕자>에 나오는 지리학자가 어린 왕자를 다루듯이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학자들은 이들이 어린 왕자보다 몇 배나 더 소중하고 훌륭한 존재인 줄을 모릅니다. 그나저나, 저이들 게으른 학자들은 <어린 왕자>를 한 번이라도 읽어봤는지가 궁금해지네요. 하하.

김훤주
※ 매체 비평 전문 인터넷 매체 <미디어스>에 9월 30일 보낸 글을 조금 가다듬었습니다.

어린왕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생텍쥐페리 (인디고,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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