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신문사의 '편집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기록하는 사람 2009. 8. 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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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조·중·동의 황당한 기사를 읽노라면 거기에 있는 기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조직마다 고유의 문화가 있고, 조직원이 되면 그 문화에 동화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언론이라면 최소한의 '기본'이라는 게 있고, 기자의 '양심'이라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요즘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연속하여 블로그에 쓰고 있는 '동아일보 하는 짓이 이렇습니다' 시리즈를 보면서, '조중동의 편집권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조중동 홈페이지의 회사소개에 들어가봤지만, 3개 신문 모두 편집권의 소재라든지, 편집권 독립 장치를 소개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조선일보의 회사소개 페이지. 편집권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러분의 생각에 신문사의 편집권은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 걸까요? 오늘 바로 제 앞에 앉아있는 후배기자에게 물어봤습니다.

"너는 우리 신문사의 편집권이 누구에게 있는 지 아냐?"
"글쎄요. 독자에게 있는 건가요?"
"이런~, 너 우리회사 편집규약도 안 읽어봤구나."


신문의 편집권에 대한 논란은 그야말로 신문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제각각 신문사마다 편집권에 대한 해석과 귀속주체가 다릅니다.

일단 제가 일하고 있는 경남도민일보의 경우, 1999년에 창간한 신생 신문이긴 하지만 2003년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로 '편집규약'을 제정하면서 편집권의 소재를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자랑삼아 이야기하자면 제가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있던 시절에 제정한 건데요, 이 편집규약은 이후 지역신문발전지원특별법(지역신문법)과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보장에 관한 법률(신문법)에 의한 기금 지원의 심사기준 중 하나가 되면서 전국의 대부분 신문사들이 거의 베끼다시피 모방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지역신문은 이 규약을 그대로 복사해붙이면서 본문 안에 있는 '경남도민일보'라는 신문사 이름을 미처 고치지 않은 채 버젓이 자기 회사의 편집규약으로 게시하는 웃지못할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의 각종 규약과 규정을 소개하고 있는 페이지(http://www.idomin.com/com_about/com1_about.html)


어쨌든 경남도민일보의 편집권은 "기자(논설위원 포함)들이 공유하며 최종권한과 책임은 편집국장에게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규약에는 편집권 행사의 주체와 방법은 물론 편집국장의 임명 방법, 편집국 인사, 논설 및 칼럼진 위촉 권한, 기자의 양심 보호 및 거부권까지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편집규약과 각종 규약 규정을 보시려면 클릭)

(주)경남도민일보사(이하 '회사'라 칭함)와 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 지부(이하 '조합'이라 칭함)는 도민주주신문으로서 창간정신을 수호하고, 내·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언론으로서 정체성을 유지·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이 규약을 제정한다.

제1조(효력)이 규약은 단체협약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제2조(편집원칙)경남도민일보 편집의 기본정신과 원칙은 창간 당시 공표한 '21가지 약속'을 준용한다.

제3조(편집권 독립)
(1)경남도민일보의 편집권은 기자(논설위원 포함)들이 공유하며 최종권한과 책임은 편집국장에게 있다.
(2)편집국장은 편집권 행사에 기자들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3)회사는 경영과 편집의 분리원칙에 따라 어떠한 이유로도 편집권을 침해할 수 없다.
(4)발행인은 주필 또는 편집국장 등 편집책임자 중 1명을 편집인으로 임명한다.

제4조(편집국장)
(1)편집국장은 회사가 임명하되, 사전에 내정자를 조합에 통보하고 기자직 사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2)조합은 편집국장 내정자를 통보받은 날로부터 5일 이내에 상임논설위원을 포함한 기자직 사원 과반수 투표와 과반수 찬성으로 동의여부를 결정하여 회사에 통보한다. 만일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대표이사는 3일 이내에 재임명 절차를 밟아야 한다.
(3)편집국장은 기자직 언론경력 13년 이상, 회사 부장급(3급) 이상을 자격 요건으로 한다.
(4)편집국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
(5)편집국장 취임 1년이 지난 후 중간평가를 실시하며, 재적 기자직 사원 2/3 결의로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 회사는 이를 반영, 15일 이내에 새로운 편집국장 임명절차를 밟아야 한다.

