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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9

3.15의거사에서 4.11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 발언록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전무이사 -저는 서익진 교수님이 3.15기념사업회 이사이고 학술출판분과장이라는 사실을 발제문 보고 알았다. -그리고 4.11에 대한 성격규정이 이렇게 예민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쪽에서는 당연히 4.11을 높게 평가할 것이고, 그렇게 홍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음. -저도 당시 거리에서 그 현수막을 보고, ‘아! 지금까지 3.15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4.11의 의미를 저렇게 부각하는구나’, 4.19혁명의 첫날입니다는 문구도 ‘카피를 참 잘 만들었네’ 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그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다뤄질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면, 역사를 보는 관점이나 해석도..

3.15의거 기념관에 웬 박정희와 박근혜?

서울에서 언론계 선배 세 분이 마산에 왔습니다. 여기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7주기 추모제에 참석하는 일정이었습니다. 한나절 동안 마산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 첫 행선지로 3.15의거 국립묘지를 택했습니다. 분향대에서 묵념을 하고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희생자들의 묘를 둘러봤습니다. 모두들 잘 왔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기념관에 들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마산시민, 그리고 3월 15일 1차 항쟁과 경찰 발포 및 학살,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 분노한 시민의 2차 항쟁, 4.19혁명으로 이어지기까지 과정 등을 잘 관람했습니다. 또한 대개 이런 기념관의 전시물이 시위대의 희생과 무용(..

항쟁의 계절, 다시 언론을 생각한다

올해 5월도 그냥 지나갔다. 우리나라에서 3·4·5·6월은 민주항쟁의 계절이다. 3·15의거, 4·3항쟁, 4·19혁명, 5·18민중항쟁, 6월민주항쟁 등이 모두 이 계절에 일어났다. 지난 5월 16일 광주에서 '5·18 진실 왜곡과 언론의 역할'이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인사말이 가슴을 저몄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참혹한 사진 한 장이 신문에 보도되고, 전 세계 언론에 타전되면서 마산에서 시작된 항쟁이 4·19혁명으로 전국에 번질 수 있었다. 만일 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시민을 학살하는 사진 다섯 장 정도만이라도 신문에 보도되었더라면, 과연 우리나라의 양심적 시민들이 가만히 있었겠느냐. 그게 광주만의 고립된 투쟁으로 끝났..

시정홍보지가 혁명열사 김주열 폄훼 말썽

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경남 마산시에서 발행하는 시정홍보신문입니다. 이 신문은 무려 10만 부가 넘게 발행되어 각 가정에 배달됩니다. 경남에서 발행되는 모든 지역일간지보다 발행부수가 더 많습니다. 그 신문이 이번에 제대로 사고를 쳤습니다. 그 신문이 이번에 제대로 사고를 쳤습니다. 마산 3·15의거와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특집기사를 쓴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정적으로 4월혁명의 대표적 열사인 김주열의 죽음을 폄훼하고 왜곡시켜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가 저지른 이번 사고는 1년 전인 지난해 3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이 한 페이지에 걸쳐 정정보도문을 실었던 실수를 딱 그대로 반복한 셈이어서 많은 사람이 어처구니없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 50주기 범국민장'..

김주열 죽음 왜곡, 3개월만에 정정보도

나는 지난 4월 '누가 김주열과 그 어머니를 모욕하는가'라는 글을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죽음에 대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행하는 3월호가 사실을 왜곡하는 글을 실었다는 내용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르포작가 김순천씨가 쓴 '촛불항쟁을 닮은 시민혁명의 첫 효시 마산 3·15의거 현장을 찾아서'라는 글의 한 구절이었다. 그 글은 경찰의 직격최루탄이 눈에 맞아 머리를 관통한 상태로 죽은 김주열 열사에 대해 "이모할머니 댁에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올렸던 글은 다음뷰 베스트에 올라 4·19혁명 49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문제의 르포를 썼던 작가가 이 블로그를 방문하여 자신의 생각을 ..

3·15 국가기념일 제정,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 마산에서는 내년 3·4월혁명 50주년을 앞두고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마산시민이 궐기한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3·15의거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고, 이주영·안홍준 의원이 앞장서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국회의원 265명의 찬성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을 추앙하는 현 정부의 기류로 볼 때 과연 국무회의 통과가 가능하겠느냐는 의문도 들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산에 사는 시민 중 누구도 감히 3·15국가기념일 제정운동에 대해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딴소리를 했다간 역적으로 매도당할 수도 있는 분위기라고나 할까요. 마산에서 반대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엊그제, 마산에서 오랫..

누가 김주열과 그 어머니를 모욕하는가?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회장 백남해·남원대표 박영철)가 발끈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발행하는 월간지 3월호에 실린 기사 때문이다. 르포작가 김순천씨가 쓴 '촛불항쟁을 닮은 시민혁명의 첫 효시 마산 3·15의거 현장을 찾아서'라는 글의 한 구절이 문제였다. 이 글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에 대해 "이모할머니 댁에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을 따져보면 김주열 열사가 불의에 항거하여 시위를 벌이다 희생당한 게 아니라는 말로 해석된다. 문제는 "구경하러 나왔다"는 표현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과거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는 희생자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일부러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고은 시집 '만인보'에 역사적 오류가 있다

요즘 마산은 흔히 3·15의거와 4·19혁명이라 부르는 1960년 3·4월혁명 49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입니다. 어제(11일)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모습으로 떠오른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는 오전에 시신인양지에서 열사의 고향이자 모교인 남원 금지중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열사가 입학식도 치르지 못하고 희생된 마산상고(현 용마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49주기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김주열 열사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열었는데요. 여기서 얼마전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과 제가 번갈아 포스팅했던 친일헌병보 출신으로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김주열 열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박종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주열 살해 유기 원흉은 친일헌병 박종표였다

4·19혁명 열사 김주열을 아시나요? 김주열은 전북 남원 출신으로 1960년 경남 마산의 마산상고에 진학했다가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3·15의 화신이며 4·19의 횃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18일) 블로거 정운현 선배가 '친일헌병들은 애국지사를 어떻게 '고문'했나'라는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등장한 일제 헌병보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신상묵과 박종표였던 것입니다. 신상묵이야 신기남 전 의원의 부친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자이지만, 박종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박종표는 3·15의거와 김주열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원흉입니다. 그는 바로 열 여섯 살의 김주열 학생에게 직격최루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하게 함으로써 살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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