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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15

넉넉한 풍경에 깃든 선비 절개 엿보다

2018 경남도민일보 우리 고장 청소년 역사문화탐방 (4) 함양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일두 정여창 고택, 곧은 의리·신념 구현남계서원서 '10년 끈기' 배우고시원한 마을숲 상림 즐겨 올해 함양을 찾은 학교는 5월 13일 진주고, 6월 2일 마산공고, 8월 7일 산청덕산고 셋이다. 일두 정여창 고택~남계서원~농월정·동호정~상림숲을 함께 둘러보았다. 함양은 선비의 고장이다. 시작은 굳이 따지면 멀리 고운 최치원까지 가지만 가까이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꼽힌다. 조선 사림의 원류로 1471년부터 5년 동안 함양군수로 있으며 함양을 일신한 인물이다. 소출을 늘리고 관폐를 줄였다. 교육을 진흥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덕분에 김종직은 위로 임금에게서 칭찬을 듣고 아래로 백성들한테 우러름을 받았다.김종..

쉽게 써본 창원의 역사 ④일본 정벌의 거점

회원성과 합포성 지금까지는 가까운 마산의 역사를 살펴봤어요. 이제부터는 타임머신을 타고 좀 더 멀리 들어가 보도록 해요. 시작하면서 1400년 전 신라시대에는 창원이 의안이었고 마산은 합포였다고 했지요. 친구들 기억나나요? 또 800년 전 고려시대 들어서는 의안은 의창이 되었고 합포는 회원이 되었다고 했어요. 마산에는 이 두 지명이 붙은 성터가 남아 있는데 합포성과 회원현성이랍니다. 마산에도 그렇게 역사가 깊은 성이 남아 있다니~~ 신기하지요^^. 먼저 합포성으로 갑니다~!! 합포성은 평지에 지은 석성으로 마산회원구 합성동 73-4에 80m 정도 쥐꼬리만큼 남아 있어요. 이곳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병영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경상남도 육군사령관이 지휘하는 본부인 셈이지요. 1350년부터 남해 바다는 들..

해인사 이런 소원팔이는 좀 심하다

가야산 산신령을 모시는 국사단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 가면 국사단(局司壇)이 있다. 가야산 산신령을 모시는 전각이다. 천왕문(=봉황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앉아 있다. 우리 토속신앙에서 산신령은 산에 있는 모든 생명과 무생물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령이면서 동시에 토지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하는 토지신이다. 국사단은 외래종교인 불교가 우리 토속신앙과 타협한 자취가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해인사를 짓기 위하여 땅을 빌리는 대신 가야산 산신령을 국사대신으로 모셨던 것이다. 국사단은 원래 해인사 중심 전각인 대적광전의 왼편 학사대 전나무가 있는 아래 언덕에 있었다. 2007년 11월 그 자리에 대비로전이 들어서면서 지금 자리로 옮겨 왔다. 대가야와 가락국 임금의 어머니 통일신라시대 해인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운 최치..

경남 이야기 탐방대 (10) 결과물은 공공 자산

◇바삐 움직였던 석 달 =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는 '2015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탐방대' 활동이 석 달 만에 마무리됐습니다. 진행은 제가 대표로 있는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했고요. 7~8월 탐방대 대원 모집, 9월 6일 발대식, 7~20일 탐방 지역 선정과 일정 조정 21일 사천 대곡숲과 고자치고개, 10월 12일 하동 전통차 다원과 차시배지, 10월 18일 사천 사천만갯벌과 관련 역사유적, 10월 21일 함양 점필재 김종직 관련 유적, 11월 1일 마산 진동 를 지은 담정 김려 유적, 11월 4일 하동 고운 최치원 관련 유적, 11월 9일 거제 지심도 동백꽃과 일제 군사시설 유적, 11월 22일 거제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까지 모두 여덟 차례 탐방을 끝내고 같은 달 30일..

'시대의 천재' 최치원, 하동서 산신령 된 까닭

경남 이야기 탐방대 (7) 최치원과 하동 사람들 ◇공식 기록은 가야산 해인사 산신 = 가야산 가을이면 나뭇잎은 물론 물까지 붉게 물드는 홍류동(紅流洞)에 농산정(籠山亭)이 있습니다. 앞에 빗돌 하나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遁世地)라 적혀 있습니다. 최치원(857~?)이 세상에서(世) 숨은(遁) 자리라는 뜻입니다. 고운은 여기 바윗돌에 앉아 시를 읊었습니다. "첩첩 바위 사이 거세차게 흐르며 겹겹 쌓인 산을 울리니/ 지척인데도 사람 소리 가늠하기 어렵네/ 시비 가리는 소리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소리가 산을 온통 뒤덮었네." 그러고는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됐습니다. 시비시비 시시비비 그 너머로 숨은 것입니다. 최치원은 가야산과 인연이 깊습니다. 를 보면 최치원은 이랬습니다.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