제5조(논설위원)객원논설위원은 주필 또는 편집국장의 제청에 따라 회사가 위촉한다.

제6조(칼럼필진)칼럼 필진은 편집국장이 국원의 의견수렴을 거쳐 선정, 사후 회사에 통보한다.

제7조(편집국 인사)편집국원에 대한 인사는 편집국장의 제청에 따라 시행한다.

제8조(양심보호)
(1)기자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취재, 보도할 자유가 있다.
(2)기자는 내·외부의 압력에 의한 축소·왜곡·은폐는 물론 특정세력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판단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상관의 지시에 불응할 권리가 있다.

제9조(의사결정)
(1)편집국장은 편집국의 주요의사결정에 국원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부서장을 제외한 기자대표 7인으로 직접선출되는 편집제작위원회를 편집국의 공식대의기구로 인정한다.
(2)편집제작위원회는 각종 보도방향과 의제설정에 대해 편집국장에게 의견을 제출할 수 있으며, 국장은 이를 존중해야 한다.
(3)편집국장은 21가지 약속과 기자윤리강령 및 실천요강, 선거보도준칙 등과 관련된 편집국의 현안에 대해 편집제작위원회와 협의한다.

제10조(적용)이 규약은 회사와 조합의 대표, 그리고 편집국장이 서명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하며, 단 규약에 따른 편집국장의 임명과 임기는 2004년 3월부터 적용한다.

2003년 10월 31일

'한국언론 최초의 편집규약'이 된 이것은 사실 독일 신문사들의 편집규약을 적지않게 참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겨레처럼 시민주주신문으로 창간된 경남도민일보의 정신에 따라 경영과 편집을 분리하는 내용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물론 대표이사에게 편집국장을 지명할 권리가 있고, 편집국장이 인사제청을 하더라도 대표이사와 협의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완벽한 분리는 불가능하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적어도 한국언론 중에서는 가장 획기적이고도 선진적인 규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도 나름대로 편집권 독립제도와 윤리강령 등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또한 기자의 양심에 따라 취재 보도할 권리를 명시한 것이라든지,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 거부할 권리를 '양심보호' 조항으로 명문화했고, 평기자 7인기구를 데스크회의에 대응하는 공식 대의기구로 규정한 것도 획기적이라 할만 합니다.

그런데, 이후 일간지는 물론 전국의 수많은 주간지들까지 이와 비슷한 편집규약을 제정함으로써 이제는 거의 일반적인 편집권 개념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중동은 어떨까요? 그들 신문사는 아예 '편집규약'이라는 걸 제정하는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조중동과 매일경제의 이해와 입장을 충실히 대변해온 신문협회는 지역신문법 시행령 제정 당시 '편집규약'에 대한 반대입장을 명확히 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즉 '노·사가 동등하게 참여하여 편집규약을 제정 시행하는 등 편집자율권 확보'를 기금 지원의 심사기준으로 해선 안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성명에서 '편집규약' 조항에 대해 "언론의 자유와 경영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조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편집권에 대해서는 "정보상품으로부터 발생하는 책임의 귀속주체는 발행인이다. 따라서 편집권은 발행인에게 부여돼 있다""우선지원 기준 중 '발행인과 종사자 대표가 동등하게 참여하여 편집규약을 제정·시행하는 등'이라는 부분은 삭제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말하자면 조중동이나 매경의 입장에서 편집권이란 '사주(또는 발행인)의 것'이라는 것이죠. 여기엔 기자들이나 편집국장, 논설위원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사실 이 논리는 '경영자와 경영자에 위임을 받은 편집관계자'에게 편집권이 있다는 전통적인 입장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신문협회는 그보다 더 나아가 '발행인'이 다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조중동에게 있어서 '언론의 자유'란 '사주의 자유'를 뜻한다는 게 바로 여기서도 입증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언론자유는 결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언론사주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자유일뿐입니다. 저는  또한 그런 사주 밑에서 일하는 기자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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