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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관 2

함안총쇄록 답사기 (22) 객사는 없어졌어도 향교는 옛날 그대로

원님 통치의 주무대였고 임금 상징하던 객사는 가뭇없이 사라졌어도 유교 이념 확산 거점 향교는 오횡묵이 보던 모습 간직, 우람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증인 조선은 민국(民國)이 아니라 왕국(王國)이었다. 일반 국민이 아닌 임금이 주권자였다. 임금을 상징하는 객사(客舍)가 고을에서 동헌보다 더 크고 높았던 까닭이다. 객사는 한가운데 높은 자리에 임금을 대신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었다.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가 지배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향교(鄕校)는 요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되지만 교육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이었다. 여러 의식과 행사로 양반과 일반 백성에 대한 수령의 영향력을 넓히는 문화·행정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님에게 객사와 향교는 관아..

함안총쇄록 답사기 (2) 관아 건물과 공간의 재구성

기록 따라 그렸더니 선명히 드러난 읍성 진면모 옛 모습 전쟁·풍화로 상실 문헌 바탕으로 본보 재현 관광자원 활용 가치도 충분 함안읍성 안팎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6.25전쟁 때 모두 불탔다. 담장·주추·비석 등 돌이나 흙으로 된 것은 타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다. 지금은 객사·동헌을 비롯한 몇몇 누대가 이름 정도만 이런저런 그림과 글로 흩어져 있을 뿐이고 사람들 기억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을 살펴보니 130년 전 모습을 상당 부분 재현할 수 있었다. 군수 부임 행차 오횡묵은 1889년 4월 21일 함안읍성 동문 밖에 이르러 지과정에 올라 잠시 쉬었다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태평루를 지나 객사에 먼저 들렀다가 동헌 정청(正廳)에 자리 잡고 부임 행사(=좌기취坐起吹)를 치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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