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4대강 살리기로 낙동강이 몸살을 앓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낙동강을 본류 삼아 흘러드는 남강은 뱃길 살리기를 한다고 난리입니다. 함안·의령·진주 같은 유역 자치단체가 나선다고 합니다. 다만 함안천은 이런 난리법석에서 비껴 앉았습니다. 함안천은 남강과 만나는 악양루 일대 끝머리만 난리법석 삽질을 겪게 됐습니다.
나머지 35km남짓 되는 함안천은 삽질을 겪지 않아도 되는 모양입니다. 함안천을 둘러싼 함안제(堤)를 이번에 찾아 봤습니다. 이태 전 본 고운 속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 참고 삼아 말씀드립니다. 함안천은 끝에 천(川)자가 달린 하천 가운데 몇 안 되는 '국가 하천'입니다. 강(江)이 아니고 천(川)이지만 중요한 물줄기라는 말입니다.
함안은 우리나라에서 제방이 가장 많은 고장이랍니다. 570km를 웃돈다고 하는데 실은 더 많을 것이라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함안에 이토록 제방이 많은 까닭은, 간단합니다. 낙동강과 남강과 함안천과 석교천을 비롯한 갖가지 크고작은 물줄기가 많이 흘러나가기 때문이지요.
함안군 중심지인 가야읍은 일제 강점기에 형성됐습니다. 전에는 함안면이 중심지였지요. 일제가 당시 제방을 쌓으면서 만들어낸 신(新)시가지입니다. 이처럼 제방은 사람 활동 영역을 넓혀주는 구실을 합니다. 이를 뒤집으면, 인간 간섭을 받지 않는 자연의 영역을 줄어들게 한다는 뜻도 됩니다.
이에 따라 제방 바깥쪽은 사람들 주거지나 농경지로 변신했지만 안쪽은 그대로 자연이 어울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데도 참 많습니다. 제방 안 깊숙한 데까지 사람이 들어가 농사를 짓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흙에 유기물이 많아서 땅이 기름지니까 어쨌든 득 좀 보려고 그렇게 한답니다.
늦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거니는 제방 안쪽은 겉보기에는 대체로 평화롭습니다. 낚시꾼이 몇몇 들어서 있고 경운기 같은 기계가 몇 대 놓여 있고 농사 지으려고 그랬지 싶은데(옆에 농사용 비닐 뭉치가 있는 데 비춰볼 때) 풀을 없애고 평평하게 만든 땅도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낚시는 물고기의 평화를 깨고 경운기는 땅과 땅 속 존재들의 평화를 깹니다.
하늘이나 풀숲에는 왜가리나 백로 같은 새들이 머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짐승 발자국이 많이 나옵니다. 덩달아 짐승 똥도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 고라니 같은 짐승이 남긴 두 굽 발자국도 있고 토끼의 것이거나 살쾡이의 것으로 보이는 둥글고 부드러운 발자국도 꽤 찍혀 있습니다. 잠자리나 메뚜기 같은 곤충은 말할 것도 없고 두더지 같은 동물도 있는지 조그맣게 잘 파 놓은 굴들도 더러 보입니다.
여러 가지 발자국이 많이 찍혀 있습니다.
물이 고여 있는 이런 둘레에서 생명 활동이 가장 많이 일어난답니다.
제방 한 쪽으로는 사람들이 일부러 씨를 뿌린 때문에 생겨난 코스모스가 꽃을 머금고 흔들거립니다. 나중에 가을이 되면 구경 삼아 오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만들어 주려고 한 것일 테지요. 그러나 제방 바깥쪽 나무와 풀들이 의미가 있는 까닭은, 사람에게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 아니랍니다.
잠자리 같은 곤충은 물론 새들, 고라니나 토끼(때로는 뉴트리아 같은 외래종까지) 같은 땅짐승에게 보금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이들에게 필요한 먹이사슬이 함안천에 형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을 틔우고 이어가게 하는 물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생물 다양성'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이런 풍경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이처럼 해서 두 시간 남짓 걸려 함안제방 악양다리에서 양포다리까지 2km정도를 둘러봤더니 망가진 구석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이 아닌 다른 많은 생명들이 살아가는 자취를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함안천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러나 악양다리 넘어 남강과 만나는 쪽은 그렇지 않답니다.
거기 사는 생명들에게 이른바 '4대강 살리기'나 '뱃길 살리기'는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 가을 함안제방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게 자란 갈대들이 보기 좋은 장면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더해 코스모스 행렬까지 눈에 담으며 둑길을 오갈 것입니다.
제방 끝머리에서 만난 백로 떼. 양포다리 아래입니다. 한쪽 구석에 골판지 깔아놓고 드러눕고 싶을만치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행여 누구시든지 여기 함안제방 둑길을 오갈 때, 그런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속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소중한 존재로서, 한 때는 살아 있고 언젠가 한 번은 죽을 여러 생명이 엄청 많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명들이 깃드는 무생물들도 풍성하게 있다는 것까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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