가본 곳 2016.02.18

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 ③

2014년 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은 11월 24일~12월 18일 열일곱 차례 진행됐습니다. 경남도교육청이 지원한 이번 탐방은 자기 고장 둘러보기와 이웃 고장 둘러보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라 사랑은 아무래도 추상적이지요. 그런 나라에 구체성을 심어주는 단위가 고장입니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고장의 자연·역사·문화·인물을 알고 느끼는 가운데 일어나는 감흥이 나라 사랑 첫걸음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행정구역으로 나눌 필요는 없겠습니다. 경남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공통된 삶의 기반이 있고 또 거기서 동질감도 생기는 것이니까요. 이런 차이는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고장은 상대적으로 익숙합니다. 이웃 고장은 아무래도 조금 낯이 섭니다. 그래서 자기 고장 탐방에서는 충분히 가치롭고 아름다우면서도 덜 알려진 데..

나라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 ②

◇산청 단성향교~단속사지~남사마을~남명조식유적지(산천재·덕천서원)~구형왕릉·덕양전 구형왕릉은 역사적 상상력을 한 뼘 더 키울 수 있는 장소입니다. 김해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이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여기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살다가 무덤을 남겼다는 얘기입니다. 무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반도에 유례가 없는 적석총,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랍니다. 구형왕은 여기서 고토회복을 위한 항쟁을 준비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아무 뜻없이 목숨 부지만 했을까요. 단속사(斷俗寺)는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로 남았습니다. 남향으로 두 갈래 개울이 흐르는 사이 도도록하게 솟은 자리인데요, 골이 넓어 온종일 햇살이 고루 비친답니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두 번째로 실력자가 됐던 최우는 아들 만종을 단속사 주지로 삼았습니다...

최치원이 귀 씻고 지리산 신선이 된 자리

8월 8일 저녁 창원교통방송에서 했던 방송 원고입니다. 고운 최치원 전설이 어려 있는 지리산 골짜기 소개입니다. 8월 둘째 주말은 전설이 함께하는 지리산 골짜기로 여러분을 모셔볼까 합니다. 신라 시대 이름을 떨쳤던 고운 최치원 관련입니다. 최치원은 우리 경남 여러 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요, 가까운 마산의 월영대도 고운 선생이 노닌 자리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함양에는 당신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인공숲을 조성했는데, 바로 상림입니다. 또 가야산에도 머문 적이 있는데요, 최치원의 형이 가야산 해인사에 스님으로 있었습니다. 홍류동 골짜기 농산정에 가면 최치원이 읊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에도 고운 관련 유물·유적이 많습니다. 먼저 쌍계사 들머리 한자로 바위..

가본 곳 2014.08.11

고운 최치원은 어느 산 산신일까?

최치원이 지었다는 한시가 있습니다. 에 실려 있습니다. 제목이 秋夜雨中(추야우중)이랍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비 내리는 가을밤에’쯤이 되겠습니다. 내용 가운데 ‘만리(萬里)’를 두고 당나라 유학 시절 지은 표시라고도 하고, 전체적인 기교나 내용을 보고 귀국해서 나이를 많이 먹은 뒤에 지었다고도 하지만 어쨌거나 상관은 없겠습니다. “가을 바람에 외롭게 읊으니(秋風惟孤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적구나(世路少知音)/ 한밤중 창밖에 비가 내리고(窓外三更雨)/ 등불 앞 마음을 만리를 달려가네(燈前萬里心)”. 자기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랄까 씁쓸함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던 모양입니다. 의 이런 대목은 한시 ‘추야우중’의 정서와 바로 통합니다. “치원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 ..

가본 곳 2014.07.14

지리산 자락 어우러지는 최치원 신선길

탐방 루트 운암영당→34.6km 화개장터 →6.4km 쌍계사 →2km(왕복 4km) 불일폭포 →5.2km 범왕리 푸조나무 →바로 시내 건너편 세이암 유·불·선에 두루 고루 능했던 고운 최치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을 두고 옛적부터 사람들은 신선이라 일러 왔습니다. 아마도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성왕 8년(894년)에 시무 10조를 올리고 6두품으로서는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인 아찬(兒飡)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개혁안을 임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세상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이 이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곳곳을 떠돌았습니다. 를 따르면 그 뒤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말년을 마쳤습니다. 아무런 경계도 매임도 ..

가본 곳 201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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