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이라 하면, 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됩니다. 제 어린 시절 짧은 한 때를 보낸 곳입니다. 여섯 일곱 살 이태 동안인 것 같은데, 여섯 살 1968년 음력 8월 20일 할머니 상을 당해서 아버지 어머니랑 함양에서 창녕까지 먼 길을 한밤중에 자동차를 타고 달렸던 서늘한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고향이 가장 따뜻하고 포근하고 웃음 머금게 하는 기억이 많다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향이 창녕인데, 어릴 적 세 살 네 살 적 기억은 딱 한 토막밖에 없고, 나머지 여덟 살 국민학교 시절부터 기억은 전혀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함양에서 지낸 이태는 따뜻하기만 합니다. 유쾌하지 못한 기억은 하나뿐입니다. 아버지랑 닭장을 만들다가, 아버지가 철사를 잘못 휘두르는 바람에 제가 장딴지를 다쳤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심각하게 바라보셨는데, 지금은 다친 상처가 걱정스러우셔서 그랬다고 짐작하지만 그 때는 제가 촐랑거리다 다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게 화를 내시는 줄 알았거든요.
그것 말고는 모두 따뜻한 기억들입니다. 여덟 살이 되면서 다시 고향 창녕으로 오기 전, 상림에도 나가 놀고 집 앞 개울에서도 놀고 집안 마당에서도 놀고 삽짝 텃밭에서도 놀고 그랬습니다. 국화빵 사 먹은 기억도 있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계모임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남원 광한루로 멀리 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거기서 잉어 구경도 하고, 노 젓는 배도 타고, 아마 소고기 육회도 먹었지 싶습니다. 행복한 그 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함양은, 나중에 커서 알았지만 우리말로 '다볕'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모두 다 함(咸), 볕 양(陽) 이렇게요. 그 때 우리 식구가 살던 집은 함양군청 관사(官舍)였습니다. 아버지가 공무원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 됐습지요. 군청 바로 옆에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관사 넓지 않은 마당에서 저는 세발자전거를 탔습니다. 어머니는 쇠절구에 고추인가를 넣고 빻고 있었고, 저는 그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뱅뱅 맴을 돌았습니다. 겨울에도 마당에 내리는 햇볕은 풍성해서 따뜻했습니다. 금세 땀이 났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함양(咸陽)-다볕이라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집에 잘 들고 들어오지도 않으셔서, 어머니는 개와 함께 돼지랑 닭도 키우셨습니다. 마당에 나와 노니는 개나 닭을 쫓아다니기도 나름 즐거웠습니다. 어머니 꾸중을 들은 적도 물론 있습니다. 닭장에서 갓 낳은 달걀은 끄집어낼 때는 아주 따뜻했습니다. 조금씩 비린내가 나기도 했습니다.
겨울철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가 온통 하얗게 돼 있었습니다. 서리가 내린 때문입니다. 어제 녹아 질척거리던 데는 밤새 서릿발이 하얗게 서 있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서리가 내린 텃밭에 가면, 평소 못 보던 똥 무더기가 때로는 있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마 늑대가 내려왔나 보다, 말씀하셨습니다.(밤에는 산짐승 우짖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기도 했습니다.)
겨울철에는, 지금과 달리 눈이 자주 많이 내렸습니다. 싸락눈도 내리고 진눈깨비도 퍼부었겠지만, 제 기억에는 함박눈만 있습니다. 눈싸움은 글쎄요, 제 기억에 없습니다. 눈이 오면 자주 상림으로 놀러 나갔습니다. 큰누나가 저보다 열일곱 살 많은데요, 그 때 아직 결혼하기 전인 큰자형이 저를 자주 데리고 나갔던 것 같습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그런 눈이었지만, 그런 눈이 제게 차가움을 주거나 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때로는 큰자형이 저를 놀려먹은 장면도 있었습니다. 저는 울보여서, 그럴 때마다 기대대로 울음보를 터뜨렸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제가 추워질 때면 큰자형이 저를 업거나 목말을 태워준 기억이 더 뚜렷합니다. 그래서 차가운 눈이 제 기억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풀빵(국화빵)을 샀던 것 같습니다. 찍어내는 빵틀이 국화 모양이었는데 밀가루 반죽을 넣은 가운데 팥소를 넣었지요. 지름과 두께가 아무리 커도 2.5cm와 1.5cm를 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으로는, 무궁화가 그려진 1원짜리 백동전에 풀빵 열 개를 줬습니다. 먹으면 속이 따뜻해졌지요. 하하.
어머니는 천주교를 믿고 성당에 다니셨습니다. 덕분에 저도 아버지도 영세를 받았습니다. 창녕에서 태어난 저는 태어날 때 이른바 '유아 영세'를 받았답니다. 어머니는 일요일은 물론 평일에도 성당에 미사를 하러 가시곤 했습니다. 아직 어렸던 저는 거의 전혀 싫은 티 없이 아프지만 않으면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다녔습니다.
성당으로 이어지는 새벽 길은 멀었습니다. 제 시간 개념으로 적어도 한 시간은 걸었지 싶은데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서리가 내려 새하얀 길에다 자기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가는 기분은 유달리 상큼했습니다. 그런 상큼함은, 차가운 기운이 코끝을 스치며 온 몸을 싸하게 만듦으로써 완성됐습니다.
아, 어머니가 새벽에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시면서 무슨 고수레 비슷한 것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을 바닥에서 집어 내다던지면서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시던 장면이 제 머릿속 기억 장치에 들어 있습니다. 성당 오가는 길에는 집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논두렁이나 밭두렁은 아니었고요.
집 앞 개울은 물이 풍성하게 흘렀습니다. 개울 위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2m도 안 되는 조그만 다리가 있었는데 언제나 찰랑거렸습니다. 장마철에는 당연히 넘쳤지요. 가재를 잡은 기억도 있습니다. 집에 가져와서 구워먹었던 것 같습니다. 허벅지까지 물이 올라왔습니다. 어쩌다 엎어지면 코로 물이 막 들어갔습지요. 하하.
이런 기억들을, 여태 잊고 지냈는데, 얼마 전 나무로 만든 옷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오면서 되살아났습니다. 처음에는 그 나무옷걸이에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는데, '요즘 세상에 웬 나무옷걸이야?' 하면서 보니, 세상에나, 4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옷걸이 한가운데에 찍혀 있는, '문화양복점'과 '함양읍 학(?)동 TEL 17'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식구가 함양을 떠난 때가 1970년 2월 제가 여덟 살 되던 해였습니다. 창녕으로 이사 와서 새로 전화를 신청해 번호를 받았는데 514번이었습니다. 창녕이나 함양이나 수준이 비슷했다고 보면, 17번이 찍힌 문화양복점이 더 앞섭니다.
우리 집은 그 때 창녕으로 이사한 뒤로 함양에 살러 간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밀양으로 한 번 더 전근을 가셨다가 1975년 퇴직하셨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옷걸이는 우리 집이 함양 있을 때인 1968년 또는 69년에 아버지가 양복을 해 입으시면서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고향 창녕으로 이사 오면서 행복하고 따뜻한 제 어린 시절은 끝이 났습니다. 작은형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창녕에서 저는 네 살 많은 작은형과 함께 살게 되면서 날이면 날마다 얻어맞았습니다. 맞을 때는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웠고, 맞지 않을 때는 언제 맞을지 몰라서 공포였습니다.
어쨌거나, 이 나무옷걸이 하나가 40년 넘게 묵은 제 기억을 새롭게 일깨워 줬습니다. 가물가물 잊어가던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먼저 풀빵이 떠오르더니 뒤 이어 개울 찰랑이는 물이랑 상림에 쏟아지는 눈이랑 나들이 나가던 어머니 옷자락이랑 새벽에 나가보던 서리랑 집앞 텃밭 짐승 똥이랑 잇달아 생각났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팍팍한 이 때, 행복하기만 하고 따뜻하기만 한 어린 시절 기억을 새롭게 되살려준 이 나무 옷걸이가 참 고맙습니다. 여태 집에 두고 쓰기만 했지, 제대로 눈길도 한 번 줄 줄 모를 정도로 무심했던 제가 스스로 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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